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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규(賈逵) ? ∼ 228년 : 위(魏)의 문신. 하동 양릉(河東 襄陵) 사람으로 자는 양도(梁道). 홍농군 태수(弘農郡 太守)로 있다가 조조(曹操)에게 인정받아 간의관(諫議官)으로 작전에 임했고, 문제(文帝) 때는 예주(豫州)를 다스려 명자사(名刺使)로 이름을 날렸다. 조조(曹操)가 죽자 그의 아들 사이에 자칫 갈등이 생길 뻔했는데, 스스로 둘째 아들 조창(曹彰)을 달래고 세력을 꺾어 무사하게 마물렀다. 사마의를 도와 동오(東吳)들 쳤을 때 조휴(曹休)가 주방(周 )의 거짓 항복을 믿는 것을 간하였다가 노염을 사서 소외되었었으나, 패군 했을 때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조휴는 그를 의지해 죽을 고비를 벗어났다. 이후 많은 공을 세우고 병으로 죽었다.

가범(賈範) : 위(魏)나라 요동 태수(遼東 太守) 공손연(公孫淵)의 충신. 그가 반(叛)하였을 때 극력 사리를 들어 반대하다가 노염을 사 저자에서 베임을 당하였다. 사마의(司馬懿)는 공손연을 멸한 뒤 두 사람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무덤에 봉토 하여 자손을 명예롭게 하여 주었다.

가충(賈充) 217 ∼ 282년 : 진(晋)나라 사마씨(司馬氏)의 모신(謨臣). 건위장군(建威將軍) 가규(賈逵)의 아들로 자를 공려(公閭)라 하였다. 사마소(司馬昭)의 심복으로 그의 찬탈을 도와, 먼저 제갈탄(諸葛誕)의 심중을 떠보아서 이를 궁지에 몰아넣어 모반하게 하였고, 뒤에는 황제 조모(曹 )를 시(弑)하기까지 하였다. 조모는 사마소가 자신의 잠룡시(潛龍時)의 시의(時意)를 한하게 되자, 신변의 위험을 깨닫고 근위병만을 이끌고 짓쳐 나왔던 것인데, 가충이 이를 막아 수하 성제(成濟)를 시켜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이다. 뒤에 사마소를 도우며 그를 움직여 종회(鍾會)로 하여금 등애(鄧艾)를 죽이게 하는 꾀를 내었다. 동오(東吳)를 멸하도록 까지 살아남았다가, 항복한 손호(孫皓)에게 조롱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의 딸은 혜제(惠帝)의 황후가 되었다.

가화(賈華) : 손권(孫權)의 막하 장수. 송겸(宋謙)과 함께 손권의 신변을 호위하였다. 다시 유비(劉備)가 오태부인(吳太夫人)께 뵙는 자리에 도부수(刀斧手)를 이끌고 잠복하였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가후(賈 ) 147 ∼ 223년 : 조조(曹操)의 모사(謀士). 무위 고장(武威 姑藏) 사람으로 자는 문화(文和). 어려서부터 장량(張良), 진평(陳平) 등에게 재사로 인정받았고, 권모술수와 정치에 능했다. 처음 동탁(董卓) 막하에 있다가 동탁이 패하여 잔당이 지리멸렬하려 할 제, 이들을 이끌어 도성을 회복하고 서량태수(西凉太守) 마등(馬騰)과 병주자사(幷州刺使) 한수(韓遂)의 근왕병이 이르렀을 때는, 지구전(持久戰)을 건의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각(李 )과 곽사(郭 )를 도와 장안을 회복하였으나 서로 화목치 못하고 자신의 건의를 듣지 않으매 단신을 빼쳐 도망하였다가, 장제(張濟)의 조카 장수(張繡)를 도와 완성(宛城)에서 조조(曹操)를 크게 파하였다. 나중에 패하여 유표(劉表)에게 있을 때도 조조의 토벌군의 계책을 역이용하여 크게 파하니, 오합지졸을 이끌고도 군사 부림이 이와 같았다. 뒤에 조조가 유엽(劉曄)을 보내어 권하는 바람에 장수(張繡)와 함께 귀순하였고, 조조도 그전 일을 혐의 두지 않고 중하게 썼다. 마초(馬超)가 장안을 빼앗고 동관(潼關)에서 장시일 대전하였을 때, 상대편 강화 안을 묵살하고, 마초·한수 둘 사이에 반간계를 놓을 것을 건의하여, 그 바람에 마초는 결국 패하고 말았다. 조비가 즉위한 지 얼마 안 있어 병을 죽었다. 관직은 태위(太尉).

간옹(簡雍) : 촉(蜀)의 문사. 유비(劉備)와는 동향인 탁군(啄郡) 사람으로 자를 헌화(憲和)이고 관직은 종사낭중(從事郎中). 여포(呂布)가 유비를 치려 할 대 조조(曹操)와의 사이에 연락을 취하였다. 제갈량이 서촉에 출병한 유비를 도우러 갈 때도 동행하였다. 여러 해 사신으로 노고가 많았으며 병으로 죽었다.

감녕(甘寧) : 오(吳)나라의 수군 용장. 자는 흥패(興 ). 파군 임강(巴郡 臨江) 사람으로 관직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양자강을 오르내리며 수적질을 하여 용명을 날리다가, 황조(黃祖)에게 갔으나 강도 출신이라고 써주질 않아 손권(孫權)에게로 항복했다. 하구(夏口) 싸움에서 능조(凌操)를 소아 죽인 일이 있었던 때문에, 그 아들 능통(凌統)과 늘 재미가 없었으나 뒤에 조조(曹操)와의 싸움에서 능통이 낙마하였을 때, 적장 악진(樂進)의 얼굴을 쏘아 맞혀 구해준 때문에 겨우 화해가 이루어졌다. 손권이 가장 아끼고 자랑하는 용장으로, 조조의 남침을 유수구(儒須口)에서 맞이했을 때는 불과 백 명의 기병으로 기습하여 위(魏)의 진중을 무인지경같이 휩쓸었던 때문에 강좌호신(江左虎臣)이라고들 불렀다. 유비(劉備)가 관우(關羽)·장비(張飛)의 원수를 갚으러 출병하였을 때 병을 무릅쓰고 종군하였다가 남만(南蠻)의 만왕(蠻王) 사마가(沙摩柯)가 쏜 화살을 맞고 나무 밑에 앉아서 죽었다.

감부인(甘夫人) : 유비(劉備)의 정실부인. 시호는 소열황후(昭烈皇后). 감가장의 딸로서 유비가 소패(小沛)에 있을 때 촉실(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가 후에 정실이 되었다. 유비에게는 본시 미부인( 夫人)과 함께 두 부인이 있었는데, 미부인은 후주(後主)의 생모로서 당양파(當陽坡) 싸움에서 부상하여 아두(阿斗)를 조운(趙雲)에게 부탁하고는 우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고, 그 후 혼자 유비를 받들다 유비가 형주(荊州)를 차지하고 있는 사이 세상을 떠났다. 이 기회를 틈타 손권(孫權)의 누이와 정략 결혼을 진행시키게 된 것이다.

감택( 澤) : 손권의 막하 모사(謀士). 회계 산음(會稽 山陰) 사람으로 자는 덕윤(德潤). 효렴(孝廉)으로 추천 받아 전당(錢塘) 현장(縣長)으로 있다가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대장 황개(黃蓋)와는 뜻이 통하는 사이라,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앞서 그의 거짓 항복 문서를 가지고 왕복하였는데, 목에 칼이 떨어져도 끄떡 않는 배짱이라, 조조(曹操)의 몇 번 위협도 견디어 결국 조조로 하여금 황개(黃蓋)의 항복을 믿고 적벽의 대 패전을 맛보게 만들었다. 학문도 깊어 저술이 많다. 벼슬이 태자태부(太子太傅) 도향후(都鄕侯)에 이르렀으며 육손(陸遜)을 천거하고 병으로 죽었다.

강서(姜敍) : 위(魏)의 장수. 역성(歷城)을 지키던 무이장군(撫彛將軍). 마초가 재기하여 농서( 西)를 차지하였을 때, 일시 항복하였던 양부(楊阜)와 합세하여 그에게 항전하였다. 그의 늙은 어머니와 아내도 성원하여 크게 기세를 떨쳤는데 어머니는 마초에게 붙잡혀서도 당당하게 그를 꾸짖으며 죽음을 당하였다. 조조(曹操)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함.

강유(姜維) 202 ∼ 264년 : 촉한(蜀漢)의 대장군이요, 제갈량의 계승자. 천수 기현(天水 冀縣) 사람으로 자는 백약(伯約). 천수태수 마준(馬遵)의 부하로 있다가 제갈량의 제 1차 위(魏) 정벌군을 맞아 잘 싸웠던 때문에, 제갈량은 꾀로 그를 고립시켜 항복 받고 평생을 신변에 데리고 있으며 자기가 터득한 병법을 모조리 전수(傳授)하였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뒤 유일한 지주(支柱)로서 촉한의 황실을 버티었으며 역시 뜻을 이어 여러 차례 중원(中原)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또 제갈량 때와 똑같이 성공할 만하면 조정에서 환관(宦官)의 농간으로 불러들여 일을 이루지 못했다. 후주 앞에서 환관 황호(黃皓)를 꾸짖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목숨을 보존하고자 답중(畓中)에 둔전(屯田)하고 있다가, 후주가 항복한 소식을 듣고 종회(鍾會)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뒷일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종회와 의형제를 맺고 사사건건이 등애(鄧艾)와의 사이를 반간(反間) 놓아, 둘이 다 지친 틈에 한실(漢室)을 부흥시키려 하였던 것인데, 등애가 패해 죽은 뒤 종회를 꼬드겨 모반시켰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위(魏)의 장졸을 무수히 죽이고 스스로 목을 쳐서 죽으니 향년 59세였다.

견후(甄后) : 무극(無極) 사람. 용모가 절륜했음. 처음에 원희(袁熙)와 결혼했으나 조조(曹操)가 하북(河北)을 차지한 이후 조비(曹丕)가 아내로 삼음. 명제(明帝)와 동향공주(東鄕公主)를 낳음. 시호는 문소황후(文昭皇后).

경기(耿紀) : 후한의 충신. 낙양 사람으로 자는 계행(季行). 시중(侍中)·소부(少府)로 있었으나, 조조(曹操)가 위왕이 되어 권세가 황실 위를 가는 것을 분히 여겨 위황(韋晃)·김위(金褘)들 동지와 가복(家僕)을 거느리고 봉기하였다가, 중도에 잘못되어 붙잡혀서 죽었다.

경무(耿武) :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의 장수. 원소(袁紹)의 침공을 막으려다가 안량(顔良)에게 허무하게 죽었다. 경기(耿紀)와는 형제.

고간(高幹) : 원소의 조카요, 그의 막하 장수. 병주(幷州)를 지키고 있었다. 원소가 패망한 후 호구관(壺口關)의 요충(要衝)을 지키어 죽기로써 항전하였으나, 내통한 여광(呂曠)·여상(呂翔) 형제에게 속아 조조(曹操)를 치겠노라고 나왔다가 포위 당하고 간신히 혈로(血路)를 열어 흉노(匈奴)의 좌현왕(左賢王)에게 갔으나 받아들여 주지 않자, 유표(劉表)를 의지해 달아나다가 상로현(上 縣)에서 도위(都尉) 왕염(王琰)에게 죽고 그의 목은 조조에게로 보내어졌다.

고람(高覽) : 조조(曹操) 막하의 장수. 농서( 西) 사람으로 본시 원소의 장수였으나, 관도의 싸움 도중 곽도(郭圖)의 참소로 몸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자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유비가 여남(汝南)의 군대를 이끌고 조조의 창정(倉亭) 출전의 배후를 습격하였을 때, 유비를 포위하고 나서 항거하는 유벽(劉 )을 베어 죽였다. 그리고 자신도 이내 조운(趙雲)에게 찔려서 죽었다.

고상(高翔) ? ~ 223년 : 촉한의 장수. 제갈량이 위(魏)를 치고자 출병하였을 때 열류성(列柳城)을 지키어 가정(街亭)의 수비를 도왔으나 마속(馬謖)의 잘못으로 실함(失陷)한 뒤 물러나 양평관(陽平關)을 지켰다. 나중에 목우유마(木牛流馬)를 이끌고 군량 수송을 담당, 적을 유인하여 농락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고순(高順) ? ∼ 198년 : 여포(呂布)의 휘하 장수. 여포가 조조(曹操)·유비(劉備)와 서주(徐州)에서 싸울 때 유비가 근거한 패성(沛城)을 급습하고, 조조가 구원하기 위해 보낸 하후돈(夏侯惇)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뒤에 여포가 하비성(下 城)에서 조조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조조 측으로 배신한 후성(侯成)에게 잡혀 조조(曹操)가 여포를 죽일 때 같이 죽음.

고옹(高雍) : 손권(孫權) 막하의 중신. 오군(吳郡) 사람으로 자를 원탄(元嘆)이라 하였으며, 중랑장(中郞張) 채옹(蔡邕)의 제자. 말이 적고 술을 가까이 않으며 엄숙 정대하여 손권은 그를 군승(郡丞)으로 발탁하여 태수의 일을 대리시켰다. 유비가 유장(劉璋)의 부름을 받고 서촉에 진군하였을 동안 형주(荊州) 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승상(丞相)으로 19년간 재직하였는데, 그의 천거로 벼슬한 사람은 모두가 쓸 만한 인물이었다.

고정(高定) : 촉한에 반기를 든 옹개(雍 )에게 붙었던 월수군(越 郡)의 태수. 제갈량의 반간계(反間計)로 그의 부장 악환(顎煥)은 옹개와 주포(朱褒)를 죽이고 귀순하여, 제갈량은 그에게 익주 태수로 3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고패(高沛) :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 용장. 장로(張魯)의 침입을 막으려 유비를 불러들였을 때 양회(楊懷)와 함께 부수관( 水關)을 지켰었는데, 유비가 회군한다는 말을 곧이듣고 전송하는 체하고 찾아가 기회를 보아 살해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나, 도리어 방통(龐統)의 계책에 손도 써보지 못하고 붙잡혀서 죽었다.

공도( 都) : 여남(汝南) 지방에 나타난 황건(黃巾)의 잔당. 관우가 조조(曹操)의 명으로 토벌에 나섰을 때, 그에게 의지해 있던 손건(孫乾)을 만나 그의 진력으로 유비의 소식을 알게 되고, 다음날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와 조운이 다시 만났을 때는 그의 세력권인 여남을 바탕으로 힘을 폈다. 창정(倉亭)으로 원소를 치러 나간 조조의 배후를 습격하였을 때 조조의 장수 하후연(夏後淵)의 손에 죽었다.

공손강(公孫康) : 위(魏)의 장군. 요동(遼東)의 태수. 양평(襄平) 사람으로 무위장군 공손도(公孫度)의 아들. 원소의 아들 원희(袁熙)와 원상(袁尙)이 조조에게 쫓기어 의지해 들어왔을 때, 조조(曹操)는 곽가(郭嘉)의 유탁(遺託)으로 공격하지 않고 대치만 하고 있었더니 과연 공손강이 두 사람의 목을 베어 보내고 귀순하여 평화를 유지하였다.

공손공(公孫恭) : 위(魏)의 거기장군(車騎將軍). 공손연(公孫淵)의 숙부. 공손연에게 죽음.

공손연(公孫淵) ? ∼ 238년 : 요동(遼東)의 호걸. 공손강(公孫康)의 아들. 228년, 강이 죽고 숙부 공손공(公孫恭)이 위에 나가자 위나라 명제(名帝)로부터 요동태수에 임명. 조예(曹叡)는 연에게 대사마(大司馬) 낙랑공(樂浪公)을 줌. 오(吳)의 손권(孫權)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위나라는 그 배신에 문책의 사신을 파견했으나 공손연은 무력으로 이를 격퇴하고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자립했다. 이에 위나라가 사마의(司馬懿)를 총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하자 공손연도 요수(遼水)를 따라 방위선을 구축했으나 사마의의 양동작전으로 패하고 본거지인 양평(襄平)으로 물러갔다. 한때는 위의 포위 공격을 막아냈으나 마침내 총공격을 받고 항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가다가 잡혀 아들 수(修)와 함께 베임을 당하였고 그 수급이 낙양에 표시되었다.

공손월(公孫越) : 공손찬(公孫瓚)의 동생으로 사신으로 원소(袁紹)에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음을 당함.

공손찬(公孫瓚) ? ∼ 199년 : 북해태수(北海太守) 요서 영지(遼西 令支) 사람으로 자는 백규(伯珪). 일찍이 오랑캐와 전쟁할 때 백마만 뽑아 선봉대를 조직하여 적을 대파한 때문에 백마장군의 칭호를 얻었다. 유비(劉備)와 함께 노식(盧植)에게서 동문 수학하였던 때문에 많이 그를 두호하였고, 동탁(董卓) 토벌군을 일으켰을 때는 제 14진으로 참전, 관운장을 등용하여 공을 세웠다. 원소(袁紹)가 함께 기주(冀州)를 차지하여 놓고 혼자 그 땅을 차지하자, 이와 반하교(磐河橋)에서 결전하다가 원소의 수하장수 문추(文醜)에게 쫓겨 위험하게 되었을 때 조운(趙雲)의 출현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결국 원소와의 대전 결과가 좋지 않아 지키고 있던 기주성(冀州城)이 함락되자, 먼저 처자를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어 죽었다. 관직은 탈위장군(奪威將軍).

공수(孔秀) : 조조(曹操)의 막하 장수. 동령관(洞嶺關)을 지키고 있었는데,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호위해 나가는 것을 막으려다가 그의 칼에 죽었다. 오관참장(五關參將)의 제 1호.

공융(孔融) 153 ∼ 208년 : 북해(北海) 태수. 본디 노국 곡부(魯國 曲阜) 사람으로 자는 문거(文擧). 공자의 20세손 태산도위(泰山都尉) 공주(孔宙)의 아들. 황건 잔당 관해(管亥)의 난을 당하여 태사자(太史慈)의 출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그를 시켜 평원(平原)으로 유비(劉備)의 일행에게 구원을 청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이에 도겸(陶謙)이 조조(曹操)의 침공으로 곤경에 빠진 것을 돕게 하였다. 뒤에 조조 수하에 들어 매양 양심 있는 바른말을 하여 미움을 샀으나, 문명과 덕망에 눌리어 얼른 어찌하지는 못하였다. 조조가 신야(新野)로 유비를 치려할 때 역시 바른말로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공주(孔紬) : 근왕병(勤王兵)때 제후의 한 사람으로 예주자사(豫州刺使)였음. 공자의 20세손.

공지(鞏志) : 무릉(武陵) 태수 김선(金旋)의 종사(從事)였으나, 유비가 적벽대전(赤壁大戰) 후 형주(荊州)를 차지하고 귀순을 권하였을 때, 항전하던 김선(金旋)을 쏘아 죽이고 항복하였다. 그 후 무릉(武陵)의 태수가 되었다.

과정(戈定) : 손권(孫權)의 막하장수 태사자(太史慈)의 수하 졸개. 조조(曹操)의 장수 장요(張遼)의 말먹이는 직에 있는 자기형과 결합하여 내응(內應)하기로 꾀를 세우고 태사자의 야습을 요청하였으나, 장요는 본시 진중(鎭重)한 장군이라 과정은 간단히 그의 손에 붙잡혀서 죽고 말았다. 잘 되었으려니 만 믿고 야습하였던 태사자는 야습에서 화살을 맞고 돌아와 이내 죽었다.

곽가(郭嘉) : 조조(曹操)의 모사(謀士). 자는 봉효(奉孝). 순욱(荀彧)과는 동향인 영주 영음(潁州 潁陰) 사람으로, 정욱(程昱)의 천거로 그의 막하에 들었다. 여포(呂布)와 복양( 陽)에서 싸워 패했을 때는 조조가 화상(火傷)으로 죽었다고 거짓 발상(發喪)하여 여포의 추격군을 크게 파하였다. 원소(袁紹)를 멸한 후 잔당을 소탕하기 위하여 멀리 사막까지 침공하였을 대 종군하여 계책을 들였으나, 도중 풍토가 맞지 않아 병이 들어 역주(易州)에서 요양하다 진중에서 죽으니 때는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관직은 군제주(軍祭酒)이고 시호는 정후(貞侯).

곽도(郭圖) : 원소의 모사. 원소의 패사 후 아들들이 갈려 싸울 때는 큰아들 원담(袁潭)을 도왔다. 원담이 아우 원상과 싸우다 지쳐 일단 조조에게 항복하였다가 다시 평원(平原)으로 남피(南皮)로 항전할 대 행동을 같이 하였으나, 남피성 밖에서 조조의 장수 악진(樂進)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곽사(郭 ) : 동탁(董卓)의 수하 장수. 장액(張掖) 사람으로, 교위(校尉)로 있다가 동탁의 부장이 되었음. 계속 이각(李 )과 행동을 같이하여 장안을 회복하고 횡포를 일삼다가 태위(太尉) 양표(楊彪)와 대사농(大司農) 주전(朱鐫)의 이간책에 넘어가 아내의 투기가 빌미가 되어 이각과 서로 싸워 지쳤을 때, 조조의 대군이 나타나자 몸둘 곳이 없어 산적 떼에 들어가 있는 것을 같은 당 오습(伍習)이 죽여 머리를 조조에게 바쳤다.

곽상(郭常) : 관우가 오관참장(五關參將)하여 유비의 가족을 보호해 오던 도중에 환대해 준 노인. 못난 자식이 있어 관우의 적토마(赤 馬)를 훔치려다 들켰으나 그의 호의의 보람으로 목숨만은 부지하였다.

곽유지(郭攸之) : 후주 유선(劉禪)의 시중으로 비위(費褘), 동윤(董允)과 함께 제갈량(諸葛亮)이 위(魏)를 치러 나갈 때 나라 일을 맡아봄. 정치에 매우 능했고, 병사했다.

곽준(藿峻) : 촉한의 장수. 남부 지강(南部 枝江) 사람으로 일찍이 중랑장(中郞張) 벼슬을 하였는데, 유비의 서촉 출병 중 맹달(孟達)의 천거로 그의 막하에 들어 함께 가맹관( 萌關)에 가, 장로(張魯)의 침입을 막았다.

곽혁(郭奕) : 곽가(郭嘉)의 아들로 곽가 사후 조조(曹操)가 벼슬을 내림.

곽회(郭淮) : 위(魏)의 용장. 태원 양곡(太原 陽曲) 사람으로 자는 백제(伯濟). 한중(漢中) 출병에 종군하였다가 조홍(曹洪)이 장합(張 )의 패전 책임을 물어 합하려는 것을 적극 만류하였다. 사마의(司馬懿)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제갈량과 맞서 싸우다가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다. 뒤에 사마사를 도와 철롱산(鐵籠山)에서 강유(姜維)와 맞섰을 때, 진태(陳泰)를 시켜 강왕(羌王) 미당(迷當)을 속여서 끌어내어 크게 파했으나, 빈 활만 가지고 달리는 강유를 급히 쫓아가며 쏜 화살을 강유가 손으로 잡아 되쏜 것이 이마에 맞아 진에 돌아와 죽었다. 관직은 거기장군(車騎將軍).

관구검(貫丘儉) ? ~ 255년 : 위의 대장. 하동 문희(河東 問喜) 사람으로 자는 중공(仲恭). 유주 자사(幽州 刺使)로 있을 당시, 공손연(公孫淵)의 모반을 중앙에 알려 이를 쳐 멸하고, 자신은 고구려를 침범하여 당시의 동천왕(東川王)은 예봉(銳鋒)을 피하여 동해 바닷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유유(紐由)와 밀우(密友) 두 어린 장수에게 선봉장을 잃고, 얻은 바 없이 회군(回軍)해 갔다. 뒤에 손권(孫權)이 죽었을 때 사마사(司馬師)를 도와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사마씨의 세력이 과대해져서 위(魏)의 황실을 엿보게 되자 문흠(文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이를 치던 중 전세가 불리하여 신현(愼縣)에 갔다가, 그곳 현령(縣令) 송백(宋白)이 주는 술을 먹고 취해 자다가 목숨을 잃었다.

관로(管輅) : 조조(曹操)가 위왕이 되고 도사(道士) 좌자(左慈)에게 농락 당하여 병이 났을 때 불러본 점쟁이. 평원(平原) 사람으로 자는 공명(公明). 여러 가지로 용하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그가 남겨준 예언은 그 뒤 그대로 하나 하나가 부합하여 조조는 다시 그를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뒤에 다시 조상(曹爽)의 모사 하안(何晏)과 등양(鄧 )이 그에게 미래를 점치게 하였더니 일일이 앞날이 막힌 것을 말하여 꺼리지 않았다. 저자들에게 해를 입으려고 그러느냐고 충고한 이도 있었으나 다 죽은 송장들이 뭘 하겠느냐 면서 태연하더니 과연 얼마 안 가서 모두 패하여 죽었다.

관색(關索) : 관우(關羽)의 아들. 형주(荊州)가 함락된 뒤 상처를 치료하며 숨어 있다가, 제갈량이 남만(南蠻)을 토벌할 때 찾아 왔으므로 전부선봉(前部先鋒)을 삼았다고 하나, 앞에도 뒤에도 연결이 없는 것으로 보아 후세에 관우가 신으로 신봉되게 된 뒤 가공적인 인물로 꾸며진 것이라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관순(關純) :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의 수하 장수. 원소(袁紹)의 침공을 막으려다가 문추(文醜)에게 허무하게 죽었다.

관영(管寧) 162 ∼ 245년 : 후한의 명사. 자는 유안(幼安). 주허(朱虛) 사람. 젊어서 화흠(華歆)과 같이 공부하였는데 뜻이 높고 재물에 개결(介潔)하여 화흠의 탐심을 몹시 멸시하였다. 난을 피하여 요동의 공손도(公孫度) 밑에서 30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흰 두건을 쓰고 이층에 거처하여 땅을 걷지 않았으며 조조, 문제(文帝), 명제(明帝) 등이 초청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관우(關羽) ? ∼ 219년 : 하동(河東) 해량현(海良縣) 사람으로, 자는 운장(雲長). 유비와 도원에서 결의한 이래 고난을 같이하였다. 삼국지 연의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미 민간에서 널리 신으로 모셔졌을 때라, 관공(關公)이란 칭호로 등장한다. 작자도 전편을 통하여 충의의 화신으로서 주인공을 삼아 그려냈다. 사수관( 水關) 싸움에서 동탁 수하의 맹장 화웅(華雄)을 단칼에 베어 용명을 떨친 이래, 계속 삼국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지녔다. 한 대 곤경에 빠져 조조를 의지했으나, 끝내는 단기로 오관참장(五關參將)하고 유비 가족을 모셔 의기(義氣)를 빛냈으며, 뒤에 형주(荊州)를 차지해 앉아 움직이지 못할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자존심이 화근이 되고 양양(襄陽)을 뺏으려 추병한 사이, 오(吳)의 기습을 받아 궁지에 빠진 끝에 죽음을 당하니 건안(建安) 24년 10월의 일이요, 향년 59세였다. 자주 영검을 보이어 여몽(呂蒙)을 죽이고 아들 관흥(關興)을 시켜 원수를 갚게 하는 등, 어디까지나 신격화시켜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재신(財神)의로 신봉되어 민간의 신앙이 대단하다.

관이(關弛) : 유비(劉備)의 장수. 관우(關羽)의 아들로 한수정후에 봉해짐.

관정(關定) : 관우가 조조 곁을 벗어나 유비를 찾아 헤맬 대 만난 노인. 아들 둘이 있는데 위로 관영(關寧)은 학문을 뜻하고, 아래로 관평(關平)은 무예를 좋아하여. 관우는 그 중 관평을 양자로 받아들여 평생을 같이 하였다.

관평(關平) ? ∼ 219년 : 관우(關羽)의 양자(養子). 얼굴은 희고 수염이 없었다 한다. 본시 오관참장(五關參將)하고 관우가 유비를 찾아 나섰을 때 신세 진 관정(關定) 노인의 작은아들. 정사(正史)에는 아버지와 같이 오나라 마충(馬忠)에게 체포되었다는 기록밖에는 없으나, 소설에서는 평생 양부를 따라 행동하다 형주(荊州) 함락 후 아비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관흥(關興) : 촉한 유비의 막하장수. 관우(關羽)의 아들. 자는 안국(安國). 유비가 그의 아버지 원수 갚으려 출병하였을 때, 장비의 아들 장포(張苞)와 함께 종군하여 그를 도왔다. 난군중에서 아비의 원수인 동오(東吳)의 반장(潘璋)을 찾아내어 죽이고, 아비가 쓰던 청룡도(靑龍刀)를 도로 찾아 평생 사용하였다. 활도 잘 쏘고 무용이 절륜하여 아비만 못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여러 차례 싸움에 공을 세우고 제갈량의 6차 정벌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괴량( 良) : 유표(劉表) 막하의 모사(謀士). 손책(孫策)의 침입으로 양양성(襄陽城)에 포위되었을 때, 여공(呂公)을 시켜 그를 산 속 협로로 유인, 돌을 굴리고 쇠뇌를 쏘아서 죽였다. 그리고 계속 추격하여 동오를 멸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말 관상 보는 데도 뛰어났던 듯, 죽은 뒤 그의 아우 괴월은 형의 가르침이라고 유표(劉表)에게 적로마를 타지 말라고 권하였다.

괴월( 越) : 유표(劉表) 막하의 모사. 자는 이도(異度). 괴량( 良)의 아우로서, 유표가 유비에게서 얻은 적로마를 불길하니 타지 말고 돌려주라고 권하였다. 또 채모(蔡瑁)와 짜고 유비를 연회에 청하여 죽이려고도 하였다. 유표가 죽은 뒤론 역시 그들과 함께 조조에게 항복하기를 서둘러 강릉태수(江陵太守) 번성후(樊城候)가 되었다.

교국로(喬國老) : 소위 대교(大喬)·소교(小喬)의 아버지. 둘 다 절세미인으로 대교는 손책(孫策)의 아내가 되고 소교는 주유(周瑜)의 부인이 된 때문에, 손권 가정과는 떼지 못할 사이가 된다. 사람됨이 진실하여 제갈량은 이를 의지하여 유비의 혼사를 성취시켰다.

교모(喬瑁) : 조조(曹操)가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킬 때 17로 제후의 한 사람으로 동군태수(東郡太守)였음.

교예(橋濊) : 원술(袁術)의 부하.

구건(丘建) : 위(魏)의 장수로 종회(鍾會)의 심복이었는데, 종회가 모반하여 모든 장수를 잡아 가두고 장차 죽이려 하자, 옛날 상사 호열(胡烈)의 부탁을 받아 외부와 연락하며 종회를 칠 계책을 꾸몄다.

구안(句安) : 촉한의 대장. 제갈량이 죽은 뒤 강유의 첫 번 출전에, 이흠(李歆)과 함께 국산(麴山)에 두 성을 쌓고 지켰는데, 포위 당한 지 여러 날이 되어도 구원병이 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위(魏)에 항복하였다.

구안(苟安) : 촉한의 시원치 못한 장수. 영안성(永安城)의 이엄(李嚴)에게서 군량미의 수송을 맡아 가지고 가다가 도중에서 지체하여 날짜를 늦은 죄로 매를 맞고는 그 길로 위진(魏陳)으로 달려가 항복하였다. 사마의(司馬懿)는 그자를 시켜 촉한 후방에 가 유언(流言)을 퍼뜨리게 하였다. 그에게 뇌물을 먹은 환관(宦官)들이 제갈량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후주(後主)에게 고해바쳐 제갈량은 까닭 모르고 불려서 회군(回軍)하였는데, 군사를 풀어 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위(魏)로 도망친 뒤였다.

국의(麴義) : 원소(袁紹)의 장군(將軍)

극정( 正) : 촉한의 구신(舊臣). 하남 언사(河南 偃師) 사람으로 자는 영선(令先). 강유(姜維)가 환관 황호(黃皓)의 농간으로 궁지에 빠지게 된 것을 귀띔해 주고 다시 그에게 답중(畓中)에 나아가 둔전(屯田)하여 신상에 닥쳐올 위험을 모면할 길을 일러주었다. 후주가 위(魏)에 항복한 뒤 가족을 버리고 단신으로 그를 따라가 돕다가 병으로 죽었다.

금환삼결(今環三結) : 맹획(孟獲)의 삼원수 중의 한 명으로 싸움에서 조운(趙雲)에게 죽음.

기령(紀靈) : 원술(袁術)의 장수. 장사(長史) 양대장(楊大將)의 의견으로, 명을 받아 소패(小沛)로 유비를 치러 갔을 때, 여포(呂布)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원문(轅門)에서 활을 쏘아 창을 맞혀 화의(和議)를 권하는 바람에 허탕치고 돌아왔다. 그러나 여포의 딸을 며느리로 맞는 정책 결혼으로 협공하여 유비를 멸하자는 의견을 내었다가 실패하고, 원술이 원소를 의지해 갈 때, 군사를 거느렸다가 길을 막는 장비와 싸우다 죽었다.

길막(吉邈)·길목(吉穆) : 후한의 충신인 태의(太醫) 길평(吉平)의 두 아들. 앞서 동승(董承)이 의대조(衣帶詔)를 받들어 조조를 도모하려 들었을 때 길평도 여기 가담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자, 형제가 함께 멀리 피신해 있었다. 세상이 가라앉은 뒤 허도(許都)에 돌아와 경기(耿紀)·위황(韋晃) 들이 위왕이 된 조조를 치고자 모의하는 데 합세하여, 군사를 일으켜 싸우다가 죽었다. 막(邈)의 자는 문연(文然), 목(穆)의 자는 사연(思然)이었다.

길태(吉太) : 유명한 의사. 낙양(洛陽) 사람으로, 자는 칭평(稱平). 흔히 길평(吉平)이라 불렀다. 동승(董承)의 병을 보러 갔다가 그의 충성에 감복하여 동지로서의 서약을 맺고 틈을 보다 조조에게 독을 먹여 죽이기로 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갖은 악형 끝에 당당하게 죽었다.

김선(金旋) :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였을 당시의 무릉군(武陵郡) 태수. 자는 원기(元機). 경조(京兆) 사람으로 한(漢)에서 벼슬하여 중랑장(中郞張)을 지냈다. 적벽대전 후 성을 차지하려는 유비를 막으려다 부하 공지(鞏志)의 내응으로 이루지 못하고 그가 쏜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김위(金褘) : 후한의 충신. 재상 김일제(金日 )의 후손으로 평소부터 조조의 횡포를 미워하였다. 조조가 위왕이 되어 황실로가 위세 부리는 것을 분히 여겨, 경기(耿紀)·위황(韋晃) 등 동지들과 가복(家僕)을 거느리고 봉기하였으나 일이 낭패되어 붙잡혀서 죽었다.

[나]

낙통(駱統) : 손권의 막하 모사(謀士). 회계 오정(會稽 烏程) 사람. 자는 공서(公緖).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겨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스무 살에 오정상(烏程相)이 된 이래 은혜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뒤에 육손(陸遜)을 따라 촉군을 파하고 조인의 유수(儒須) 침공 등에 모두 공을 세워 신양정후(新陽亭侯)의 봉을 받았으며 병으로 죽었다.

냉포(冷苞) :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 용장. 유장이 장로(張魯)를 막고자 유비를 불러들일 때 극력 반대하였고, 다시 유비가 부수관( 水關)을 뺏고 낙성(洛城)을 칠 때도 용감하게 항전하였다. 그러다가 위연(魏延)에게 사로잡혀 항복하곤, 곧 성에 돌아가 성도로 구원병을 청하였다. 오의(吳懿)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물을 대어서 부성을 칠 것을 건의하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였다가 순찰하던 위연에게 패하여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노소(路昭) : 위(魏) 장수. 조조가 유비에게 5만 군대를 주어 원술(袁術)을 치게 할 때 아무래도 안심되지 않아 그를 따라 보냈었으나 원술을 멸한 후 유비가 독립하여 맥없이 돌아왔다.

노손(盧遜) : 촉한(蜀漢)의 장수. 남정관(南鄭關)을 지키어 종회(鍾會)의 침입을 막고 있었는데 제갈량이 남긴, 한번에 열 개씩이나 살을 쏘는 쇠뇌를 장치하여 먼저 허의(許儀)를 쫓고 종회까지 몰아냈으며, 스스로 쫓아 거의 잡을 뻔했으나, 순개(荀愷)가 쏜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노숙(魯肅) : 손권 막하의 명장. 자는 자경(子敬). 임회군 동성현(臨淮郡 東城縣) 사람. 많은 자산을 가진 호족(豪族)으로서 주유(周瑜)가 우백의 부하를 이끌고 와서 협력을 부탁하자 저장미의 반이나 되는 3천 석을 희사했다. 주유의 천거로 손권과 회견하여 천하통일의 대계를 개진함으로써 그의 신뢰를 얻어 그의 오른팔이 되었다. 조조의 남하 때는 재빨리 유비와 공동 전선을 펴도록 제창하고 스스로 유비를 방문하여 동맹을 맺었다. 그 역시 제갈량, 주유와 함께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군을 물리친 주역의 한 사람이었다. 제갈량과는 본시 적수가 안 되었으나, 그와의 사이를 왕래하며 양국 사이에 충돌을 없애기에 진력하였다. 건안(建安) 15년, 주유가 젊은 나이로 죽자, 뒤를 이어 오(吳)의 대도독(大都督)의 군세를 인계 받고 병권을 장악하였다. 적벽대전 후 유비와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던 형주(荊州) 분할 문제를 해결하여 상수(湘水)를 경계로 분할하는데 성공했다. 육구(陸口)에 있어 은혜와 위엄으로 처하였는데 관로(管輅)의 예언에 따라 병들어 죽고, 여몽(呂蒙)이 이어서 군사권을 쥐었다.

노식(盧植) : 후한(後漢) 말엽의 중신(重臣). 탁군(琢郡) 사람.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유비(劉備)와 공손찬(公孫瓚)의 스승이기도 하다. 황건적의 난 때 관군을 이끌고 나가 연승을 함. 황건적(黃巾賊)의 두목 장각(張角)과 대치하나 감전선을 시찰 나왔던 환관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무고로 귀양을 갔다. 후에 황보숭(皇甫嵩)의 힘으로 복직되어 황제 측근에서 정무를 담당했다. 159년, 원소(袁紹) 등이 환관을 몰아내려 하자 장양(張讓) 등 환관이 하태후(何太后)·소제(少帝)·진류왕(陳留王) 등을 납치하여 도망치려는 것을 꾸짖어 하태후를 구했다. 그 후 동탁(董卓)이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즉위시키려 했을 때 홀로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낙향하게 되었다.

노지(盧芝)·신창(辛敞) : 위(魏)의 장수. 조상(曹爽)이 일당을 거느리고 사냥에 나간 사이, 사마의(司馬懿)가 쿠데타를 일으켜 성문을 굳게 닫고 일을 도모하였을 때, 문지기 군사를 베고 달려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쿠데타가 성사한 뒤 사마의는, '각각 저들의 주인을 위해 한 일이니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냐'고 죄를 묻지 않았다.

뇌동(雷同) : 촉(蜀)의 장군.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 장수였는데 장임(張任)을 도와 낙성(洛城)을 지키다 포위에 빠져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한중(漢中) 와구관 싸움에서 조조의 침입을 막을 때 장비(張飛)의 부장으로 활약했으나 포위에 빠져 장합(張 )의 손에 죽었다.

뇌박(雷薄) : 원술(袁術)의 막하 장수. 원술이 전국(傳國)의 옥새(玉璽)를 손에 넣고 황제라 참칭(僭稱)하며 극도의 사치로 세력이 기울어지자, 그의 지휘를 벗어나 숭산(崇山)에 들어가 있다가, 유비와의 접전 때 원술의 양초를 약탈하고 측면을 교란하여 그의 멸망을 촉진하였다.

누자백(樓子伯) : 조조(曹操)가 동관(潼關)에서 마초(馬超)의 군대와 맞서 고전(苦戰)하던 중 찾아온 도사(道士). 본래 경조(京兆) 사람으로 도호를 몽매거사(夢梅居士)라 하며 종남산(終南山)에 숨어산다는 노인으로서, 조조에게 시절에 맞도록 토성에 물을 부어 얼리면 굳은 성이 될 것을 일러주고 그곳을 떠났다.

능조(凌操) : 손권의 수하 장수. 오군(吳郡) 여항(餘杭) 사람으로, 엄백호(嚴白虎)가 패해 들어 왔을 때 이를 쫓고 손책(孫策)의 막하에 들었다. 건안(建安) 8년, 손권이 황조(黃祖)를 칠 때 작은 배로 맨 앞서 돌진하여 하구(夏口)까지 이르러 황조의 대장 감녕(甘寧)이 쏜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능통( 統)은 그의 아들. 관직은 파구교위(破寇校尉)

능통(凌統) : 손권의 막하 장수. 회계(會稽) 사람으로 자는 공적(公績). 15세에 황조(黃祖)를 치는 전투에 종군하였다가, 아비 능조(凌操)가 적장 감녕(甘寧)의 화살에 맞아 죽자, 분전하여 아비의 시체를 찾아 돌아왔다. 뒤에 손권이 합비에서 위(魏)의 장요(張遼)와 맞 싸울 때 그를 위험에서 구해내 교위(校尉)가 되고, 감녕(甘寧)을 늘 살부지수(殺父之讐)로 대했으나, 죽을 고비에 그의 덕으로 살아난 뒤론 혐의를 풀고 지냈다. 벼슬이 편장군(偏將軍)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다]

단규(段珪)·장양(張讓) : 후한 십상시(十常侍) 환관(宦官) 중의 우두머리, 황제를 끼고 갖은 모략과 악행을 다하고, 이들을 죽이고자 서두르던 대장군 하진(何進)은 도리어 그들 소에 죽음을 당하였다. 원소(袁紹)의 토벌을 받고도 황제를 받들어 도피하며 끝까지 버티다가 맨 마지막으로 소평진(小平津)에서 죽었다.

담웅(譚雄) : 손권 수하의 장수.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 출병하였을 때, 첫 번 싸움에서 장포(張苞)의 무용이 뛰어난 것을 보고 그의 말을 쏘아 맞혀 낙마시켰다. 관흥(關興)은 그를 사로잡아다 장포에게 주어, 죽은 말의 영혼을 제사지내게 했다.

당균(黨均) : 위(魏)의 장수. 등애(鄧艾)가 사마망(司馬望)과 함께 강유(姜維)를 맞아 싸워 크게 패했을 때, 도저히 힘으로이기지 못할 것을 깨달은 그들은 반간계(反間計)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그래 자원하여 촉중에 들어가 유언을 퍼뜨리고, 그 때문에 환관 황호(黃皓)는 강유를 회군시켜, 위군(魏軍)은 싸우지 않고 이기게 되었다.

당자(唐咨) : 동오(東吳)의 장수. 위(魏)의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소(司馬昭)의 황제를 폐립한 죄를 물어 반기를 들었을 때, 그의 청으로 군사를 파견하게 되어 일 부대를 지휘하였다. 수춘성(壽春城)이 싱겁게 함락된 뒤 사마소는 종회(鍾會)의 말을 따라 모든 장병을 풀어 돌려보내 주었으나, 그만은 손침(孫 )의 박해를 두려워하여 눌러 있다가 위(魏)에 항복하였다.

대교(大喬) : 동오(東吳) 교공(喬公)의 딸로서 동생 소교와 함께 절세의 미인. 그는 손책(孫策)의 부인이 되고 동생은 주유(周瑜)의 아내가 되었다.

대능(戴陵) : 위(魏)의 장수. 사마의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선봉으로 싸웠고, 포위에 빠졌다가 장합(張 )의 구원으로 살아났다. 그때 장합의 용맹을 눈여겨보고 제갈량은 '이놈 두었다간 큰일 나겠다'고 생각하고 꾀를 내어 유인해서 죽인 것이다.

대래동주(帶來洞主)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처남. 그를 도와 목록대왕(木鹿大王)을 청해 왔으나 패하게 되자, 거짓으로 항복하여 일을 꾸미다가 이 역시 실패하였다. 계속 꾀를 내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일곱 번 용서받은 뒤로는 심복하여 변하지 않았다.

대원(戴員) : 손권 막하에서 손권의 아우 손익(孫翊)을 도와 단양(丹陽)의 군승(郡丞)으로 있었으나, 사소한 감정으로 상사인 손익을 죽이고, 가재와 여자들을 빼앗았으나 손익의 처 서씨(徐氏)의 꾀에 떨어져 허무하게 죽었다.

도겸(陶謙) : 서주(徐州) 태수. 단양(丹陽) 사람으로 자는 공조(恭組). 서주자사(徐州刺使) 때 황건적 토벌 공으로 서주목(徐州牧)이 됨. 193년, 서주의 하비(下 )에서 관선(關宣)이 천자(天子)를 잠칭하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침. 사람됨이 온후순독 하였는데, 조조의 아비 조숭(曹嵩)이 난을 피하였다가 아들의 모심을 받아 자기 영토를 지나게 되었을 때 순전히 호의로 도위(都尉) 장개(張 )를 시켜 호위하게 한 것이, 장개는 본시 황건적의 잔당이라, 본성을 드러내어 조숭의 일행 전 가족 40여 명을 몰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조가 원수를 갚겠다고 대군을 휘동하매 무수히 변명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각처의 구원병으로 항전하는 한편 자신은 노병(老病)을 이유로 유비(劉備)에게 서주를 맡으라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동궐(董厥) : 촉한(蜀漢)의 구신. 의양(義陽) 사람으로 자는 공습( 襲). 성질이 순진하고 착하며 매사에 성실하여 거짓이 없었다. 벼슬이 보국(輔國) 대장군에 이르렀으며, 촉한이 망할 때는 검각(劍閣)을 지켰다. 거기서 강유(姜維)의 회군을 맞이하여 함께 황호(黃皓)의 전권을 개탄했는데, 촉이 망한 뒤로는 사마씨의 진에서 벼슬하다 병들어 죽었다.

동귀비(董貴妃) : 헌제(獻帝)의 후궁(後宮). 오라버니 동승(董承)이 의대조(衣帶詔)를 받아 조조를 치려던 계획이 탄로나 회태(懷胎) 5개월의 몸이건만 조조의 손에 무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동다노(董茶奴)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대장. 장억과 장익에게 각각 사로잡혔다가 놓인 데 감격하여 맹획을 묶어서 바쳤으나, 뒤에 맹획에게 유인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동민(董旻) : 동탁(董卓)의 동생. 형의 권력을 업고 부귀영화를 누리다 그와 같이 죽음.

동소(董昭) : 위(魏)나라의 중신(重臣). 제음현 정도(濟陰縣 定陶) 사람으로 자는 공인(公仁). 과거에 급제한 후 원소(袁紹)와 장양(張楊)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나, 황제의 환도를 듣고 달려와 조근(朝覲)하고 칙사로서 조조에게 파견되었다. 조조가 득세한 뒤 장사(長史) 벼슬에 있으면서 허도(許都)로 천도할 것을 진언하고 조조를 위공(魏公)에 이어서 위왕(魏王)으로 승진시킬 것을 추천했으며, 구석(九錫)을 가하라고 권유하였다. 관우가 형주(荊州)에서 출병하여 번성을 에워쌌을 때, 구원병을 보내기에 앞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지키는 조인(曹仁)의 사기를 돋우고 관우의 심경을 어지럽게 하는 심리작전을 건의하였다. 조조가 죽은 뒤에 조비(曹丕)·조예(曹叡) 등을 받들어 크게 공헌했다. 벼슬이 태복(太僕)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동습(董襲) : 손권 막하의 장수. 회계 여요(會稽 餘姚) 사람이며 자는 원대(元代). 엄백호(嚴白虎)가 쫓기어 왔을 때 이를 베어 들고 손책(孫策)의 막하에 들었다. 조조가 세 번째 대군을 회동해 남침했을 때, 이를 막아 싸우던 중, 배에 있으면서 적진에 돌격한 서성(徐盛)의 기세를 돕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히게 되었으나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동승(董承) : 동귀비(董貴妃)의 오라버니. 헌제를 맞이하기 위해 안읍(安邑)에 온 조홍(曹洪)의 군사를 물리쳤다. 허전(許田)의 사냥에서 조조의 외람된 행동을 보고 격분하여 헌제(獻帝)의 밀조(密詔)를 하사 받음으로 유비(劉備)·마등(馬騰), 길평(吉平), 오자란(吳子蘭), 충즙(沖楫), 왕자복(王子服)등과 연판장의 혈서를 씀. 유비 등과 조조 암살을 시도했으나, 유비가 서주(徐州) 정벌을 나간 사이에 하인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어 온 가족과 그의 누이인 헌제의 황후 동귀비마저 살해되었다.

동심(董尋) : 위(魏)의 문신(文臣). 조예(曹叡)가 사치를 일삼아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방림원의 역사에는 공경대부에게까지 흙과 나무를 운반시키는 것을 보고 표를 올려 그 부당함을 간했다. 조예는 격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래도 충의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인정받아, 벼슬이 깎이고 평민이 되었다.

동윤(董允) : 촉한(蜀漢)의 문신(文臣). 동화(董和)의 아들로 자는 휴소(休昭). 성질이 엄정하여 조정에 서서 능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만 했었는데, 제갈량이 죽은 뒤 촉한의 조정에서 활약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동중(董重) : 동태후(董太后)의 친정오라버니. 영제(靈帝)가 세상을 떠나고 십상시(十常侍)들의 옹립으로 동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자, 표기장군(驃騎將軍)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권세를 쥐었으나, 하진(何進)의 쿠데타를 만나 자택에서 자문(自刎)하여 죽었다.

동초(董超) : 조조(曹操) 막하의 장수. 우금(于禁)의 부장으로 관우 토벌에 앞서, 자원 종군하려는 방덕(龐德)이 촉한에 연루가 있어 모반할까 염려하여, 그를 참소 하였으나 결국 같이 행동을 취하였는데, 궁지에 빠져 항복할 것을 발의하였다가 동형(董衡)과 함께 방덕의 칼에 죽었다.

동탁(董卓) : 농서 임조( 西 臨 ) 사람으로 자는 중영(仲潁). 처음 강족(姜族)의 추장을 회유하여 세력을 길렀다. 벼슬이 하동(河東) 태수로 있을 때, 황건적 난리의 몇 번의 전투에서도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나, 궁중의 환관들과 줄을 대어 전장군(前將軍) 서량자사(西 刺使)로 오향후(鰲鄕侯)로 승진하였다. 하진(何進)이 십상시를 멸하고자 황제의 명의로 외부의 군벌을 불러들이매, 이때를 놓칠세라 이각(李 )·곽사(郭 )·장제(張濟)·번주(樊 )들의 무리를 거느려 대군을 휘몰아 낙양(洛陽)을 누르고 중앙의 실권을 쥐었다. 소제(少帝)의 폐립(廢立)을 감행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시역한 후 헌제를 세워 정권을 잡은 후 스스로 태사(太師)가 되어 여포(呂布)를 끼고 천하를 짓누름. 이에 대해 민심이 이탈하고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는 동탁 토벌군이 크게 일어나 사수관( 水關)·호로관(虎 關) 싸움이 모두 불리해지자 도읍을 자기 세력권에 가까운 장안(長安)으로 옮기고, 낙양(洛陽) 구가의 재물을 몰수하고 불을 지르며 역대 능묘를 파헤쳐 부장품(副葬品)을 약탈하였다. 미오( 塢)에 크게 별장을 짓고 일문을 모두 요직에 앉히어 영화를 마음껏 누리려 하였으나,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미인 초선(貂蟬)을 가지고 연환계(連環計)를 쓰는 바람에 아들이라 믿던 여포(呂布)에게 허무하게 죽었다.

동형(董衡) : 조조(曹操) 막하의 장수. 우금(于禁)의 부장으로 관우 토벌에 앞서, 자원 종군하려는 방덕(龐德)이 촉한에 연루가 있어 모반할까 염려하여, 그를 참소 하였으나 결국 같이 행동을 취하였는데, 궁지에 빠져 항복할 것을 발의하였다가 동초(董超)와 함께 방덕의 칼에 죽었다.

동화(董和) : 서촉 유장(劉璋) 수하의 익주 태수(益州 太守). 남군 지강(南郡 枝江) 사람으로 유비의 침공을 당해 위경에 빠졌을 때 장로(張魯)와 화해하고 연합하여 막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에 촉한(蜀漢)에서 벼슬하여 좌장군 대사마(大司馬)까지 되었다.

동황(董璜) : 후한 말, 조정의 관료.

동후(董候) : 하간(河間) 사람. 관은 해두정후(解竇亭侯). 유장(劉長)의 부인. 영제(靈帝)를 낳았음. 헌제를 편들다가 대장군 하진(何進)에게 독살되어 죽음.

동희(董禧) : 위(魏)의 장수. 제갈량이 제 1차로 위를 칠 때 하후무(夏候楙)의 부장이 되어 마주 출전하였다가 관우의 아들 관흥(關興)의 손에 죽었다.

두경(杜瓊) : 촉(蜀)의 문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냄.

두습(杜襲) : 조조 막하의 문신(文臣). 영천 정릉(靈泉 定陵) 사람으로 자는 우서(于緖). 학식이 유여 하여 조조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동지들과 함께 그에게 위왕(魏王)이 되기를 권하였다. 벼슬이 대중대부(大中大夫)에 이르고 죽은 뒤 정후(定侯)라 시호하였다.

두예(杜預) : 진(晋)의 대장.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凱). 장군 양호(羊祜)의 천거로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되어 진주(晋主) 사마염(司馬炎)의 명을 받아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길러 오(吳)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기회가 있기를 기다려 대도독(大都督)으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오(東吳)를 정벌하였다. 자신, 말도 탈 줄 모르고 활은 잡을 줄도 모르면서도 군사를 움직여 싸워 이기는 데는 어떠한 장수도 당할 이가 없었다. 동오를 정벌한 공로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으며,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두원(杜遠) : 산적의 두목으로, 관우가 호송해 오는 유비의 가족을 납치하였다가, 평소 관우의 의기에 감복하였다. 훗날 동지 요화(寥化)의 손에 죽었다.

등애(鄧艾) : 사마씨(司馬氏) 휘하의 대장. 의양 극양(義陽 棘陽) 사람으로 자는 사재(士載). 말을 더듬어 '애애' 하는 버릇이 있었다 한다. 사마의(司馬懿)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농정(農政)·통운(通運)에 업적을 올리고 오나라에 대한 전략으로 둔전책(屯田策)을 성공시켰다. 255년, 관구검(貫丘儉)·문흠(文欽)등의 반사마씨(反司馬氏) 거병 때 연주자사( 州刺使)였던 그는 기동대를 이끌고 진압작전에 참가하여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강유(姜維)의 침입을 잘 막았으며, 263년 촉(蜀)을 정벌하는데 있어서는 서쪽 방면의 침공대를 지휘하여 산을 깎고 하천에 다리를 놓는 등 험한 길을 개척하여 대번에 성도(成都)에 육박하였다. 10월에 들어 사찬(師纂)과 아들 등충(鄧沖)을 격려하여 제갈첨(諸葛瞻)·장준(張遵) 등의 목을 베고 유선(劉禪)의 항복을 받아 드디어 성도 입성을 성취했다. 그러나 이듬해 반란의 기색이 보인다는 사찬(師纂)·종회(鍾會) 등의 무고로 선무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자식과 함께 처형되었다.

등양(鄧 ) : 위(魏)의 문신.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현무(玄武). 명신 등우(鄧禹)의 자손이다. 조상(曹爽)에게 붙어 그가 어린 임금 조방(曹芳)을 돌보고 있는 사이, 상서(尙書)의 높은 벼슬로 권세를 부렸으나, 사마의가 비상 수단으로 병권을 되찾자 일당과 함께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등용(鄧龍) : 유표(劉表)의 부하 황조(黃祖)의 수군대장. 손권의 침공을 맞아 배와 배끼리는 묶어서 성같이 만들고, 활과 쇠뇌를 쏘아붙여 잘 싸웠으나 감녕(甘寧)의 칼에 맞아 죽었다.

등의(鄧義) : 유표(劉表) 수하의 장수. 유표가 죽은 뒤 채씨의 일당이 되어 치중(치중) 벼슬로 형주(荊州)를 지켰으나, 유종(劉琮)이 항복하고 죽은 뒤 조조의 군대가 밀려오자 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와 항복하였다.

등지(鄧芝) : 촉한(蜀漢)의 문신. 의양 신야(義陽 新野)사람으로 자는 백묘(伯苗). 후한의 명장 등우(鄧禹)의 자손. 강직하고 식견이 뛰어났으며 담력이 있는 한편 구변도 좋았다. 유비를 받들어 정무를 담당했고, 그가 죽었을 때 원한을 잊고, 동오와 수호하여야 되겠다는 판단은 제갈량과 일치한 점이 있었다. 자주 동오 사이에 사신으로 다니며 우호 관계를 계속 지키기에 진력하였다. 관직은 대장군(大將軍) 양무정후(陽武亭侯)에 책봉됨. 공명(孔明) 1차 정벌에서 조운(趙雲)과 활약, 제갈량의 북정(北征)에 참가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중직을 역임하며 국정을 맡아보았다. 천수를 다하고 죽음.

등충(鄧忠) : 사마씨(司馬氏)의 대장. 장군 등애(鄧艾)의 아들로 아직 어린 나이에 아비를 쫓아 출전하여 장성의 포위를 깨고 강유(姜維)와 싸워 크게 무예를 겨루었다. 아비 못지 않은 용맹으로 잘 싸웠으나 성도(成都)를 함락시킨 뒤 부자(父子)가 함께 붙잡혀 가던 도중, 아비는 위관(衛瓘)에게 죽고 자신은 항거하다가 난군중에 죽었다.

등현(鄧賢) :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 장수. 유장이 장로(張魯)의 침입을 막으려 유비를 불러들일 때 극력 반대하였고, 유비가 낙성을 공격할 때도 용감히 잘 싸웠다. 위연(魏延)을 쫓아 넘어뜨리고 창으로 찌르려던 찰나 황충(黃忠)의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마]

마균(馬均) : 위(魏)의 문신. 조예(曹叡)가 사치를 일삼고 크게 토목 공사를 이룩할 때 공사 감독의 책임을 맡아 궁사극치하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의 원망과 국력의 피폐가 말이 아니었다. 동인(銅人)을 옮기고 승로반(承露盤)을 세우며, 끝내는 섬돌 앞에 항시 기름 가마를 끓여 간하는 신하의 입을 막았다. 일개 박사(博士)의 몸으로 조예의 명을 방아 했을 뿐이겠지만, 위의 황실은 이리하여 기울어진 것이다.

마대(馬岱) : 촉한(蜀漢)의 대장(大將). 서량태수(西凉太守) 마등(馬騰)의 형의 아들. 마등이 조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였을 때,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여 변장하고 도망가 이 소식을 고향에 전하였다. 뒤에 사촌 마초(馬超)를 도와 숙부의 원수를 갚으러 여러 차례 싸웠고, 패한 뒤에도 계속 마초와 행동을 같이하여 촉한의 대장으로서 활약하였다. 제갈량의 신임을 받아 크고 작은 싸움에 계속 참여하여 그때마다 실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갈양 사후, 양의와 위연의 대립에서 양의의 명령을 받고 도망치는 위연을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마등(馬騰) : 서량태수(西凉太守).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후손으로, 자는 수성(壽成). 농서( 西) 사람. 영제(靈帝) 말엽, 탕구우트족의 반란을 진정한 공으로 초평(초평) 년간에 정서장군(征西將軍) 괴리후(傀里侯)에 책봉되었으며, 진서장군(鎭西將軍) 한수(韓遂)와는 형제의 의를 맺고 지냈었다. 장안(長安)이 동탁(董卓)의 잔당들 손에 들어갔을 때도 근왕병을 이끌고 올라왔으나, 날짜를 끄는 통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워낙 본거지가 멀기 때문에 시일을 끄는 것은 식량의 수송 관계로 언제나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조정에 있어서는 조조의 횡포를 미워하여 동승(董承)을 통해 의대조(衣帶詔)를 받들고, 이내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를 길렀다. 적벽대전 후 조조는 설욕차 남침하고 싶었으나, 그의 후방 교란이 염려되던 중 순유(巡遊)가 꾀를 내어 벼슬을 돋우어 서울로 불러 올렸다. 마등 자신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간적을 치려는 계획이었는데, 조조의 응대차로 보낸 황규(黃奎)가 조정 중신 황완(黃琬)의 아들이라, 서로 뜻이 통하였다. 그러나 황규 집안의 사소한 사고로 일은 탄로나 부자가 함께 죽음을 당하고, 형의 아들 마대(馬岱)만이 목숨을 건져 서량으로 도망하였다. 아들 마철(馬鐵)·마휴(馬休)도 함께 목숨을 잃고, 장자 마초(馬超)만이 고향에 남아 마대와 함께 조조를 쳐서, 여러 번 곤경에 몰아 넣었었으나 그때마다 성공치 못하고 나중에 유비에게로 가서 활약하였다.

마막(馬邈) : 촉한(蜀漢)의 장수. 등애(鄧艾)가 촉한을 치고자 검각(劍閣)의 험한 재를 넘었을 때 강유성(江油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태가 그른 것을 알고 아내 항복하여 향도관(嚮導官)이 되었다. 아내 이씨는 의를 내세워 이것을 말리다 남편이 듣지 않으니까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마량(馬良) 187 ∼ 223년 : 유비의 막하 모사(謀士). 본시 유표(劉表)의 수하였던 이적(伊籍)이 천거하였다. 누대 형주(荊州)에 살았는데, 5형제 중 눈썹 사이에 흰 터럭이 있는 이가 제일 출중하다 하여, 백미(白眉)라는 이름이 생기게 한 장본인이다. 양양 의성(襄陽 宜城) 사람으로 자는 계상(季常). 다른 네 형제도 모두 출중한 가운데, 마속(馬謖)은 그의 아우요, 자를 유상(幼常)이라 하였다. 제갈량과는 유달리 형제같이 친한 사이였으며, 관직은 종사(從事)로 동오(東吳)와 친선을 유지했고, 형주를 맡던 관우의 보좌관이 되었다. 후에 여몽의 계략으로 형주는 함몰되고, 다시 형주를 되찾으려는 유비를 따라나섰으나 결국 패했고, 그 어지러움속에서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마속(馬謖) 190 ∼ 228년 : 촉한(蜀漢)의 대장. 양양 의성(襄陽 宜城) 사람으로 자는 유상(幼常). 마씨 5형제 중의 한 사람으로 제갈량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마량(馬良)의 아우다. 관직은 참군(參軍). 유비를 따라 촉(蜀)에 들어가 각지의 요직을 역임했다. 유비는 임종이 '저자는 말이 실속보다 앞서니 중용하지 말라'(言過期失)고 하였던 것인데, 맹획(孟獲) 정벌 중에 칙사로 온 것을 만나 그의 식견을 듣고는 매사에 신임하고 부렸다. 제 1차로 위(魏)를 치러 출병할 때 사마의(司馬懿)를 거짓소문으로 한 때 물러나게 함. 228년 봄, 가정(街亭)의 요충(要衝)을 지키게 해서 위의 명장 장합과 대결했다. 이것은 촉의 중원(中原) 진출을 좌우하는 중요한 싸움이었으나, 제갈량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가 대패하게 된 죄로 군율에 의해 처형되었다. 당시 촉한으로서는 인재가 모자라 그만한 장수도 아쉬운 형편이었으나,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베니 39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래, 그의 심경을 동정하여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유명한 성어(成語)가 다 생겼다.

마연(馬延)·장개(張 ) : 조조(曹操)의 부하 장수. 본시 원소(袁紹)의 부하였는데 항복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종군하였다가, 패해 오는 조조를 맞이하여 위기를 벗어나게 하고는, 둘이 함께 오의 장수 감녕(甘寧)의 손에 걸려 죽었다.

마완(馬琓) : 마등(馬騰)의 인척 장수. 조조(曹操)와의 싸움에서 죽음.

마우(馬宇) : 후한의 중신. 시중(侍中) 벼슬로 있을 때 동탁(董卓)의 잔당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횡포를 일삼자, 동지들과 근왕병을 불러들이기로 하였는데, 서량(西 )의 군대가 도착하여 접전하는 중, 내응 된 것이 알려져 동지들과 함께 멸문을 당하였다.

마원의(馬元義) ? ∼ 184년 : 황건적(黃巾賊)의 수령. 장각(張角)의 부하. 장각의 거병직전에 수도에 들어가 궁정 안에 내응자를 확보했으나, 거사 직전 밀고자에 의해 사형을 당함.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마일제(馬日 ) : 후한의 중신. 자는 옹숙(翁叔). 태부(太傅) 벼슬에 있어, 동탁(董卓)이 죽은 뒤 채옹(蔡邕)이 저자에 버려진 그의 시체를 안고 곡하였다 하여 왕윤(王允)의 손에 죽게 되었을 때, 갖은 말로 구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이각(李 )이 여포(呂布)를 몰아내고 수도 장안(長安)에서 실권을 쥐고 있을 무렵, 원술(袁術) 휘하에 있던 손책(孫策)을 설득하여 회의교위(懷義校尉)에 임명했으나 원술을 회유하는 일에는 실해하고 굴욕적인 죽음을 당했다.

마준(馬遵) : 위(魏)의 천수군(天水郡) 태수. 제갈량의 제 1차 침공 때 성을 지켜 잘 싸웠으나, 지략이 뛰어난 강유(姜維)가 촉한(蜀漢)에 항복한 뒤로, 부지할 길이 없어 총지휘관 하후무(夏候楙)와 함께 오랑캐 땅을 의지해 달아났다.

마철(馬鐵)·마휴(馬休) : 서량태수(西凉太守) 마등(馬騰)의 두 아들.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조조의 태도가 돌변하매 용감히 항거하여 싸웠으나, 철(馬鐵)은 난전을 맞아 죽고 휴는 아비와 함께 잡혀서 죽었다. 동행하였던 종형 마대(馬岱)와 형 마초(馬超)만이 나중까지 남아 유비 밑에서 활약했다.

마초(馬超) 176 ∼222년 : 촉(蜀)의 장군. 서량태수(西凉太守) 마등(馬騰)의 큰아들. 무릉(武陵) 사람. 자는 맹기(孟起). 얼굴은 분을 바른 듯이 희고 늘씬한 키에 허리는 가늘고 어깨통이 넓어 '비단 마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무용은 절륜했으나 성질이 사납고 지모가 모자랐다. 아버지가 조조(曹操)에게 속아 패하여 죽자, 양주(楊州)에 근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기동력 있는 기마대(騎馬隊)를 소유하여 211년, 한수(韓遂)와 함께 장안을 뺏고 동관(潼關)을 떨구어 용명을 날렸다. 적벽대전에서 패해 서쪽으로 온 조조군과 동관(潼關)에서 싸움에서는 허저와는 백여 합을 싸워 승부 나지 않았으며 조조를 추격하여 붙잡을 뻔 도 하였으나 경륜이 모자란 때문에, 친삼촌같이 여겨오던 한수를 조조의 반간을 받고 의심하여 죽이려다, 이루지 못하고, 방덕(龐德)·마대(馬岱)만을 데리고 도망하여 농서( 西)의 임조(臨 )를 향해 갔다. 오랑캐 땅에서 힘을 길러 2년만에 다시 재기해 왔으나, 하후연(夏後淵)의 대군에게 패하여 또다시 방덕·마대만을 데리고 한중(漢中)으로 장로(張魯)를 의지해 갔다. 그리고 거기서 가맹관( 萌關)을 지키던 장비(?語?와 마주쳐 수백 싸워 또다시 용명을 떨쳤으며, 그를 아낀 제갈량이 뒤로 장로의 모사 양송(楊松)을 매수하여 난처한 입장에 세우고 이회(李恢)가 항복을 권하는 바람에 마침내 성도를 포위한 유비군에게 항복했다. 마초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용맹을 무서워하던 성도성내가 동요되어 10일도 되지 전에 성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때 형주(荊州)를 수비하고 있던 관우가 그가 어떤 인물인지 가르쳐 달라고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자 제갈량은 마초를 장비와 겨룰 만한 용장이라고 칭찬했다. 소위 오호대장(五虎大將)의 한 사람으로 극진히 대우받았으나 제갈량이 위(魏)를 치기에 앞서 서평관을 지키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위후(威侯)

마충(馬忠) : 동오(東吳) 손권의 막하 장수. 반장(潘璋)의 부장. 관우가 패하여 가는 길을 추격하여 말 째 걸어서 넘어뜨리고 묶은 공으로 그의 타던 적토마를 상으로 탔으나 말은 여러 날 굶은 끝에 죽어버렸다. 유비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노장 황충을 쏘아 맞혀 황충은 그로 인해 죽었다. 그러나 촉한의 군세가 호대한 것을 본 부사인(傅士仁)과 미방( 芳)이 그가 관우를 잡은 장본인인 때문에, 다시 옛 주인을 찾아갈 명목을 세우고자, 밤중에 자는 것을 목베어 가지고 유비 진으로 갔다.

마충(馬忠) : 촉(蜀)의 장수. 파서 낭중(巴西 낭중) 사람. 자는 덕신(德信). 관직은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남만에서 공명(孔明)을 따라 조운(趙雲)과 여러 차례 공을 세움.

마한(馬漢) : 위(魏)의 장군.

만욱(萬彧) : 동오(東吳)의 중신. 오주(吳主) 손휴(孫休)가 죽자, 오정후(吳程侯) 손호(孫皓)를 세워 황제로 삼고 육개(陸凱)와 함께 좌우 승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었다. 그러나 손호의 날로 횡포해지는 꼴을 보다 못하여, 바른말로 간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만정(萬政) : 위(魏)의 장수. 곽회(郭淮)의 부장으로 가정(街亭) 싸움에서 촉한(蜀漢)의 후퇴하는 군사를 추격하였는데, 조운(趙雲)과 맞닥뜨려 그의 화살이 투구 끈을 맞혀 끊는 바람에 놀라 골짜기에 굴러 떨어졌다. 조운은 그를 살려주며 위협하여 뒤를 따르지 못하게 하여 손 실없이 물러갈 수 있었다.

만총(萬寵) : 조조(曹操) 막하의 모사. 자는 백녕(伯寧). 산양 창읍(山陽 昌邑) 사람으로 유엽(劉曄)의 천거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 구변 좋게 달래어 서황(徐晃)을 끌어들이고, 계속 조조를 위하여 진력하던 중, 관우와의 양양성(襄陽城) 싸움에서 정세를 잘 파악하여 조인(曹仁)을 도와 승전으로 이끌었다. 여러 번 오군(吳軍)을 파했으며 외교에 능하여 여러 차례 중요한 사신으로 다니며 많은 공을 세워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렀고, 죽어 경후(景侯)의 시호를 받았다.

망아장(忙牙長)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대장. 절두대도(截頭大刀)를 잘 썼는데 협산곡에서 마대(馬岱)와 싸우다 그의 칼에 죽었다.

맹공위(孟公威) : 남양(南陽)의 숨은 인재. 여남(汝南) 사람으로 제갈량이나 최주평(崔州平)·석광원(石廣元)·서서(徐庶) 들과는 함께 공부한 친한 사이였는데, 난세에 나오기를 꺼려 그 몇몇이서 술과 글로 세월을 보냈다.

맹달(孟達) ? ∼ 228년 : 유비 수하의 장수. 자는 자경(子慶). 익주(益州)의 유장(劉璋)의 수하였으나 주인이 암약하여 부지 못할 것을 한탄하고, 장송(張松)·법정(法正)과 함께 외부에서 영웅을 불러들일 것을 획책하였다. 법정과 같이 우부 풍미현(右扶 風 縣) 사람. 유봉(劉封), 이엄(李嚴)과 사이가 좋았다. 유비에게 협력하여 의도태수(宜都太守)가 되어 곽준(藿峻)을 천거하고 가맹관( 萌關)에서 장로(張魯)의 침입을 막았다.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자 상용관(上庸關)의 수비를 맡았는데 관우가 형주에서 패해 궁지에 들었을 때, 구해 주지 않은 죄를 추궁 당하게 되자 조조군에 항복하여 신성태수(新城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랬다가 뒤에, 사마의(司馬懿)가 동병 하여 촉한(蜀漢)을 칠 때, 내응 하여 옛 죄를 씻으려 하였으나 도리어 사마의에게 간파되고 동지로 믿었던 신탐(申眈)의 손에 죽었다.

맹우(孟優)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아우. 줄곧 형과 행동을 같이 하며 제갈량의 토벌군과 대항하고 꾀로 속이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붙잡혔다간 놓이곤 하던 끝에 일곱 번 만에는 완전히 심복하게 되었다. 일신의 용맹이 있었으나 머리가 모자람.

맹절(孟節)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형. 만안계(萬安溪)에 숨어살던 만안 은자(隱者). 제갈량의 군대가 독룡동(禿龍洞)에서 독천(毒泉)을 마시고 병신들이 되었을 때, 산신의 지시로 그를 찾아가 약을 얻어먹고 모두 나았다. 왕을 시켜주겠다는 말도, 선사하는 금품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맹탄(孟坦) : 조조(曹操) 휘하의 장수. 관우가 조조의 앞을 떠나 유비를 찾아 떠날 때, 낙양관(洛陽關)을 지키던 한복(韓福)의 아장(牙將). 역시 관우의 손에 죽었다. 소위 오관찬장(五關參將)의 제2인자.

맹획(孟獲) : 남만(南蠻)의 왕. 건흥(建興) 3년,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익주(益州)에 침입하여, 군의 태수4들도 많이 그에 협력하였다. 촉한(蜀漢)의 전권을 맡아 있던 제갈량은, 먼저 역내(域內)의 주군(州郡)을 평정하고 그를 토벌하고자 남만 땅 깊숙이 원정하였다. 그리하여 일곱 범 잡았다 일곱 번 놓아준 은의(恩義)에 감복하여 진심으로 항복하게 되었고(七縱七擒 : 칠종칠금), 제갈량은 그로 하여금 남만의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모개(毛 ) : 조조(曹操) 막하의 모사(謀士). 진류 평구(陳留 平丘) 사람으로 자는 효선(孝先). 조조가 연주목( 州牧)으로 있을 때 순찰관(巡察官)으로 초빙되었다. 이때 천자(天子)를 받들어 불신(不臣)을 다스리고, 농경을 일으켜 군량을 비축하라는 등 진언을 하여 조조의 천하평정계획에 중요한 시사를 주었다. 조조가 전권을 잡은 뒤 동조연(東曹椽)이 되어 내정을 도왔으며 적벽대전에서는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이 죽은 뒤 별로 경험도 없이 우금(于禁)과 함께 수군도독을 맡았다가 크게 패하였다. 조정에 있어 근무에 매우 충실하였으나, 참소를 입어 쫓겨나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모황후(毛皇后) : 위주(魏主) 조예(曹叡)의 후(后). 하내(河內) 사람으로 자색(姿色)이 있어 평원왕이 있을 당시부터 총애하였는데 높여서 황후로 삼았다. 뒤에 곽씨(郭氏)를 사랑하게 되어, 하찮은 일로 주위 사람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조예의 무궤도하기가 이와 같았건만 주위에서는 아무도 간하는 이가 없었다.

목록대왕(木鹿大王)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반란에 협력한 팔납동(八納洞)의 동주. 법술로 코끼리를 타고 갖은 맹수를 부하처럼 부렸는데, 제갈량이 미리 준비한 인조 맹수에게 쫓기어 짓밟힌 끝에 난군중에서 죽었다.

목순(穆順) : 복황후(伏皇后)의 심복 환관. 조조의 세력이 커져 황제를 능멸하기에 이르자, 복황후의 친서를 받들어 복완(伏完)의 사이를 왕래하였으나, 상투 속에 감춘 밀서가 탄로나 복씨네 와 함께 일가족 몰살을 당하였다.

묘택(苗澤) : 조조 밑에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있던 황규(黃奎)의 처남. 매부인 황규의 첩과 정을 통하여 언제나 드러내 놓고 살아 볼까 하던 중. 황규가 마등(馬騰)과 뜻이 통해 조조를 해치려는 기미를 알아내 밀고하였다. 조조는 마등과 황규의 일족을 죽인 뒤, '여자 하나가 탐난다고 누이의 집안을 멸명시킨 나쁜 놈'이라고 이 역시 죽여 버렸다.

무안국(武安國) : 공융(孔融)의 장수. 근왕병(勤王兵) 때 여포(呂布)에게 도전하다가 팔이 잘림.

묵돌 : 흉노(匈奴)의 추장(酋長). 원소(袁紹)의 아들 원희(袁熙)·원상(袁尙)의 패한 군사를 도와 조조를 반격해 나오다, 백랑산에서 조조의 대군과 마주쳤을 때 장요(張遼)의 칼에 죽고 나머지 20만이나 되는 군사는 모두 항복하였다.

문빙(文聘) : 조조(曹操) 막하의 장수. 남양 완성(南陽 宛城) 사람으로 자는 중업(仲業). 본시 유표(劉表)의 장수로 유비가 신야(新野)에서 조조에게 패하고 양양(襄陽)을 의지하려 하였을 때, 이를 방해하였다. 유표의 대를 이은 유종(劉琮)이 결국 조조에게 항복하여 버리자 뜻을 잃고 강개하였으나, 조조의 부름을 받아 강하(江夏) 태수가 되었다. 적벽대전에서도 싸우다 부상하였고, 동작대(銅雀臺) 잔치에서는 활재주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강하(江夏)를 지키기 수십 년에 치적이 매우 올랐으며 벼슬이 후장군(後將軍)에 이르렀고 뒤에 병으로 죽어 장후(壯侯)의 시호를 받았다..

문숙(文叔)의 처 : 권세를 누리다 패하여 죽은 조상(曹爽)의 종제의 아네. 하후령(夏候令)의 딸로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아비가 재가를 시키려 하자 귀를 잘랐고, 조상이 패한 뒤 또 시집 보낼 의논이 나오자, 이번엔 코를 베어 절개 굳은 것을 나타내었다. 이를 들은 사마의(司馬懿)는 그의 정절을 찬양하여 양자를 주선하여 조씨의 대를 잇게 하였다.

문앙(文鴦) : 위(魏)의 장수 문흠(文欽)의 아들. 사마사(司馬師)의 폐립을 감행한 죄를 물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아비를 도왔다. 나이는 아직 18세였는데 창과 동편(銅鞭)을 잘 써 효용이 절륜하였다. 첫 번 출전에 아비와의 연락이 끊겨 단기로 여러 차례 적의 추격을 물리치어 위병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뒤에 패군 하여 항복하였다가 나중에 진(晋)에서 장군 벼슬을 하였다.

문추(文醜) ? ∼ 200년 : 원소(袁紹)의 상장. 백마(白馬)의 전투에서 조조의 장수 장요(張遼)·서황(徐晃)을 상대로 하여 싸워 장요를 쏘아 말에서 떨어지게까지 하였으나, 조조에게 얹혀 있던 관우에게 죽었다. 본시 안량(顔良)과 함께 원소의 자랑하던 장수였는데, 정사(正史)에는 관우에게 죽은 것으로는 안량만 나와 있고, 그에 대해선 써있지 않다.

문흠(文欽) : 위(魏)의 장수. 초군(焦郡) 사람. 자는 중약(中若). 사마사(司馬師)가 폐립을 감행하였을 때 양주자사(楊州刺使)로 있었는데, 조정을 무시한 행동을 분히 여겨, 진동장군(鎭東將軍) 관구검(貫丘儉)과 상의하여 군대를 움직여 그를 쳤다. 그러나 사마사가 친히 대군을 거느려 항전해 오매, 중간에 윤대목(尹大目)의 조언도 있었건만 계속 대진하지 못하고 군대를 물렸다가, 제갈탄(諸葛誕)에게 수춘성(壽春城)을 빼앗기고는, 동오(東吳)로 손준(孫峻)을 의지해 달아났다. 뒤에 제갈량이 사마씨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동오의 군사를 이끌고 나와 그를 도왔는데, 수춘성에서 그가 패하였을 때 오해를 사서 죽음을 당하고, 아들 문앙(文鴦)과 문호(文虎)는 수십 인을 죽이고 탈출하여 위채에 가 항복하였다. 관직은 전장군(前將軍)이며 유주목(幽州牧)에 초후(焦侯)에 책봉됨.

미방( 芳) : 미축( 竺)의 아우로 역시 유비의 처남이다. 관우 막하에서 남군태수(南郡太守)가 되었으나, 양양(襄陽) 공격을 앞두고 실화한 죄로 매를 맞고 강릉(江陵)의 수비로 좌천되었다. 형주(荊州)가 함락되자 부사인(傅士仁)과 함께 동오(東吳) 손권에게 항복하였다가, 유비가 복수의 군대를 일으켜 연전연승해 나오자, 관우 잡은 장본인인 마충(馬忠)의 목을 베어 가지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으나, 관우를 구하지 않은 죄로, 세자의 외숙이건만 죽음을 당하였다.

미부인( 夫人) : 유비의 부인. 유비에게는 감부인(甘夫人)과 함께 두 부인이 있었는데, 미부인에게서만 한 아들을 두어 아명을 아두(阿斗), 이름을 선(禪)이라 하며, 유비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오르므로, 흔히 후주(後主)라 부른다. 당양파(當陽坡) 싸움에서 난군중에 부상을 당하고 조운을 만나 아두의 보호를 당부한 뒤, 자신은 헌 우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미축( 竺) : 촉(蜀)의 중신(重臣). 동해 구현(東海  縣) 사람으로 자는 자중(子仲). 서주(徐州)의 명문 출신으로 수많은 자산에 노비가 1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서주태수(徐州太守) 도겸의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있다가 조조의 침공을 받자, 그를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공융(孔融)의 원병을 청하고, 도겸의 유탁으로 유비를 지성껏 도왔다. 195년, 유비가 여포(呂布)에게 하비(下 )를 빼앗기고 유랑하게 되었을 때도 그가 자금을 대주고 누이동생을 그에게 출가시켜 두 번째 부인이 되니 유비에게는 처남이다. 201년, 유비의 형주(荊州) 망명 때 사전 준비를 위해 유표(劉表)에게 사신으로 갔었다. 아우 미방( 芳)이 배반하여 오에 항복한 것을 고민하다 병들어 죽었다. 벼슬은 안한장군(安漢將軍)

민공(閔貢) : 하남(河南) 중부연리(中部椽吏). 십상시(十常侍) 난리에 임금을 받들어 달아나는 내시 단규(段珪)를 목베고, 최의(崔毅)의 집에서 황제와 진류왕(陳留王)을 찾아내어 무사히 환궁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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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봉(潘鳳) : 한복(韓馥)의 장수. 근왕병(勤王兵) 때 출정하였으나 화웅(華雄)에게 죽음.

반장(潘璋) : 동오(東吳)의 장군(將軍). 동군(東郡) 사람으로 자는 문규(文珪). 벼슬은 북평장군(北平將軍)에 양양태수(襄陽太守). 관우가 형주(荊州)를 뺏기고 쫓겼을 때, 그를 추격하여 궁지에 몰아넣고, 말 째 걸어 넘어뜨려 사로잡았다. 손권은 그의 공을 찬양하여 관우가 쓰던 청룡도를 상으로 주었고, 등극 후 우장군(右將軍)에 책봉했다.

반준(潘濬) : 촉(蜀)의 장수. 무릉(武陵) 사람으로 치중(治中) 직에 있어 관우의 명을 받아 그의 양양성(襄陽城) 공략중 형주를 지키고 있었으나 줏대가 없어 왕보(王甫)는 그를 몹시 염려하여 조누(趙累)로 바꿀 것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은 결과 결국 여몽(呂蒙)의 기습으로 형주가 힘없이 함락되자 동오(東吳)에 항복하였고, 오는 그에게 형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방덕(龐德) ? ~ 219 : 조조(曹操)의 수하 장군. 본시 마초(馬超)의 부하였다가 뒤에 조조 수하에 든 용장. 남안군 항도(南安郡 恒道) 사람으로 자는 영명(令明). 용맹이 뛰어나 위교(渭橋) 싸움에서 조조를 위기에 몰아넣은 적도 있었고, 마초가 패하여 장로(張魯)에게 의지했을 때도 행동을 함께 했다. 마침 병이 들어 그가 유비에게 항복할 때는 따로 떨어져 남아 있다가, 조조의 한중(漢中) 침공 때 또다시 용감하게 항전하였다. 조조는 그의 용맹을 아껴 장로의 모사 양수(楊修)를 뇌물로 매수하여 반간계(反間計)로 고립시킨 뒤 꾀로 사로잡았다. 조조가 관우와 형주 양양성을 두고 싸울 때, 자원하여 관(棺)을 짜 지워 가지고 나가 싸우다, 주창(周倉)에게 사로잡혔으나 굽히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방서(龐舒) : 여포(呂布)의 친한 벗. 장안(長安)에 살며 초선(貂蟬)을 비밀히 여포에게로 보내준 것이 탄로나, 이각(李 )·곽사(郭 )의 무리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방유(龐杻) : 촉(蜀)의 관료. 유장(劉璋)의 부하였으나 유비(劉備)에게 투항. 방덕(龐德)의 형이지만 동생이 그의 부인을 죽여서 원수관계가 됨. 서천에서 관리를 지냄.

방통(龐統) 178 ∼ 213년 : 유비 막하의 부군사(副軍師). 본시 사마휘(司馬徽)가 남주지사(南州之士)의 첫째라 불렀고, 그가 말한 와룡(臥龍)·봉추(鳳雛) 중의 하나만 얻어도 왕업을 이루리라고 하던 봉추가 곧 그요, 와룡은 물론 제갈량을 말한다.. 양양(襄陽) 사람으로 자는 사원(士元). 전란을 피하여 강동(江東)에 있을 때, 조조의 남침을 맞아서 적벽의 화공(火攻)을 앞두고, 연환계(連環計)를 성공시키고자 조조에게서 염탐차로 파견된 장간(蔣幹)을 앞세우고 건너가, 조조를 설복(設伏)하여 배와 배를 모두 쇠사슬로 묶어 놓게 만들었다. 하건만, 그의 생김새가 들창코에 얼굴은 검고 수염은 적어 도무지 의젓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손권은 그를 중용(重用)할 줄 몰랐다. 노숙(魯肅)이 그를 촉한(蜀漢)에 천거하였을 때도, 마침 제갈량이 지방 순찰 중이었고 유비 역시 그의 풍채를 보고는 뇌양현( 陽縣)의 작은 원 한 자리를 주었을 뿐이었다. 부임하자 일은 않고 술에 묻혀 지냈는데 순찰차로 나온 장비가 대해 보니 천하기재(天下奇才)라 비로소 중용 되었다. 유비의 지혜주머니로서 법정(法正) 등과 함께 촉(蜀) 공략을 적극 추진해서 서천(西川) 공략에는 군사(軍師)로서 지휘하였는데, 아깝게도 이의(李薏)의 예언대로 성도진격 동중 낙성(洛城)을 치다가 낙봉파(落鳳坡)에서 장임(張任)의 난전(亂箭)에 맞아 죽으니 이때 나이 겨우 36세였다. 용모와 재능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음을 증명한 인물. 시호는 정후(靖侯).

방회(龐會) : 위(魏)의 장수. 관우를 치다가 그에게 붙잡혀 죽은 용장 방덕(龐德)의 아들. 아비가 출전할 때는 아직 여섯 살이었는데, 뒤에 과연 그의 유언대로 등애(鄧艾)를 따라 촉한(蜀漢)을 쳐 멸하고, 아비의 원수 관우의 후손들을 죽였다.

방희(龐羲) : 촉(蜀)의 문사(文士). 내정에 공이 컸음.

배서(裴緖) : 위(魏)의 장수. 본 당자는 별사람이 아니었으나, 제갈량이 제1차로 위를 정벌하러 출병하였을 때, 심복 장수를 보내 위의 장수 배서라고 사칭(詐稱)해서 유인해 내어 여러 성을 빼앗았다. 다만 천수태수(天水太守) 마준(馬遵)만은 그의 부장 강유(姜維)가 이를 간파하여 속지 않았다.

배원소(裴元紹) : 본시 황건적(黃巾賊) 출신의 산적. 관우가 오관참장(五關參將)하고 유비의 가족을 보호해 나올 대 호의를 베풀었으나, 조운(趙雲)이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단신(單身)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 싸우다 산채를 빼앗기고 죽었다.

번능(樊能) : 유요(劉繇)의 부하장수. 손책(孫策)과의 싸움에서 손책의 호령소리에 놀라 죽음.

번주(樊 ) : 동탁(董卓)의 수하장수. 이각(李 ) 등과 행동을 같이하여, 동태수의 원수를 갚는다고 여포(呂布)를 쫓고 장안(長安)에 들어와, 한 때 황제를 시살(弑殺)하려 서두르다 멈췄다. 서량(西 )의 근왕병(勤王兵)과 싸워 이를 추격할 때 인정을 써서 한수(韓遂)를 몹시 쫓지 않은 것이 탄로나 이각의 무리에게 죽었다.

범강(范彊)·장달(張達) : 장비 수하의 장수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출병하였을 때, 장비가 지나치게 독촉하는 것을 간(諫)하다가 호되게 매를 맞고는 그날 밤 장비의 자는 틈을 습격하여 목을 베어 가지고 오나라에 항복하러 갔다. 뒤에 유비의 침공을 배기지 못한 손권은 그들을 잡아 촉진(蜀陳)에 보내 유비의 공격을 늦추려 하였다. 촉한에 실려온 뒤 장비의 아들 장포(張苞)는 그들을 죽여 아비의 영혼을 제사지냈다.

법정(法正) : 유비의 모사(謀士). 익주(益州) 유장(劉璋)의 수하였으나 주인이 암약하여 섬길 만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장송(張松)·맹달(孟達)과 함께 외부에서 영웅을 불러들일 것을 획책하였다. 자는 효직(孝直). 우부 풍미현(右扶風  縣) 사람으로 명사로 알려진 법진(法眞)의 아들. 유비의 서촉 진공을 위하여 극력 진력하였기 때문에 성사된 뒤 촉군태수(蜀郡太守)가 되었고 성질이 각박하여 그를 논란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의 공을 생각하여 제갈량도 크게 탄 하지 않았고 유비의 마음을 잘 달래는 인물로, 유비가 동오(東吳)를 치다 패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익후(翼侯)

변양(邊讓) : 구강(九江)의 태수. 서주(徐州) 태수 도겸(陶謙)이 억울하게 조조의 아비를 죽였다는 혐의로 토벌을 당하게 되자 이를 구하려 동병 하였다.

변희(卞喜) :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영솔하고 조조 앞을 떠날 때 기수관(沂水關)을 지키던 장수. 유성추(流星追)의 명수로 관우를 진국사(鎭國寺)로 끌어들여 죽이려다가 탄로나 그의 손에 죽었다. 소위 오관참장(五關參將)의 제3인자.

보정(普淨) : 관우의 오관참장(五關參將) 때 기수관(沂水關) 가까이 진국사(鎭國寺)에 있던 승려. 관우와는 동향 출신으로, 변희(卞喜)가 그를 해치려는 계획을 귀띔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하여 주었다. 뒤에 관우가 죽어 그 영혼이 형문주 당양현(荊門州 當陽縣) 옥천산(玉泉山)에 나타나 '나의 목을 내라'고 울부짖었을 때, 마침 거기 있다가 만나, 그의 영혼을 제도(濟度)하였다.

보질(步質) : 손권 막하의 문사(文士). 임회 회음(臨淮 淮陰) 사람으로 자는 자산(子山). 손권(孫權)에게 많은 조언을 했으며, 제갈량이 처음 동오(東吳)에 갔을 때, 설전(舌戰)을 벌인 인물중의 하나.

복양흥( 陽興) : 동오(東吳)의 구신(舊臣). 손휴(孫休)가 세상을 떠날 때 승상(丞相)으로 불려 들어가 태자 손령(孫靈)의 보호를 위탁받았다. 그러나 손호(孫皓)가 대신 즉위하였는데, 그래도 충성을 다하였으나, 그가 날로 주색에 파묻혀 난폭해지는 것을 여러 번 간(諫)하다가 일족과 함께 몰살을 당하였다.

복완(伏完) : 복황후(伏皇后)의 친정 아버지. 조조의 세력이 비대해져 황제를 업신여기는 것이 분해, 복황후가 보낸 친서를 받들고 조조가 외정(外征) 나간 사이에 거사하려다가, 공교롭게 일이 탄로나 일가족이 몰살을 당하였다.

복황후(伏皇后) : 후한의 마지막인 헌제(獻帝)의 황후. 조조의 오만한 태도에 격분하여 친정 아버지 복완(伏完)과 짜고 그를 없애려다가 일이 탄로나 죽음을 당하고, 그의 소생인 두 황자도 조조 손에 독살을 당하였다. 이름은 수(壽).

봉기(逢起) : 원소(袁紹) 막하의 모사(謀士). 자는 원도(元圖). 지략은 있었으나 속이 좁고 참소와 시기심이 심해서 전풍(田豊)을 죽게도 했던 인물. 원소가 관도(官渡)에서 대패하여 돌아갔을 때, 심배(審配)와 함께 그의 셋째 아들 원상(袁尙)을 도왔다. 원담(袁潭)이 조조에게 패하였건만 원상이 돕기를 꺼려하자, 사신으로 가 있다가 그의 손에 죽었다.

부간(傅幹) : 조조(曹操) 수하의 모사(謀士). 자는 언재(彦材). 건안(建安) 19년, 조조가 다시 출병하여 동오(東吳)의 손권을 치려 할 때, 글을 올려 학교를 설치하고 명사를 초청하여 국력을 기르기를 건의하여, 조조는 그대로 실시하고 민력(民力)을 기르기에 힘썼다.

부동(傅 ) : 촉한 유비 막하의 대장.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동오(東吳)에 출병하였을 때 줄곧 활약했으며, 육손(陸遜)의 화공(火攻)으로 유비가 위경에 빠졌을 때, 후비를 맡아서 오의 장수와 맞붙어 백여 합을 싸웠으나 포위망을 뚫을 길 없어 많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부사인(傅士仁) : 촉(蜀)의 장수. 형주에서 관우의 막하에 있었는데 양양성(襄陽城)을 칠 때 선봉을 맡았건만, 출전에 앞서 실화(失火)한 죄로 매를 맞고 공안(公安)의 수비로 좌천되었다. 형주가 함락되자 동오(東吳) 손권에게 항복하여 관우의 패망을 빠르게 하였다. 유비가 복수의 군대를 일으켜 쳐오자, 미방( 芳)과 함께 마충(馬忠)의 목을 베어 가지고 그에게로 돌아갔으나 관우를 구하지 않은 죄로 죽음을 당하였다.

부손(傅巽) : 유표(劉表)의 막하 장수. 동조연(東曹椽)으로 있을 때, 유표가 죽고 유종(劉琮)이 서자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유리하겠다고 주장, 항복한 뒤는 관내후(關內侯)의 큼직한 감투를 썼다.

부영(傅瓔) : 오(吳)의 장수. 손익의 아내 서씨(徐氏)가 남편의 원수를 갚을 때 도운 장수.

부첨(傅僉) : 촉한(蜀漢)의 장수. 제갈량이 죽은 뒤 강유(姜維)의 추천으로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강유가 특별히 위(魏)를 대비하여 조련시킨 무장. 무용이 대단하여 위(魏)의 양초를 쌓아 둔 장성을 칠 때는, 사마망(司馬望)의 수하 왕진(王眞)·이붕(李鵬)의 두 장수를 삽시간에 사로잡고 철간(鐵簡)으로 쳐죽여 용맹을 떨치었다. 종회(鍾會)가 위병을 끌고 침범했을 때 양평관(陽平關)을 지키어 잘 싸웠으나 같이 지키던 장수 장서(張 )가 적에게 항복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위군(魏軍) 속에 뛰어 들어, '살아서도 촉나라 신하요, 죽어서도 촉나라 귀신이 되련다'고 외치고 싸우다 세궁역진(勢窮力盡)하여 스스로 목을 쳐 죽었다.

비관(費觀) : 촉(蜀)의 무장. 원래 유장(劉璋)의 처남이자 그의 막하 장수. 유비의 침공을 당하여 면죽관(綿竹關)의 수비를 맡아 이엄(李嚴)을 천거하여 함께 임무에 나아갔다. 그러나 패하여 엄안(嚴顔)의 권유로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그 뒤 눌러 촉한(蜀漢)의 중앙 무대에서 요직(要職)을 역임하였다.

비시(費詩) : 촉한(蜀漢)의 문신(文臣). 건안 안정(建安 安定) 사람으로 자는 공거(公擧). 한중왕(漢中王) 유비의 명을 받아 형주(荊州)로 관우를 찾아가 오호장군(五虎將軍)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잘 타일러 순순하게 양양성(襄陽城)을 치도록 하였다.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으며, 강직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비연(費衍) : 공손연(公孫淵)의 장수로 그의 반란 때 대장군에 원수가 되었으나 하후패(夏候覇)의 칼에 죽음.

비요(費耀) : 위(魏)의 장수. 조진(曹眞)의 선봉이 되어 제갈량의 군대와 싸웠을 때 강유(姜維)의 거짓 항복을 의심하였으나, 조진의 명령으로 진격하다가 제갈량의 유인 작전에 빠져 적진(敵陣) 깊숙이 포위 당한 끝에 스스로 목베어 죽었다.

비위(費褘) ? ∼ 253년 : 촉(蜀)의 중신. 자는 문위(文褘). 강하(江夏) 맹 사람. 제갈량은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 그의 출사표(出師表)에서 내정을 맞길 사람으로 그와 곽유지(郭攸之)·동윤(董允) 등을 지적해 시중(侍仲)일을 맡아봄. 그는 남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서류를 읽고 또 일단 읽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제갈량이 본 대로 그의 능력은 내정 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승상이 되어 수성(守成)의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강경파인 강유(姜維)를 억제하며 촉을 잘 유지했다. 그러나 253년, 연회석상에서 자객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여러 차례 오(吳)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움.

[사]

사마가(沙摩柯) : 유비(劉備)를 도와 함께 동오를 친 남만왕(南蠻王). 철질려골타(鐵 藜骨朶)라는 무기를 썼는데, 이것을 삐죽삐죽 가시가 사방에 돋쳐 있는 쇠몽둥이 종류였던 것 같다. 기괴한 용모에 무술이 뛰어나 첫 번 전투에서 동오의 명장 감녕(甘寧)을 쏘아 죽였으나, 육손의 반격으로 패주하는 도중, 오장(吳將) 주태(周泰)와 마주쳐 20여 합을 싸운 끝에 그의 손에 죽었다.

사마랑(司馬朗) : 위(魏)의 관료. 사마의(司馬懿)의 형. 주부(主簿)를 지냈고 정치에 능함.

사마망(司馬望) : 진(晋)의 장수. 사마소(司馬昭)의 집안 형. 장성을 수비하다가 강유(姜維)의 포위를 받았으나, 등애(鄧艾) 부자의 구원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젊어서 최주평(崔州平)·석광원(石廣元)과 교우 하여 진법을 익혔던 때문에, 등애가 강유와 진법을 겨루다가 포위에 빠졌을 때, 깨치고 그를 구해 냈다.

사마부(司馬孚) : 사마의(司馬懿)의 둘째 아우. 자는 숙달(叔達). 상서령(尙書令)으로 있으면서 형을 위해 조상(曹爽)을 치는 표문을 닦았으나, 황제를 폐립하는 모의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뒤에 사마염(司馬炎)이 나라를 빼앗아 진(晋)을 세우고 안평왕(安平王)으로 봉했으나 받지 않고 위(魏)의 구신으로서 몸을 바쳤다.

사마사(司馬師) : 위(魏)의 승상(丞相). 사마의(司馬懿)의 장자로 자는 자원(子元). 얼굴이 둥글고 키가 크며 입은 모나고 입술이 두터웠다 왼쪽 눈 밑에 검은 혹이 도졌는데 그 위에 털이 숭숭 하게 나 있었다. 성질이 침착하고 병서에 통효하여 아비의 대를 이어 위(魏)의 정권을 잡아, 먼저는 강유(姜維)와 국산(麴山)에서 싸웠고, 동오(東吳)를 원정하였다가 혹을 짼 자리가 터져 진중에서 죽었다. 사마염(司馬炎)이 나라를 뺏은 뒤 경제(景帝)로 시호하였다.

사마소(司馬昭) : 사마의(司馬懿)의 둘째 아들. 자는 자상(子尙). 권모에 뛰어났으며 간흉하고 오만하기가 그 부형들보다 더 하였다. 군사 지위에도 역량이 있어, 형 사마사가 죽은 뒤 대장군이 되어 국정을 손아귀에 넣었다. 진왕(晋王)이 되어 천자의 예악을 누렸는데, 담을 앓아 죽었다. 사마염(司馬炎)이 진(晋)의 황제가 된 후 문제(文帝)로 추존되었다.

사마염(司馬炎) : 진(晋)의 초대 황제. 사마소(司馬昭)의 장자요, 사마의(司馬懿)에게는 손자. 자는 안세(安世). 생김새가 괴상하여 양팔이 무릎아래 닿았고, 사람됨이 총명하였다. 265년, 사마소의 죽음과 함께 진왕(晋王)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보다 앞서 사마씨(司馬氏)는 이미 3대에 걸쳐 위(魏) 왕조에서 확고한 기반을 쌓고 있었는데, 사마염은 그 기세를 몰아 위의 황제 조환(曹奐)을 강요하여 황제위를 물려받고 진 왕조를 일으켰다. 사마염의 과제는 아버지 때 이미 촉(蜀)을 평정했기 때문에 남은 오(吳)를 멸하여 천하통일을 이루는 일이었다. 그는 즉위 후 스스로 검약에 힘쓰는 한편 일족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병력을 배치하는 등 내부결속을 도모했다. 267년, 드디어 중신인 양호(羊祜)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형주(荊州)의 오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어서 왕준(王濬)에게는 장강(長江) 상류의 익주(益州)에서 수군을 정비하게 했다. 그러나 오나라 명장인 육항(陸抗)이 장강 일대에서 방어에 힘써 두 나라 군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 대치는 10년이나 계속 되었다. 그러나 279년 드디어 수륙 20만의 대군이 일제히 남하하여 이듬해에 결국은 오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사마염이 황제로 제위한 것은 전후 24년이었다. 치세의 전반기에는 검약을 주로 하고 내치에 주력했으나, 오를 멸망시킨 뒤에는 긴장이 풀려 벌써부터 왕조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위(在位) 26년. 시(諡) 무제(武帝).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 하였다.

사마의(司馬懿) : 하남성 온현(河南城 溫縣) 사람. 자는 중달(仲達). 매의 눈초리에 이리와 같이 돌아보아 그 생김부터가 범상하지 아니하였다. 조조 밑에서 승상부 주부(丞相府 主簿)로 있으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때때로 좋은 의견을 드렸다. 제갈량이 기산(祁山)을 나갈 때도 그를 꺼려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조정에서 멀리 보냈었는데, 뒤에 복귀하자 과연 좋은 적수로서 대전하였다. 호로곡(葫蘆谷)에서는 화공을 받아 삼부자가 함께 꼭 죽게 된 것을 갑자기 비가 내려서 살아났으니, 이 또한 천운이라고나 할까? 오장원(五丈原) 전투에서는 천문을 보아 지연작전으로 제갈량이 죽기를 기다렸고, 공손연(公孫淵)을 쳤을 때도 침착하게 적이 동요하기를 기다렸으니 그의 담략이 이와 같았다. 그 밖에 남방의 오(吳)나라에 대처하여 회하(淮河) 유역에 광대한 군둔전(軍屯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한 일도 큰 업적이다. 위주(魏主) 조예(曹叡)가 죽은 뒤 조방(曹芳)이 서고, 조상(曹爽)이 병권을 쥐게 되자 병을 핑계하여 그의 눈을 속이고 갑자기 거사하여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었다. 승상이 되어 구석(九錫)을 가하였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뒤에 사마염(司馬炎)이 나라를 뺏은 뒤 선제(先帝)라 시호하였다.

사마휘(司馬徽) : 양양(襄陽) 사람. 유비가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신야(新野)에 있는 동안 만난 은사(隱士). 자를 덕조(德操)라 하고 흔히들 수경선생(水鏡先生)이라 불렀다. 그와의 대화에서 와룡(臥龍)·봉추(鳳雛) 중 하나만 얻어도 왕업을 이루리라는 수수께끼를 던져 주었다. 방통(龐統), 방덕공(龐德公), 서서(徐庶), 제갈량(諸葛亮)등과 관계가 깊은 인물.

사적(史蹟) : 오(吳)의 장수.

사정(謝旌) : 손권의 막하 장수.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 출병하였을 때, 선봉 손환(孫桓)의 부장으로 출전했다.

사찬(師纂) : 위(魏)의 장수. 사마망(司馬望)이 촉한(蜀漢)을 칠 때 남아서 기산을 지켰었는데, 부첨(傅僉)의 공격을 받아 거의 위태로웠을 때 등애(鄧艾)가 나타나 위기를 모면하였다.

사환(史渙) : 조조(曹操)의 막하인 서황(徐晃)의 수하 장수. 관도(官渡)의 싸움에서 적의 간첩을 잡아 그 정보로 적의 식량 운반을 기습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관도에서 패한 원소(袁紹)가 대거하여 창정(倉亭)으로 반격해 나왔을 때, 선봉으로 싸우다가 원소의 아들 원상(袁尙)이 쏜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

상랑(尙郞) : 촉(蜀)의 문사(文士). 유비(劉備) 밑에서 관료를 지냄.

상홍(尙弘) : 위(魏)의 문사(文士).

상총(尙寵) : 촉(蜀)의 장군. 공명(孔明)이 중원을 정벌할 때 촉의 군사(軍事)를 맡아봄.

서구(徐 ) : 원술(袁術)이 피를 토하고 죽은 뒤, 파락호(破落戶)들을 동원하여 원술의 종제 원윤(袁胤)과 그의 가족을 몰살하고, 옥새(玉璽)를 빼앗아 가지고 허도(許都)로가 조조에게 바쳤다. 이 바람에 고릉태수(高陵太守)라는 큼직한 감투를 하나 얻어 썼다.

서서(徐庶) :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고 유표(劉表)에게 있을 때 만난 인재. 영천(潁川) 사람으로 자는 원직(元直). 가난하게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검술을 익혔다. 의협심이 강해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고 형리에게 체포되었으나, 친구의 구출로 도망쳤다. 그 후 느끼는 바가 있어 이름을 선복(禪福)으로 바꾸고 무예대신 학문에 힘썼다. 하남(河南)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형주(刑誅)로 난을 피했다가 거기서 제갈량을 알게 되었다. 유비와는 단번에 서로 의지가 통하여 그를 위하여 공을 세웠다. 조조가 그의 어머니를 감금하고 거짓 서면으로 유인하는 통에 유비에게 공명(孔明)을 강력히 추천하고 조조에게로 갔으나 어머니는 자식의 무모함을 꾸짖고 자살하였다. 조조는 그에게 과분한 벼슬을 주어 우대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방통(龐統)이 와서 연환계로 배를 서로 묶을 것을 권했을 때는, 그들의 화공 계획을 간파하고 방통이 꾀를 빌어 농서( 西) 지방이 술렁거린다는 유언을 퍼뜨리고, 스스로 그곳의 수비를 자원하여 떠나 희생을 모면하였다. 어머니의 죽은 것을 생각하여, 그 뒤에도 한 가지 꾀도 바치지 않고 아까운 재주를 썩혔다.

서성(徐盛) : 손권 막하의 용장. 낭야(郎倻) 사람으로 자는 문향(文嚮). 제갈량이 남병산(南屛山)에서 동남풍을 빌고 난 뒤, 정봉(丁奉)과 함께 뒤를 쫓았다. 하여 적벽가에 이름이 올라 귀에 익은 이름이다. 용맹이 뛰어났고 특히 수전에 능하였다. 손권을 위해 누차 큰공을 세웠으며 군기가 엄해 조비(曹丕)의 남침을 저항하였을 때는 손권의 조카인 손소(孫韶)까지도 죽이려고 하였다. 강중에 가루(假樓)를 만들고 배를 정렬하여 하룻밤 사이의 이변에 눈이 둥그래진 조비군의 용배를 화공(火攻)으로 격파시킨 것도 이때 일이다. 벼슬은 안동장군(安東將軍) 무호후(蕪湖侯)에 봉해졌으며 병으로 죽었다.

서씨(徐氏) : 손권의 아우 손익(孫翊)의 아내. 남편이 단양태수(丹陽太守)로 있다가 부하 위람( 覽)·대원(戴員)들에게 죽자 꾀를 내어 원수를 갚았다.

서영(徐榮) : 동탁(董卓)의 수하 장수. 동탁이 낙양(洛陽)을 불사르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할 때, 형양(滎陽)에서 추격해 오는 조조를 맞아 싸워 부상시키고 또 한 때 생포까지 하였으나, 하후돈(夏侯惇)의 창에 찔려 죽었다. 이 싸움에서 조조는 화살에 맞고 사랑하는 말을 잃었다.

서질(徐質) : 위(魏)의 장수. 보국장군(輔國將軍)이었으며 사마사(司馬師)를 도와 촉한(蜀漢)을 칠 때 선봉으로 나섰는데 용맹이 뛰어난 것을 꺼린 강유(姜維)는 그를 유인하여 삼면으로 포위하고, 창으로 찔러 떨어뜨리고 군사들을 시켜서 죽였다.

서황(徐晃) ? ∼ 227년 : 조조(曹操) 막하의 용장. 하동 양군(河東 楊群) 사람으로 자는 공명(公明). 큰 도끼(大斧)를 잘 썼다. 이각(李 )·곽사(郭 )의 무리들이 어가를 낙양(洛陽)을 옮길 때 양봉(楊奉)의 수하로서 나타나 용명을 떨쳐, 이를 본 조조가 꾀로 사로잡아 수하에 넣었다. 제법 사태를 볼 줄도 알아, 마초(馬超)가 장안성(長安城)을 뺏고 동관(潼關)을 쳤을 때 적의 구원병이 왔다고 할 적마다 조조가 좋아하였는데, 그 뜻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과연 일선에만 몰린 마초의 병력은 뒤에 방비가 없어, 그는 후방의 퇴로를 쳐서 공을 세운 것이다. 관도(官渡) 싸움에서는 사환(史渙)과 함께 원소(袁紹)의 병량 수송대를 급습했다. 적벽대전 후 패배한 조조가 허도(許都)로 후퇴하자 조인(曹仁)과 함께 강릉(江陵)을 지키며 추격군에 대비하였다. 219년, 관우가 형주(荊州)에서 출병하여 조인이 지키던 번성(樊城)을 에워쌌을 때도 지력과 무용으로 그를 쫓고 명성을 날렸다. 사마의(司馬懿)를 따라 제갈량을 막으러 가는 도중, 맹달(孟達)을 치다가 그가 쏜 화살에 이마를 맞아서 죽으니 그때 59세였다. 관직은 우장군(右將軍).

석광원(石廣元) : 남양(南陽)의 숨은 인재. 영천(潁川) 사람으로 제갈량이나 최주평(崔州平)·맹공위(孟公威)·서서(徐庶) 들과는 함께 공부한 친한 사이. 난세에 세상에 나오기를 꺼려 그 몇몇이서 술과 글로 세월을 보냈다.

설난(薛蘭) : 위(魏)의 장수.

설예(薛禮) : 오(吳)의 문사. 유요(劉繇)의 부하였으나, 후에 손권(孫權)에게 항복.

설종(薛綜) : 손권의 막하 모사(謀士). 패현 죽읍(沛縣 竹邑) 사람으로 자는 경문(敬文). 문장이 뛰어나 저술을 많이 했다. 교지태수(交趾太守)로도 있었고, 벼슬이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설측(薛側) : 위(魏)의 장수. 제갈량이 제 1차로 위를 칠 때 하후무(夏候楙)의 부장이 되어 마주 출전하였다가 장비의 아들 장포(張苞)의 손에 죽었다.

성렴(成廉) : 여포(呂布)의 장수중의 하나.

성의(成宜) : 마등(馬騰)의 부하장수. 조조(曹操)와의 싸움에서 여러 번 출정함.

성제(成濟) : 사마씨의 대장. 위주(魏主) 조모(曹 )가 사마소(司馬昭)의 언동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어, 친히 근위병을 이끌고 쳐 나오는 길을 가충(賈充)과 함께 막다가, 그의 명을 받아 창으로 찔러 떨구어 시(弑)하였다. 사마소는 그를 대역부도라 죽여야 한다고 하여, 항변하는 이 자의 혀를 먼저 자르고, 이어 동생 성수(成粹)와 함께 저자에 내어다 죽였다.

성하(成何) : 조조(曹操)의 막하 장수. 우금(于禁)의 부장으로 관우 토벌의 진중에서, 그의 수공을 염려하여 진을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따로 군사 행동을 추하였다. 주장이 패하자 방덕(龐德)과 함께 죽기로써 항전하다가 관우의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져 죽었다.

소교(小喬) : 동오(東吳) 교공(喬公)의 딸로서 언니 대교와 함께 절세의 미인. 언니는 손책(孫策)의 부인이 되었고, 자신은 주유(周瑜)의 아내가 되었다.

소비(蘇飛) : 유표(劉表)의 부하인 황조(黃祖)의 수하 장수. 감녕(甘寧)이 신임을 못 받는 것이 딱해, 길을 만들어 손권에게 항복하도록 하여 주었다. 황조와 함께 강하(江夏)에서 손권의 침공을 맞아 싸울 때는 동오의 대장 반장(潘璋)에게 사로잡혔으나, 감녕이 목숨을 걸고 빌어서 죽음을 모면하였다.

소완(邵緩) : 위(魏)의 문신. 등애(鄧艾)가 촉한(蜀漢)을 치러 떠나기 직전, 야릇한 꿈을 꾸고 해몽을 청했더니, 주역으로 풀이하여 '서촉을 뺏기는 하되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더니 뒤에 과연 말과 같이 되었다.

소유(蘇由) : 위(魏)의 장수.

소제(邵悌) : 사마씨의 모신(謀臣). 벼슬은 서조연(西曹椽)에 지나지 않았으나, 앞서 종회(鍾會)가 군대를 통솔해 나갈 때, 그의 인품을 평하여 뒷날 반드시 모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손건(孫乾) : 유비(劉備)의 막하 장수. 북해(北海) 사람. 자는 공우(公祐). 서주(徐州) 태수 도겸(陶謙)의 천거로 유비의 종사(從事)가 된 뒤로 시종 외교 절충 활동에 동분서주하였다. 199년, 유비가 서주에 근거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원소(袁紹)와 손을 잡기 위해 사절로 갔다. 또 201년에는 여남(汝南)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유표(劉表)에게 의지하려 했을 때도 유표에게로 가서 그 정지 작업을 했다. 손권의 누이와 혼사를 진행시킬 때도 모두 양국 사이를 왕래하며 주선하였다. 오랫동안 유비를 지성으로 섬기다가 병으로 죽었다. 관직은 종사·중랑(中郞)·병충장군(秉忠將軍).

손견(孫堅) : 후한 말의 무장(武將). 절강성(浙江省)의 오군 부춘(吳郡 富春) 사람으로 지방의 호족 출신이며,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 자는 문대(文臺). 춘추 열국 때 명장 손무자(孫武子)의 후손. 17세 때 해적(海賊)을 퇴치하여 용명을 날렸고, 교위(校尉)로서 허창(許昌)이란 자가 회계(會稽)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멸하여 이름을 떨쳤다. 184년 황건적(黃巾賊) 난리에 사공(司空) 장온(張溫)의 부하로써 수하를 이끌어 토벌에 공을 세워 오정후(吳程侯)에 봉해 졌다. 동탁(董卓) 토벌 연합군의 선봉으로 싸우다가 원술(袁術)이 양초(糧草)를 대어 주지 않아 패하여 달아나던 중 부하 용장 조무(祖茂)를 잃었다. 동탁이 낙양(洛陽)을 불사르고 천도하자, 폐허가 된 도성에 들어가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건장전(建章殿) 우물 속에서 전국옥새( 國玉璽)를 얻고는 급히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먹었다. 192년,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 돌아갈 길을 끊기어 한바탕 충돌이 있었으며 그것을 혐의 먹어 결국, 다시 유표를 쳐 번성(樊城)과 등성(鄧城) 두 성을 뺏고 양양성(襄陽城)을 에워쌌다가 괴량( 良)의 꾀임 수에 빠져 여공(呂公)을 쫓!

아 현산(峴山)에 오르려다가 복병이 내리쏜 석전(石箭)에 맞아서 죽으니 나이 겨우 37세였다.

손고(孫高) : 손권의 아우 손익(孫翊)의 오랜 장수. 위람( 覽)과 대원(戴員)이 손익을 죽였을 때, 미망인 서씨(徐氏)의 요청으로 부영(傅 )과 함께 이들을 잡아죽여 남편의 원수를 갚아 주었다.

손교(孫皎) : 동오(東吳) 손권의 숙부 손정(孫靜)의 셋째 아들로 자는 숙랑(叔朗). 재물을 경히 알고 사람 사귀기를 즐겼으며 벼슬하여 정보(程普)를 대신하여 하구(夏口)를 지켰고, 관우를 잡는 데도 공이 있었다. 호군교위(護軍校尉)에서 공을 세워 도호(都護), 정노장군(征虜將軍)이 됨.

손관(孫觀) : 위(魏)의 장수.

손광(孫匡) : 오(吳)의 문사(文士).

손권(孫權) 182 ∼ 232년 : 오(吳)나라의 초대 황제. 손견(孫堅)의 아들로 자는 중모(仲謀). 머리는 네모나고 입이 크며 눈은 파랗고 수염은 붉어, 일찍이 한실 조정의 사신 유완(劉琓)은 그의 비범한 풍모를 찬양하여 제왕의 기상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200년, 형의 패업을 이어받아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손권은 촉(蜀)의 유비(劉備)와 결탁하여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대파하여 강동의 기반을 굳혀 천하삼분의 기초를 닦음. 뒤에 여러 차례 위의 침공을 받았으나 번번이 공 없이 물러나게 하였다. 조조의 친정(親征)을 맞이하여서는 몸소 출전하여, 몇 번씩 죽을 고비를 넘기며 위험을 무릅쓴 적도 있었으나, 점점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많은 모신(謀臣)과 대장들을 잘 거느리었다. 주유(周瑜), 노숙(魯肅), 여몽(呂蒙), 육손(陸遜) 등 부하를 잘 골라 써서 기반을 충실히 함. 권모(權謀)에도 뛰어나, 조비(曹丕)가 조조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을 때는, 칭신(稱臣)하여 그의 봉작(封?)을 받으면서까지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유비도 촉나라에서 한제(漢帝)를 칭하자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황무(黃武)라 정하고 도읍을 건업(建業)으로 정하였다. 그 후는 대체로 촉한(蜀漢)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관상에 따라 71세로 장수하다가 죽음. 재위(在位) 24년.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손기(孫冀) : 오(吳)의 장수로 수전(水戰)에 능함.

손등(孫登) : 손권(孫權)의 장자(長子). 자는 자고(子高). 황태자로 삼았으나 요절함. 시호 선태자(宣太子).

손랑(孫朗) : 손권(孫權)의 아들.

손량(孫亮) : 동오(東吳)의 황제 손권의 셋째 아들로 반씨(潘氏)의 소생. 자는 자명(子明). 어려서 극히 총명하여 간사한 무리의 얕은꾀를 알아낼 정도였다. 부친이 죽자 뒤를 이어 위(位)에 올랐으나, 대장군 손침(孫 )이 권력을 남용하여 이것을 분하게 여겨 장인 되는 황문시랑(黃門侍郞) 전기(全紀)에게 심정을 얘기하고 밀조(密詔)를 닦아 일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전기가 입을 가볍게 놀려 일은 탄로 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니 재위 7년이었다. 회계왕(會稽王)으로 봉해졌다가 나중에 다시 후관후(後官侯)로 낮추어졌는데 울분을 못 이겨 자살하고 말았다.

손부인(孫夫人) : 선주(先主) 유비의 후취 부인. 동오(東吳)의 주인 손권의 누이로, 자색도 있고 무예를 즐겨 대장부도 따르지 못할 기상이 있었다. 유비와 동거한 지 몇 해 만에 그가 서촉(西蜀)을 치러간 사이, 손권의 모략으로 본국에 돌아가 있었다. 나중에 유비가 패하였을 때 난 군중에 죽었다는 소문을 곧이 듣고, 수레를 몰아 강에 이르러 몸을 던져서 죽었다. 뒷사람들이 동정하여 사당을 세우고 효희사(梟姬祠)라 하였다.

손소(孫韶) : 동오(東吳) 손권의 막하 대장. 본시 유씨(兪氏)였으나 손책에게 총애를 받아 주인의 성을 일컫게 되었다. 자는 공례(公禮). 무용이 뛰어나고 담력이 세었는데, 조비(曹丕)의 남침을 받았을 때는 수장 서성(徐盛)의 명령을 안 들어 군법 시행될 것을 손권 자신이 청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명령을 어기고 뛰쳐나가 조비의 본 진을 습격하여 혼란에 몰아놓고 공을 세웠다. 손권이 대위(大位)에 오르자 진북장군(鎭北將軍) 유주목(幽州牧)이 되었으며 병으로 죽었다.

손수(孫秀) : 오(吳)의 장군.

손예(孫禮) : 위(魏)의 장수. 탁군 용성( 郡 容城) 사람으로 자는 덕달(德達). 조진(曹眞)의 심복으로 기산(祁山) 싸움에서 군량미를 수송하는 척하고 제갈량을 유인하여 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에 역이용 당하여 크게 패하였다. 계속하여 사마의(司馬懿)의 부장으로 활약하고, 여러 외군(外郡)을 다스리다가 병으로 죽었다.

손유(孫瑜) : 손권의 종제. 손권의 숙부 손정(孫靜)의 아들. 자는 중이(仲異). 주유가 유비를 치러 형주(荊州)로 향했을 때 중도에 와서 협력하였다.

손이(孫異) : 오(吳)의 장수. 수전(水戰)에 능함.

손익(孫翊) : 손견(孫堅)의 셋째 아들이자 손권(孫權)의 아우. 자는 숙필(叔弼). 편장군(偏將軍) 단양태수(丹陽太守)로 있었는데 성미가 급해 부하의 불평을 사서 위람( 覽)과 대원(戴員)의 사수를 받은 종자 변홍(邊洪)에게 죽었다. 부인 서씨는 꾀를 내어 원수를 갚아 정녀의 본분을 다하였다.

손자(孫資) : 위(魏)의 중신. 조예(曹叡)가 모황후(毛皇后)를 죽인 뒤 병이 깊어지자, 그와 유방(劉放)을 불러 추밀원(樞密院)의 모든 사무를 부탁하고 태자를 보좌할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더니, 그들은 오래 조진(曹眞)의 은혜를 입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 조상(曹爽)을 천거하여 문무의 전권을 맡게 했다.

손정(孫靜) : 손책의 숙부. 자는 유대(幼臺). 엄백호(嚴白虎)를 칠 때 계책을 내어 그의 군량미 쌓은 데를 빼앗아 대세를 결정짓게 했다. 장수될 지략이 있어 손책을 도와 유요(劉繇)를 파하고, 계략을 드려 회계(會稽)를 평정하였다. 벼슬이 중랑장(中郞張)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손준(孫峻) : 동오의 권신. 자는 자원(子遠). 손견(孫堅)의 아우인 손정(孫靜)의 종손이요, 손공(孫恭)의 아들. 손권의 생존시는 총애를 받아 어림군(御林軍)을 맡아 있었는데, 제갈각(諸葛恪)이 소원하게 대하는 것을 분히 여겨, 태상경(太常卿) 등윤(藤胤)과 함께 오주(吳主) 손양(孫亮)에게 가, 그를 무고하고 잔치 자리에 불러내어 죽였다. 그리곤 자신은 대장군 승상이 되어 권력을 잡은 뒤, 교만하고 음란하여 세상을 어지럽혔다. 나중에 제갈각에게 맞는 꿈을 꾸고는 병이 나서 죽고, 종제 손침(孫 )이 권세를 이었다가 패하여 죽은 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손책(孫策) 175 ∼ 200년 : 동오(東吳)의 용장. 손견(孫堅)의 장남이요, 손권(孫權)의 형. 자는 백부(伯符). 유표(劉表)를 칠 때 종군하여 적장 진생(陳生)을 쏘아 죽여 첫 공을 세웠다. 아비 손견이 죽은 뒤 원술(袁術) 휘하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군대를 이어받고 강남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나, 큰 뜻을 누를 길 없어 주치(朱治)·여범(呂範)의 도움으로 원술에게 전국옥새( 國玉璽)를 담보로 군사를 빌어 군사를 빌어 동오로 들어가 주유(周瑜)·장소(張昭)와 함께 강남(江南)을 평정, 일족과 측근을 태수로 임명하여 진무와 개발에 힘쓰며 오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한 인물. 첫 사업으로 유요(劉繇)를 쳤을 때는 태사자(太史慈)와 용전하였고 삽시간에 적의 두 장수를 죽여 소패왕(小覇王)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싸움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거짓 발상 하여 적을 유인해 크게 이겼다. 주유(周瑜)와는 의형제사이이며 대교(大喬)를 아내로 맞음. 마침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 비난하였다. 조조(曹操)는 이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 하여 그를 오후(吳侯)에 봉하고 혼인 관계를 맺었다. 200년, 조조와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도(許都)에 있는 한나라 헌제(獻帝)를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실패. 일찍이 조조의 모사 곽가(郭嘉)가 말하기를 '경솔하여 앞 뒤 분별이 적고, 참을성이 적고, 지모(智謀)가 부족하여 한 사람의 자객으로서 제거할 수 있으며 다음날 반드시 이름도 없는 자의 손에 죽으리라' 하였다고 하더니 뒤에 과연 죄지어 죽은 허공(許貢)의 식객에게 찔리고 투병 중 우길 선인(于吉 仙人)을 죽이고는 그의 환영(幻影)에 시달리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손침(孫 ) : 동오의 권신. 자는 자통(子通). 손준(孫峻)의 종제로, 성질이 강퍅하여 종형이 죽은 뒤 대사마(大司馬) 등윤(藤胤)과 장군 여거(呂據)·왕돈(王惇) 등을 없애고 모든 권세를 손아귀에 쥐었다. 황제 손양(孫亮)이 밀조(密詔)를 내려 자기를 없애려는 것을 알아내고는 이를 폐하여 내쫓고 손휴(孫休)를 불러들여 자리에 앉혔으나, 노장 정봉(丁奉)에게 유인되어 그의 수하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일족 일당도 모조리 참을 당하였다.

손호(孫皓) : 동오(東吳)의 마지막 황제. 손권의 손자로 자는 원종(元宗). 처음에 오정후(吳程侯)로 봉해졌는데, 휴(休)가 죽자 군신이 받들어 위(位)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흉포하고 주색을 즐겨, 어진 사람을 잔혹하게 많이 죽였다. 재위(在位) 16년 동안 무도한 일을 무수히 하고, 나중에 왕준(王濬)이 쳐들어오자 항복하였다(280년). 귀명후(歸命侯)로 봉하여져 낙양으로 옮겼다가 뒤에 병으로 죽었다(태강 4년).

손화(孫和) : 손권의 아들. 자는 자효(子孝). 형 등(登)이 죽자 태자가 되었으나 참소를 당해 유폐되어 있다가, 남양왕(南陽王)으로 봉해져 장사로, 다시 신도로 옮겼다가, 손권이 죽으매 손준(孫峻)의 미움을 사서 그의 손에 죽었다. 아들 호(皓)가 제위(帝位)에 오르매 문황제(文皇帝)라 추시(追諡)하였다.

손환(孫桓) : 손권 막하의 장수. 자는 숙무(叔武). 그 아비 손소(孫韶)는 본디 유(兪)씨였는데, 손책(孫策)에게 총애를 받아 손성(孫姓)을 일컫게 되었고, 안동중랑장(安東中郞張)을 배수 받음. 유비의 침공을 받았을 때 선봉을 맡아 항전하였으며, 후에 육손(陸遜)과 촉(蜀)의 침입을 막음. 뒤에 벼슬이 건무장군(建武將軍) 단도후(丹徒侯)에 이르렀다.

손휴(孫休) : 동오의 삼대 황제. 손권의 여섯째아들로 자는 자열(子烈). 학문을 좋아하고 백가의 말들에 익숙함. 낭야왕(郎倻王)으로 책동되었다가 손양(孫亮)이 폐위된 후 왕으로 추대됨. 손침(孫 )이 제멋대로 손양(孫亮)을 폐하고 모셔다 세운 임금이라, 늘 신변의 불안을 느끼어 울민한 가운데 있었다. 위막(魏邈)·시삭(施朔) 두 장수의 힘을 빌어 노장 정봉(丁奉)을 움직여 결국 손침과 그의 5형제를 죽여 버리고 손준(孫峻)의 무덤을 파서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 재위 7년이요, 시호를 경제(景帝)라 하였다.

송겸(宋謙) : 손권의 막하 장수(將帥). 장요(張遼)와의 합비성(合 城) 싸움에서 가화(賈華)와 함께 방천화극(方天畵戟)을 들고 손권의 신변을 지켰으나, 악진(樂進)의 돌입을 간신히 막고 이어 이전(李典)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송과(宋果) : 오(吳)의 장수.

송충(宋忠) : 유표(劉表) 막하의 장수. 유표가 죽은 뒤, 채씨 일족이 작은아들 유종(劉琮)을 세우고 조조에게 항복하기를 결정하였을 때, 문서를 가지고 완성(宛城)으로 조조의 진을 찾아가 사명을 다하고 돌아오는 길에 관우의 부하에게 붙잡혀, 그의 초사(招辭)로, 유비는 비로소 형주(荊州)가 망한 것을 알았다.

송헌(宋憲) : 여포가 수하 장수를 홀대(忽待)하는 것을 보고 몰래 그가 조는 틈을 타 묶어서 조조에게 바치고 항복하였다. 나중에 백마(白馬)의 전투에서 원소(袁紹)의 군대와 대결하였을 때, 위속(魏續)과 함께 하북명장 안량(顔良)의 손에 죽었다.

순개(荀愷) : 위(魏)의 하잘것없는 장수. 종회(鍾會)가 촉한(蜀漢)을 칠 때, 남정관에서 촉장 노손(盧遜)에게 쫓기다가 말과 함께 넘어져 곧 그의 손에 죽게 된 것을, 활을 쏘아 노손을 죽이고 구해준 때문에 호군(護軍)으로 승진하고 많은 상을 받았다.

순상(荀爽) : 후한의 사도(司徒). 동탁(董卓)의 장안(長安) 천도(遷都)를 반대하다가 파면되어 서민으로 떨어졌다.

순심(荀諶) : 원소(袁紹)의 모사.

순우경(淳于瓊) : 원소(袁紹) 막하의 장수.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양식을 쌓다 둔 오소(烏巢)의 수비를 맡았으나, 연일 술만 먹고 큰 소리를 치다가, 야습을 받아 양곡을 불태우고 붙잡혀 코와 귀를 베이고 손가락을 잘리어 원소에게로 보내져 격노한 원소의 손에 죽었다.

순우도(淳于導) : 조조(曹操) 막하의 장수. 조인(曹仁)의 부장으로 당양현(當陽縣) 싸움에서 유비의 장수 미축( 竺)을 사로잡아 가지고 가다가, 조운(趙雲)을 만나 그의 손에 죽고, 그 때 뺏은 말에다 조운은 감부인(甘夫人)과 미축을 태워 장비에게 넘겨주었다.

순욱(荀彧) 163 ∼ 212년 : 조조(曹操)의 모사(謀士). 영천 영음(潁川 潁陰) 사람. 자는 문약(文若). 왕좌(王佐)의 재질을 가졌다. 본시 원소(袁紹)에게 있었으나 조조가 청주(淸州)의 황건적(黃巾賊) 잔당을 치고 위세를 떨쳤을 때, 그의 막하에 참여하였다. 조조가 황제의 부름으로 중앙에 서게 되자, 이호상식지계(二虎相食之計)로 유비(劉備)와 여포(呂布)가 서로 싸워 자멸하게 하려다 이루어지지 않으매,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로 원술(袁術)을 움직여 둘을 치게 하였다. 조조를 위하여 평생을 진력하였으나, 스스로 위공(魏公)이 되어 권세를 누리려 할 때, 이를 반대한 이유로 노염을 사, 더 부지 못할 것을 깨닫고 자살하니, 이때 나이 50이었다. 조조는 그에게 경후(敬侯)라 시호를 내렸다. 아들 순혼(荀琿)이 있으나 드러나지 않았다. 관직은 시중(侍中), 광영대부(光榮大夫).

순유(荀攸) : 조조(曹操)의 모사(謀士). 역시 모사인 순욱(荀彧)의 조카. 자는 공달(公達). 외우내현(外愚內賢)하고 계모(計謀)가 많았다. 일찍부터 해내 명사로 황문시랑(黃門侍郞)까지 지냈으나 낙향해 있다가 숙부와 함께 조조의 막하에 들었다. 조조가 적벽대전의 보복으로 남침하려 할 때 서량(西 )의 마등(馬騰)을 높은 벼슬로 불러 올려 죽여, 후고(後顧)의 염려를 없앴다. 조조가 위공(魏公)이 되려 할 제 순욱이 간하다 죽음을 당하더니, 이 또한 조조를 위왕으로 받들려 할 때 간하다가, 그의 노여움을 사 그로 인해 병들어 10여 일 만에 죽으니, 향년 58세였다. 관직은 상서령(尙書令).

시삭(施朔) : 동오(東吳)의 장수. 손침(孫 )이 권세를 잡아 폐립을 감행하고, 새 임금 손휴(孫休)를 또 농락(籠絡)하게 되자, 위막(魏邈)과 함께 고변(告變)하고 노장(老將) 정봉(丁奉)을 움직여 잔치를 베풀고는 그 자리에 불러들여서 참하였다.

신명(辛明) : 위(魏)의 장수.

신비(辛毗) : 원소(袁紹)의 장자 원담(袁潭)의 막하로, 신평(辛評)의 아우. 영천 양책(潁川 楊責) 사람. 자는 좌치(佐治). 원담이 아우 원상(袁尙)과 싸우다 지쳐, 조조에게 항복하려고 서면을 들려 마침 유표(劉表) 정벌중인 그에게 특사로 보냈다. 기주성(冀州城)을 포위하였을 때 앞장섰다가, 성을 지키던 형 신평이, 온 가족 80여 명을 목을 베어 떨구는 바람에 통곡하더니, 형의 아들 신영(辛榮)이 성문을 열어 주어 기주를 함락하였다. 위(魏)에 항복하여 건의관(建議官)이 되고, 이어 조비(曹丕), 조예(曹叡)를 섬겼다. 사마의(司馬懿)가 오장원(五丈原)에서 제갈량의 군사와 대치했을 때는 조예의 군사(軍師)가 되어 조진(曹眞)을 도와 제갈량의 침입군을 대항해 싸웠다. 지식과 도략을 겸비한 인물. 관직은 위위(衛尉). 시호는 숙후(肅侯).

신의(辛義) : 위(魏)의 장수.

신창(辛敞) : 위(魏)의 장수. 조상(曹爽)이 일당을 거느리고 사냥에 나간 사이, 사마의(司馬懿)가 쿠데타를 일으켜 성문을 굳게 닫고 일을 도모하였을 때, 문직이 군사를 베고 달려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쿠데타가 성사한 뒤 사마의는, '각각 저들의 주인을 위해 한 일이니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냐'고 죄를 묻지 않았다.

신탐(申眈) : 위(魏)의 장수. 조조가 견디지 모사형 한중(漢中)을 버리고 후퇴했을 때 상용관(上庸關)을 지키다가 유봉(劉封)·맹달(孟達)의 토벌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랬다가 맹달이 위(魏)에 항복했을 때, 아우 신의(申義)와 함께 내응이 되어 위로 돌아갔고, 뒤에 맹달이 다시 촉한에 내응이 되려 하자 위를 위하여 그를 죽였다.

신평(辛評) : 원소(袁紹)의 모사(謀士). 본시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의 모사였으나 한복의 멸망 후 원소 막하에 있었고, 다시 원소가 죽은 후 형제가 갈려 겨루게 되자, 장자 원담(袁潭)을 도와 싸웠다. 원담이 평원(平原)과 남피(南皮)에서 패하여, 조조에게 다시 항복하려고 특사로 보냈을 때, 조조가 유인했으나 듣지 않고, 돌아가 분기가 터져서 죽었다. 내정에 능하고 싸움에도 참가한 인물.

신헌영(辛憲英) : 위(魏)의 장수 신창(辛敞)의 누이. 신창이 신비(辛毗)의 아들이라니까, 그는 딸인 셈이다. 사마의(司馬懿)가 군대를 끌고 거사(擧事)하였을 때 신창의 망지소조(芒知所措)하는 양을 보고 사리로써 타일러서 황제를 호위하러 달려가게 하였다. 신창이 일러서 충의지사(忠義之士)라 하여 목숨을 보전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 누이의 덕이라 칭송하는 이가 많았다.

심배(審配) : 원소(袁紹) 막하의 모사(謀士). 위군(魏郡) 사람. 자는 정남(正南). 관도(官渡)의 싸움에서는 조조의 진(晋) 밖에 토성을 쌓고 덕을 매어 적을 괴롭혔으나 유엽(劉曄)은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이에 대항하였다. 이 싸움에 원소가 크게 패한 뒤로는 그의 셋째 아들 원상(袁尙)을 도왔다. 끝까지 기주성(冀州城)을 지켜 잘 싸웠으나 끝내 붙잡혀 굴하지 않고 북쪽을 향해 앉아 칼을 받고 죽었다. 계략에 능했다.

심영(審榮) : 위(魏)의 장수. 심배(審配)의 조카로 조조(曹操)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함.

[아]

아회남(阿會南) : 제갈량(諸葛亮)이 남만(南蠻)을 정벌할 때 남만왕(南蠻王) 맹획(猛獲)의 삼원수중의 한 명. 장억과 장익에게 각각 사로잡혔다가 놓인 데 감격하여 동다노(董茶奴)와 맹획을 묶어서 바쳤으나, 뒤에 돌아온 맹획에게 유인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악진(樂進) : 위(魏)의 장군. 양평위국(楊平衛國) 사람으로 자는 문겸(文謙). 처음 그가 진류(陳留)에서 의거(義擧)하였을 때, 맨 먼저 참여하였다. 적벽대전 후 동오(東吳)와 대결하게 되자 대장으로 출전하여 단기로 손권에게 달려들어 송겸(宋謙)·가화(賈華)가 가로막는 창을 단칼에 베어 떨구고 덤벼 용명을 떨쳤다. 몸집은 작았으나 담력이 있어, 그 후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늙어서 죽었다. 시호는 위후(威侯). 관직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악취(樂就) : 원술(袁術)의 장수. 여포(呂布)가 사자 한윤(韓胤)을 묶어 조조에게 보내 허도(許都)의 네 거리에서 참수 당하자 여포를 치기 위한 전쟁에서 부장으로 데리고 감. 그 전투에서 여포의 방천화극(方天畵戟)에 사람과 말이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 죽음.

악침(樂 ) : 위(魏)의 장수. 용장 악진(樂進)의 아들로서 조진(曹眞)의 군대의 부선봉이 되어 기산(祁山)에서 제갈량의 재차 침공을 맞아 싸웠을 때는 포위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다. 뒤에 사마소(司馬昭)의 명을 받아 제갈탄(諸葛誕)을 쳤을 때 그의 성을 빼앗아 웅거했으나, 이내 용감한 군사들에게 성문을 빼앗기고 뒤미처 쫓아든 제갈탄의 칼을 맞고 죽었다. 벼슬은 양주자사(楊州刺使). 시호는 민후(愍候).

악환(顎煥) : 촉한(蜀漢)에 반기를 들었던 옹개(雍 )의 수하 장수. 신장이 구척이요, 얼굴이 흉악하여 무용이 절륜하였는데, 제갈량의 남만 정벌 첫 싸움에서 위연(魏延)에게 사로잡혀 귀순. 옹개와 주포(朱褒)를 죽이고 고정(高定)과 함께 익주(益州)를 지키었다.

안량(顔良) ? ∼ 200년 : 원소(袁紹) 막하의 용장. 일찍부터 용명을 떨쳐 원소가 노상 자랑하는 바였고, 백마(白馬) 전투 때는 조조의 막하에 든, 본시 여포의 대장인 송헌(宋憲)·위속(魏續)을 차례로 베어 조조 진의 두려움을 샀다. 그러나 조조에게 의지해 있던 관우에게 별로 손도 놀려보지 못하고 죽었다.

안명(晏明) : 위(魏)의 장수. 조홍(曹洪)의 부장으로 장판교에서 조운(趙雲)과 싸웠으나 그에게 죽음을 당함.

양강(梁剛) : 마등(馬騰)의 부하장수.

양관(梁寬) : 마초(馬超)가 재기하여 농서( 西)를 차지했을 때 기성자사(冀城刺使) 위강(偉康)을 항복 받아 죽였는데, 그의 참군이던 양부(楊阜)가 거짓 항복하였을 때 천거한 군관. 동지들과 마초를 칠 군대를 움직였는데, 특히 마초의 아내와 어린 세 아들과 십여 명 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려, 이에 눈이 뒤집힌 마초는 상대편 장수의 가족은 물론 많은 죄 없는 백성을 수없이 죽이고 쫓기어 장로(張魯)를 의지해 갔다.

양기(楊琦) : 후한의 중신. 시중(侍中)으로 이각(李 )·곽사(郭 )의 난리 중에도 가후(賈 )의 사람됨을 보고 임금에게 그를 불러 문의하기를 권하였다.

양능(楊陵) : 위(魏)의 남안군(南安郡) 태수. 양부(楊阜)의 아우였는데, 제갈량이 제 1차로 위를 치고자 출병하였을 때, 일단 항복하였다가 온 안정태수(安定太守) 최량(崔 )과 함께, 계교를 써서 반격하려다가, 관우의 아들 관흥(關興)의 손에 죽었다.

양령(楊齡) : 장사태수 한현(韓玄)의 장수로 관우(關羽)와 대적하다 한 칼에 죽음.

양밀(楊密) : 후한의 대신.

양백(楊伯) : 한중(漢中) 장로(張魯)의 모사 양송(楊松)의 아우. 장로가 새로 항복해 온 마초(馬超)를 중용(重用)하려는 것을 말린 때문에 그와 반목해 지냈다. 가맹관( 萌關)을 사이에 두고 유비와 대진하였을 대 같이 군중에 있었는데 마초는 돌아갈 곳이 없어지자 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유비에게 항복해 갔다.

양봉(楊鋒)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반란 평정에 협력한 은야동(銀冶洞)의 동주. 꾀로 맹획의 형제를 묶어서 바쳤으나, 제갈량은 또 한번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양봉의 여섯 부자에게는 모두 관직과 은상을 베풀어주었다.

양봉(楊奉) : 동탁(董卓)의 잔당으로 이각(李 )·곽사(郭 )의 난리에 외척 동승(董承)과 함께 어가(御駕)를 호송하려다 이루지 못했다. 부하로 용맹한 서황(徐晃)이 있었으나 그가 조조에게로 가버린 후 원술(袁術)을 의지해 갔다. 원술이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7로 군을 일으켜 쳐 나올 때 제7로 군을 거느렸었으나, 진등(陳登)의 계교로 한섬(韓暹)과 함께 내응 되어, 원술이 패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여포(呂布)에게서 산동 지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노략질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때문에 유비가 잡아서 죽여버렸다.

양부(楊阜) : 조조(曹操) 수하의 장수. 본시 마초(馬超)가 거느렸던 서량군(西 郡)의 참군(參軍)으로 자는 의산(義山). 마초가 패하여 떠난 뒤 스스로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강(偉康)이란 자를 천거하여 양주(楊州)의 자사(刺使)를 삼아 함께 기성(冀城)을 지키었다. 마초가 재기하여 나올 때 위장이 항복하려는 것을 극력 말린 때문에, 도리어 마초(馬超)에게 목숨을 용서받았다. 그러나 고종(姑從) 되는 강서(姜敍)와 함께 다시 항전을 벌여서 싸우다가, 형제 일곱 사람이 모두 마초의 창에 찔려 죽고, 자신도 다섯 군데나 상처를 입은 채 허도(許都)로 옮겨져 조조의 극진한 우대를 받았다. 뒤에 조예(曹叡)가 사치를 일삼아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킬 때, 표를 올려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군사들에게 문 밖으로 끌려나가기까지 하였다.

양송(楊松) : 한중(漢中) 장로(張魯)의 모사(謀士). 간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주인을 받든 몸으로 회뢰(賄賂)를 좋아하는 것이 타국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앞서는 제갈량이 그에게 뇌물을 써서 마초(馬超)를 고립시켜 데려갔고, 나중 조조가 침공하였을 때도 그에게 뇌물을 써서 방덕(龐德)을 사로잡아 갔다. 조조가 한중을 차지하였을 때 장로의 다른 부하는 다 후히 대하였으나, 조조만은 주인을 팔아 부귀를 탐내는 놈이라고 저자에 끌어내어 목베어 죽였다.

양수(楊修) 175 ∼ 219년 : 조조(曹操) 수하의 재사(才士). 한(漢) 태위(太尉) 양표(楊彪)의 아들이요, 사공(司空) 양진(楊震)의 손자. 화음(華陰) 사람. 일문에서 여섯 재상을 낸 명문의 출신으로, 자는 덕조(德祖). 박학하고 견식이 넓으며 언변이 좋았는데, 매양 조조보다 생각이 앞서 조조는 그를 아끼면서도 그를 시기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주부(主簿) 벼슬에 있을 때 서촉(西蜀)의 장송(張松)이 찾아와 그와 담론하고 조조와의 면회를 주선하였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양수가 조식(曹植)의 참모로 활발히 일한 것이 조조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이미 조비(曹丕)를 후계자로 정한 이상 양수의 존재는 장차 화근이 될 근원이었던 것이다. 한중(漢中) 출병 때도 종군하여 황견 유부(黃絹 幼婦)의 수수께끼를 조조보다 앞질러 풀었고, 전과가 좋지 않아 조조가 계륵(鷄肋)이라 한 말뜻을 미리 알고 짐을 꾸렸다가, 군심을 동요시켰다는 죄목으로 진 앞에 군법 시행을 당해 죽였다.

양앙(楊昻) : 한중(漢中) 장로(張魯)의 막하 장수. 장로의 아우 장위(張衛)와 함께 조조의 침입군을 막아 잘 싸웠으나, 그의 대군에게 포위된 끝에 장합(張 )과 무예를 겨루다가 죽었다.

양의(楊儀) : 촉한(蜀漢)의 문신(文臣). 양양(襄陽) 사람으로 자는 위공(威公). 대소사에 재치 있게 임하여, 제갈량의 출정 중에는 늘 좌우에 모시고 있어, 잔 사무는 모두 그의 손에서 처리되었다. 백성과 군사의 피로를 덜고자 석 달 만큼씩 교대하는 제도를 건의하여 제갈량은 그것을 따랐다. 제갈량이 임종에 유언하여 위연(魏延)이 모반하였을 때에 깨칠 계교를 전하였다. 그리하여 유해를 모시고 무사히 귀국하였는데, 제갈량의 유언대로 중앙의 요직이 결정되자, 장완(蔣琬)은 자기보다 벼슬을 나 중하였건만 윗자리에 앉았다고 불평을 하고, 그 밖의 불미한 일들이 속속 드러나, 죽음을 줄 것이로되 감하여 관직을 뺏고 내치었다. 그리하여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스스로 목베어서 죽었다. 벼슬은 후군사(後軍師).

양임(楊任) : 한중 장로(張魯)의 장수. 장로의 아우 장위(張衛)를 도와서, 조조의 침입군을 막아 싸워 한때 이기기도 했으나, 하후연(夏後淵)이 거짓 패하여 달아나는 것을 쫓다가 그의 칼에 죽었다.

양조(楊祚) : 공손연(公孫淵)의 장수.

양종(楊綜) : 위(魏)의 문신(文臣). 조상(曹爽)의 막하에서 주부(주부)로 있었는데, 갑자기 변을 일으킨 사마의(司馬懿)가, 수하를 보내 인수(印綬)를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을 곁에 있다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것으로 죄를 물었으나 사마의는, 저의 주인을 위해 한 일이니 또한 충의로운 일이 아니냐고 벌주지 않았다.

양추(楊秋) : 서량(西 ) 한수(韓遂)의 수하 장수. 마초(馬超)와 함께 장안을 뺏고 동관(潼關)에서 조조와 맞섰을 때, 겨울철이 되자 강화하기로 건의하여 조조 진을 왕래하였고, 마초에게 습격 당해 한수마저 부상하자, 그의 뜻을 받들어 주인과 함께 위진에 항복하여 열후(列候)가 되어 위구(渭口)의 수비를 맡았다.

양평(楊平) : 장로(張魯) 휘하의 장수.

양표(楊彪) 142 ∼ 225년 : 후한의 사도(司徒). 화음(華陰) 사람으로 자는 문선(文先). 유명한 학자로서 '관서(關西)의 공자'라 불리던 양진(楊震)의 증손이다. 동탁(董卓)의 장안(長安) 천도(遷都)를 반대하다가 파직 당하여 서민(庶民)으로 떨어진 적도 있다. 동탁의 잔당 이각(李 )·곽사(郭 )의 무리가 조정을 흔들 때, 주전(朱鐫)과 같이 헌제(獻帝)께 조조(曹操)를 불러들이도록 권하고, 또 아내를 시켜 이각과 곽사를 이간시켜 자멸하게 하였다. 조조가 득세한 후 원소(袁紹)·원술(袁術)과 친척이 되는 때문에 만약에 내응이라도 하면 후환이 되겠으므로 생트집을 하여 조정에서 내어 몰아 시골로 쫓았다. 그의 아들 양수(楊修)는 조조에게 벼슬하였는데, 지나친 재기(才氣)가 화근(禍根)이 되어 조조의 손에 죽었다.

양호(羊祜) : 사마씨(司馬氏)의 대장. 자는 숙자(叔子). 조서(詔書)를 받아 오(吳)와의 국경을 지켰는데 군기가 엄숙하고 인의로써 다스리었다. 오장(吳將) 육항(陸抗)과 비록 대립된 자리에 있었으나, 서로 지기(志氣)가 상통하여, 늙어 자리를 물러나도록 까지 서로 경대하였다. 위독하자 진제(晋帝) 사마염(司馬炎)은 친히 그의 병석을 찾아 위로하였으며, 죽은 뒤로는 태부(太傅)를 추증하고 거평후를 봉했다. 타루비(墮淚碑)란 비석도 있음.

양홍(楊洪) : 촉(蜀)의 장수. 건위 무양(楗爲 武陽) 사람. 자는 계휴(季休). 여러 차례 태수로 외지로 나가 일을 잘 처리하여 그의 명성이 높았다.

양회(楊懷) :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 용장. 장로(張魯)의 침입을 막으려 유비를 불러들였을 때 백수도독(白水都督)으로서 부수관( 水關)을 지켰었는데, 유비가 회군하겠다는 말을 곧이듣고, 전송하는 체하고 찾아가 기회를 보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도리어 방통(龐統)의 계략에 걸려 손도 써보지 못하고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양흔(楊欣) : 위(魏)의 장수.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있었는데, 종회(鍾會)가 촉한(蜀漢)을 칠 때, 촉장 강유(姜維)의 배후에서 여러 진지를 불태워 그의 돌아갈 길을 끊었다. 강유가 말과 함께 넘어진 것을 취하려다가 반대로 강유가 말을 찔러 넘어뜨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의 손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양흥(楊興) : 마등(馬騰)의 장수. 조조(曹操)와의 싸움에 출전.

엄강(嚴綱) : 오(吳)의 장수.

엄백호(嚴白虎) : 동오(東吳)의 호족(豪族). 스스로 동오 덕왕(德王)이라 일컫고 오군을 차지하며 오성(烏城)·가흥(嘉興)을 누르고 있었으나, 손책(孫策)의 침공을 받아 아우 엄여(嚴與)와 부장을 잃고 도망하여 왕랑(王郞)과 손을 잡아 항전하였으나 동습(董襲)에게 죽었다.

엄안(嚴顔) : 촉한(蜀漢)의 용장. 처음 유장(劉璋)의 밑에서 파군태수(巴郡太守)로 있으면서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 장비가 낙성을 향하여 나아갈 때 가짜 장비를 앞세우고 지나가는 것을 모르고 협공하려다가 진짜 장비에게 붙잡혔으나, 우리 촉 중엔 단두장군(斷頭將軍)은 있어도 항복하는 장수는 없다고 버티었다. 그 의기에 감복한 장비가 스스로 결박을 풀고 우대하였는데 감격하여 그와 손을 잡아 도중의 4, 5성을 모두 항복시키며 진군하였다. 뒤에 같이 늙은 장수인 황충(黃忠)과 함께 정군산(定軍山)에서 위병(魏兵)을 막아 크게 공을 세웠으며 병으로 죽었다.

엄여(嚴與) : 엄백호(嚴白虎)의 동생. 손책(孫策)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그에게 죽음.

엄준(嚴峻) : 손권의 막하 모사(謀士). 팽성(彭城) 사람으로 자는 만재(曼才). 성질이 순후하고 학식이 깊으며 뜻이 높아 재물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시경삼례(時經三禮)에 능통하고 학문을 논하기를 좋아함. 효경전(孝經傳) 조수론(潮水論)을 저술함. 장소(張昭)의 추천으로 종사중랑(從事中郞)에 발탁되었고, 노숙(魯肅)이 죽으매 손권은 그로 대신하려 하였으나 울면서 사양하였다. 촉한(蜀漢)에 사신 가서는 제갈량과 뜻이 매우 통하였으며 뒤에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

여개(呂凱) : 촉한(蜀漢)의 대장. 영창 불위(永昌 不韋) 사람으로 자는 계평(계평).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이 옹개(雍 )와 함께 반(叛)하였을 때, 영창성(永昌城)을 지켜 항전하였고, 제갈량이 당도하자 평소에 준비하였던 평만지장도(平蠻指掌圖)를 바치고, 행군 교수로 향도(嚮導)가 되어 토벌군을 인도하였다. 벼슬이 운남태수(雲南太守) 양천정후(陽遷亭侯)에 이르렀다. 왕항(王伉)을 도와 운남을 지키는 공을 세우나, 뒷날 모반한 만인에게 죽었다.

여건(呂虔) : 위(魏)의 문사. 무성(武城) 사람으로 자는 자각(子恪). 조조(曹操)의 종사로 일찍부터 따라다니며 많은 공을 세움.

여공(呂公) : 유표(劉表)의 수하장수. 손권이 침입하여 양양성(襄陽城)에 포위되었을 때 외부와 연락하려 일지병마로 포위망을 뚫고 달리다가 손견(孫堅)을 만나, 현산(峴山) 좁은 골짜기로 유인하여 복병을 시켜 돌과 쇠뇌를 쏘아 그를 죽게 하였으나, 자신도 정보(程普)의 손에 죽었다.

여광(呂曠) : 원소(袁紹)의 셋째 아들 원상(袁尙)의 장수. 아우 여상(呂翔)과 함께 처음에는 조조를 맞아 싸우려 출전하였다가 원담(袁潭)의 군사와 충돌하게 되어 잠벽(岑壁)과 싸워서 이를 베어 죽였다.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한 뒤, 이들 형제도 따라 항복하였으나 원담은 달리 장군인(將軍印)을 보내 내응 하도록 부탁하였다. 기주성(冀州城)을 포위하였을 때는 조조의 명을 받아 마연(馬延)·장개(張 )를 귀순시켜 성을 고립하게 만들었다. 뒤에 유비가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신야(新野)를 지키고 있을 때, 조조군의 선봉을 자청해 나갔으나, 조운(趙雲)을 만나 그의 창에 찔려 죽었다.

여대(呂岱) : 동오(東吳)의 구신(舊臣). 광릉 해릉(廣陵 海陵) 사람으로 자는 정공(定公). 정성껏 군주(君主)를 섬겨 나이 80이 되도록 변함이 없었다. 계모(計謀)에 깊었으며 늘 불의의 출병으로 승리를 얻음. 뒤에 요식(寥式)이 반란을 일으키니 토평관(討平官)이 됨. 벼슬이 진남장군(鎭南將軍)에서 대사마(大司馬)에 이르렀으며, 손권은 임종에 태자 손양(孫亮)의 보호를 부탁하였다. 뒤에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번우후(番愚侯)

여몽(呂蒙) 178 ∼ 219년 : 오(吳)나라의 명장. 여양(汝陽) 사람으로 자는 자명(子明).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됨.15,6세 때부터 종준하여 정보(程普) 등과 함께 오나라의 중진이 되었으나, 언젠가 손권(孫權)에게 학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발분 하여, 유학자도 따르지 못할 학식을 지니게 되었다. 손권을 수족같이 따르며 많은 계교를 드렸으니, 조조의 남침을 앞두고 유수(儒須)에 토성을 쌓게 하는 등 모두 그의 계교였다. 노숙(魯肅)의 뒤를 이어 동오(東吳)의 전 군사권을 맡게 되자, 형주탈환의 숙원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관우도 그의 지모를 아는 때문에 대비를 굳게 하였다. 그래서 아직 나이 어린 육손(陸遜)으로 대신시켜 그를 안심시키고 양양성(襄陽城)에 주력을 동원한 배후를 기습하여 형주를 도로 찾았음은 물론, 관우를 곤경에 몰아넣어 붙잡아 죽였다. 인간의 심리를 역이용한 이 작전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손권이 승전하고 크게 잔치를 벌인 자리에서, 관우의 영혼에 들 씌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 남군태수(南郡太守) 잔릉후(孱陵侯)에 책봉.

여백사(呂伯奢) :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과 의형제를 맺고 지내던 사람. 조조가 동탁(董卓)을 찌르려다 실패하고 도피할 때, 아버지와의 구의(舊誼)를 믿고 의탁하였더니, 밤중에, '매어 놓고 죽일까?' 어쩌고 하는 것을 꼭 자기를 죽이려는 줄로만 알고 온 가족을 몰살하고 나서 보니 자기를 대접하려고 돼지를 잡으려던 것이었다. '아차 잘못을 저질렀구나!' 후회를 하나 별수 없이 몸을 빼쳐 달아나는데, 도중에서 술을 사 가지고 오는 여백사와 마주쳤다. 몇 마디 인사 끝에 여백사마저 죽여버리니 여백사의 집안은 이래서 멸족이 되었다. 동행하던 진궁(陳宮)은 조조의 행동에 정이 떨어져 나중 여포(呂布)에게 의지하게 되고, 결국 다시 조조에게 붙잡혔으나 굽히지 않고 죽었다.

여범(呂範) : 손권 막하의 문관. 여남 세양(汝南 細楊) 사람으로 자는 자형(子衡). 건위장군(建威將軍) 단양태수(丹陽太守)에 임명됨. 지략이 우수하고 특히 재정관리에 능함. 주유의 발론(發論)으로, 유비를 손권의 누이와 정략 결혼한다는 구실로 유인하려 할 때, 손권의 명을 받아 형주(荊州)에 파견되었다. 관우가 형주를 뺏기고 쫓겼을 때는 손권의 막 중에서 점을 쳐 양편의 운명을 판단하였다. 뒤에 대사마(大司馬)까지 벼슬이 올랐으나 인수(印綬)를 받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완릉후(宛陵侯).

여상(呂翔) : 원소(袁紹)의 셋째 아들 원상(袁尙)의 장수. 형 여광(呂曠)과 함께 처음에는 조조를 맞아 싸우려 출전하였다가, 원소의 장자 원담(袁潭)의 군사와 대전하게 되었다.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한 뒤, 이들 형제도 원상을 버리고 조조에게 항복, 원담은 이들을 내응 하게 이용하여 조조를 도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뒤에 유비가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신야(新野)를 지키고 있을 때, 조조군의 선봉으로 나왔다가 장비를 만나 그의 창에 찔려 죽었다.

여상(呂常) : 조조(曹操)의 막하 장수. 조인(曹仁)을 도와 번성(樊城)을 지켜 관우와 대진했을 때, 자원 출전하였다가 패하였으나, 뒤에 관우가 뭉그러져 도망갈 때 도중에 내달아 그를 괴롭혔다.

여위광(呂威廣) : 위(魏)의 장수. 본래 원소(袁紹)의 장수였으나 조조(曹操)에게 항복함.

여의(呂義) : 촉(蜀)의 장군. 한중태수를 지냄.

여패(呂覇) : 오(吳)의 장군. 여몽(呂蒙)의 아들. 아버지가 죽은 후에 뒤를 이어 형주(荊州)를 지킴.

여포(呂布) ? ∼ 198년 : 후한 말의 무장. 오원 구원(五原 九原) 사람으로 자는 봉선(奉先). 삼국지 최고의 장수.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며, 본시 형주자사(荊州刺使) 정원(丁原)의 의자(義子)로 그를 호위하였었으나, 동탁(董卓)이 적토마(赤 馬)를 주어 매수하는 바람에 변심하여 아비라 부르던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 붙어 조석으로 그의 신변을 지키며 탈위장군(奪威將軍) 온후(溫侯)를 제수 받음. 동탁 토벌군이 쳐들어오자 호로관(虎 關)에서 공격군의 많은 장수를 차례로 죽였다. 유비(劉備)의 삼형제와 첫 번 솜씨도 겨룬 것도 그때 일이다. 192년, 조정 일을 근심한 나머지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초선(貂蟬)의 몸을 희생시켜 베푼 연환계(連環計)에 걸려, 또다시 아비라 부르던 동탁을 죽이고, 그의 잔당인 이각(李 )·곽사(郭 )의 무리를 막아 장안(長安)을 지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막(張 )에게로 투신(投身)하였다. 진궁(陳宮)의 계교로 조조가 도겸(陶謙)을 치러 간사이 연주( 州)를 함락시키고 복양( 陽)에서 크게 이겼으나, 무모하게 굴다가 오히려 쫓겨 서주(徐州)로 가 소패(小沛)성을 빌어 몸을 의지하였다. 유비가 원술(袁術)과 대결하는 사이 서주성(徐州城)을 뺏어 차지하여 스스로 서주자사(徐州刺使)라 칭했고, 원술의 장수 기령(紀靈)을 유비와 한자리에 앉혀 놓고 원문(轅門)에서 활을 쏘아 창을 맞춰, 둘 사이에 싸움을 멎게 할 때가 그의 전성기다. 뒤에 조조와 유비의 연합군에게 붙잡혀 항복하였으나 평소에 반복(反覆)이 무상하였던 때문에 목매어 죽였다.

염우(閻宇) : 촉한(蜀漢)의 간신(奸臣). 손톱 만한 공로도 없이 환관 황호(黃皓)에 빌붙어 지냈는데, 그를 쏘삭거려 강유(姜維)를 대신하여 군대의 지휘를 맡기로 하고는 전세(戰勢)가 위험해지니까 부임하지 않고 흐지부지하였다.

염포(閻圃) : 한중(漢中) 장로(張魯)의 부하. 한중 백성이 땅속에서 옥새(玉璽) 하나를 얻어서 바치고, 어서 한중왕(漢中王)이 되어 조조를 대비하라고 권고한 이가 있었는데 이는 이것을 간하고 우선 이웃의 서천(西川) 주를 뺏어 근거를 삼고, 천천히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나중 조조가 침공하였을 때도 그의 출전을 말렸으나 장로는 나아가 항전하다 패해 항복하였다. 조조한테 귀순하여 열후(列侯)에 올랐다.

예형( 衡) : 재사요 문장가다. 자는 정평(正平). 조조가 유표(劉表)를 회유(懷柔)차 사신을 보낼 때, 그의 구미에 맞도록 문장으로 이름 있는 이를 고를 때 뽑히었으나, 본래의 강직한 성격과 자존심 때문에 조조의 거만한 태도를 무수히 욕하고 유표에게 가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독설을 부려, 결국 황조(黃祖)에게로 보내져 거기서 죽음을 당하였다.

오강(吳綱) : 위(魏)의 모신(謀臣).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소(司馬昭)를 치고자 군대를 움직였을 때 계책을 드리고 친히 사신이 되어 동오(東吳)로 찾아가 손준(孫峻)을 달래어 그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오경(伍瓊) : 후한의 충신. 성문교위(城門校尉)로 상서(尙書) 주비(周毖)와 함께 장안천도를 반대하다가 참수를 당함.

오교(吳敎) : 오(吳)의 장수.

오란(吳蘭) :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 장수. 장임(張任)을 도와 낙성(洛城)을 지키다가 포위에 빠져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한중 싸움에서 마초의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구원병으로 온 조조의 둘째 아들 조창(曹彰)과 맞섰다가 그의 창에 찔려 죽었다.

오반(吳班) : 유비의 막하 장수. 관우의 원수를 갚으러 출병하였을 때 선봉으로 참전, 손환(孫桓)의 진영을 엄습하여 첫 공을 세웠다. 육손(陸遜)의 반공으로 쫓기게 되자, 장남(張南)·풍습(馮習) 등과 같이 포위 당했다가 조운(趙雲)의 구원을 받아서 벗어났다. 뒤에 제갈량을 쫓아다니며 잘 싸웠는데, 사마의(司馬懿)와의 위수(渭水) 싸움에서 난전(亂箭)을 맞고 물에 떨어져 죽었다.

오부(伍孚) : 후한의 충신. 자는 덕유(德瑜)요, 월기 교위(越騎 校尉)였다. 동탁(董卓)이 폐립을 감행하고 다시 폐제(廢帝)를 시(弑)하는 잔인 무도한 짓을 보고, 조복 속에 단도를 감추어 기회를 노리다, 예궐(詣闕)하는 노상에서 동탁을 만나 찔렀으나 도리어 붙잡혀서 죽음을 당하였다.

오석(吳碩) : 후한의 중신으로 의랑(議郞) 벼슬을 하였는데, 국구(國舅) 동승(董承)과 함께 허전(許田)의 사냥에서 조조의 외람된 행동을 본 후, 황제의 밀조(密詔)를 받아내어 동지를 규합해서 조조를 멸하려 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온 가족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오신(吳信) : 창오군(蒼梧郡)의 태수. 당자는 아무 상관없으나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고, 제갈량의 꾀로 동오(東吳)와 맺으려 할 때, 특사로 온 노숙(魯肅)에게 일부러 창오군의 오신에게 의지하겠다고 하여 그를 충동하였다.

오연(伍延) : 동오(東吳)의 장수.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도독(都督)을 겸해 진(晋)의 진격을 맞아 싸우게 했는데, 각 진이 모두 패하여 달아나는 것을 보고 성을 버리고 동망하다가 진의 복병에게 붙들렸다. 두예(杜預) 앞에 끌려왔으나 '그까짓 위인을 두어서 무슨 소용이 닿겠느냐'고 참해 버렸다.

오의(吳懿) : 서촉 유장(劉璋)의 장수이자, 그의 장인. 유비가 낙성(洛城)을 칠 때, 장임(張任)과 합세하여 장비를 협공하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조운(趙雲)에게 사로잡혀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그의 누이는 유언(劉焉)의 적자인 유모(劉瑁), 그러니까 유장(劉璋)에게는 배다른 형과 약혼한 사이였는데, 그가 요절한 때문에 공규(空閨)를 지키다가, 뒤에 유비(劉備)의 왕비가 되어 유영(劉永)·유리(劉理)의 두 아들을 낳았다. 장군으로서도 역량이 있어 뒤에까지 남아서 활동하였다.

오질(吳質) : 위(魏)의 문사. 오교(吳敎)와 형제.

오찬(吳粲) : 손권의 막하 모사(謀士). 오정(烏程) 사람으로 자는 공휴(孔休). 마음이 인후하고 재학이 있었다. 참군교위(參軍校尉)로 여범(呂範)과 함께 수군을 거느려 위(魏)를 막을 때, 갑작스런 폭풍으로 배들이 뒤집히게 되었었다. 모두 뭍으로 기어오르려는 것을 다른 배는 그냥 있었으나 그의 배에서만이 서둘러 건져 많은 사람을 구해냈었다. 벼슬이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렀는데, 손권이 적자(嫡子)를 버리고 서자(庶子)를 세우려는 것을 극력 반대하다가 붙잡혀 옥에 갇혀 죽음을 당하였다.

오태부인(吳太夫人) : 손권의 어머니. 자매(姉妹)가 함께 손견(孫堅)에게 시집와서는 언니는 손책, 손권을 낳고, 동생은 딸 하나를 낳았을 뿐이건만, 손권은 그를 어머니로 섬기어 한마디도 항거하지 못하였다. 적벽대전 후 형주(荊州)를 차지한 데 애를 태운 주유(周瑜)가 그의 소생인 손권의 누이를 미끼로 정략 결혼을 내걸고 유비를 유인하여 죽일 계교를 세웠으나, 제갈량이 전후의 사정을 요량하여 먼저 오부인에게 알게 함으로써 무사히 혼사를 진행하게 만들었다.

오환촉(烏丸觸) : 유주(幽州)의 자사(刺使)로 있을 때, 원소(袁紹)는 이미 패망하고 조조의 대군이 밀려오자 수하를 불러모아 숙의하고 조조에게 귀순하여 진북장군(鎭北將軍)의 칭호를 얻었다.

올돌골(兀突骨)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반란에 협력한 오과국(烏戈國)의 왕. 등갑군(藤甲軍) 3만 명을 거느려 용맹이 뛰어났었는데, 제갈량은 그의 군대를 반사곡(盤蛇谷) 좁은 골짜기로 끌어들여 앞뒤를 끊고, 버려 두었던 수레와 땅바닥에 장치한 화약의 힘으로 모조리 불태워 죽였다.

옹개(雍 ) : 촉한(蜀漢)에 반기를 들었다. 건녕(建寧)의 태수(太守). 한(漢)의 십방후(什方候) 옹치(雍齒)의 후손.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과 배가 맞아 모반하였다가, 제갈량의 반간계(反間計)에 빠져 수하장수 악환(顎煥)의 손에 죽고, 동지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왕경(王經) : 위(魏)의 충신. 위주(魏主) 조모(曹 )가 사마소(司馬昭)에게 핍박당하여 무모하게 근위병만을 이끌고 이를 친다고 나섰을 때, 일은 찬찬히 도모해야 된다고 간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에 황제에게 문의를 받았던 시중(侍中) 왕침(王沈)과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업(王業)들은 자수(自首)하여 목숨을 보전하자고 하였으나, 이를 물리치고 감연(敢然)히 나아가 가충(賈充)을 꾸짖다가 붙잡혔다. 저자에 끌려나가 죽을 마당에, 늙은 어머니가 잡혀 오는 것을 보고, 머리를 부딪고 통곡했으나, 어머니는 태연히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요, 죽을 일에 죽는 것이 떳떳하지 않느냐'고 도리어 달래며 함께 죽음을 당했다.

왕관(王罐) : 위(魏)의 장수. 사마소(司馬昭)가 폐립(廢立)을 감행한 뒤 등애(鄧艾)를 따라 촉한(蜀漢)과 싸울 때, 계책을 드려 거짓 항복하고 내응 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강유(姜維)에게 역으로 이용당해, 등애는 이 바람에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자신은 반대로 촉한 땅 한중(漢中)으로 들이닥치며, 잔도(棧道)와 관애(關隘)를 불살라 막대한 손해를 주고 흑룡강에 빠져 죽었다.

왕광(王匡) : 위(魏)의 장수. 조조(曹操)를 따라다니며 싸움에 여러 번 출정.

왕구(王垢) : 후한의 장수.

왕기(王 ) : 위(魏)의 장수. 천수태수(天水太守)로 등애(鄧艾)를 따라 촉한을 침공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왕랑(王朗) : 후한의 구신(舊臣). 동해담(東海 ) 땅 사람으로 자는 경흥(景興). 헌제(獻帝) 때 효렴(孝廉)으로 발탁되어 벼슬하였는데,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스스로 황제가 된 뒤에도 그를 섬겨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제갈량의 침공을 맞이하여 하후무(夏候楙)가 대패한 뒤, 당시 이미 76세였으나 조진(曹眞)을 도와 출전하였다가 제갈량과 전장에서 만나 토론하다가, 그의 조리 있는 변설과 의(義)로써 꾸짖는 데 놀라기가 질려 그 자리에서 낙마(落馬)해 죽었다. 낙평향후(樂平鄕侯)에 책봉. 시호는 일성(日成)

왕루(王累) : 익주(益州) 유장(劉璋)의 종사관(從事官). 장로(張魯)의 침입을 앞두고, 장송(張松)·법정(法正)·맹달(孟達) 등이 유비를 불러들이자는 의견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유비의 출병을 마중 나갈 때는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려 간(諫)하다가, 영영 들어지지 않자 스스로 밧줄을 끊어 떨어져 죽었다.

왕방(王方) : 동탁(董卓)의 잔당으로 이몽(李蒙)과 함께 서량태수(西凉太守) 마등(馬騰)을 맞아 싸우다가, 마등의 아들 마초(馬超)에게 이몽과 함께 싱겁게 죽었다.

왕보(王普) : 환관. 조절(曹節)과 함께 청류파(淸流派) 타도에 앞장서서, 2차에 걸친 당고사건(黨錮事件)을 직접 지휘했다. 두무(竇武)·진심(陳審) 등의 환관 주멸 계획에 역 쿠데타를 일으켜 이를 막은 뒤부터 영화를 누렸으나, 뒤에 탄핵을 받고 즉시 옥사했다.

왕보(王甫) : 유비 산하의 장수. 수군사마(水軍司馬)로 관우를 도와 형주(荊州)를 지키고, 여러 모로 헌책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우가 패하였을 때도 줄곧 행동을 같이하다가, 주창(周倉)과 함께 맥성(麥城)을 지키던 중 관우의 죽은 소식을 듣고 성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

왕상(王祥) : 위(魏)의 구신(舊臣). 태위(太尉)의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등애(鄧艾)에 이어 종회(鍾會)가 출정하는 마당에, 모두가 그 위풍을 부러워하건만, 유실(劉實)만이 홀로 미소로 바라보고 있으므로 까닭을 물었더니, 공은 이루되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왕쌍(王雙) : 위(魏)의 대장 조진(曹眞)의 막하 장수. 농서적도( 西狄道) 사람으로 자는 자전(子全). 철태궁(鐵胎弓), 유성추(流星鎚)를 잘 썼다. 제갈량이 재차 위(魏)를 치러 출병하였을 때 조진의 천거로 그의 선봉을 섰었는데, 촉한(蜀漢)의 장수 사웅(謝雄)·공기( 起)를 차례로 베고, 유성추를 던져 장억(張 ) 또한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 승리를 거두고, 소리 없이 후퇴해 가는 제갈량의 군대를 추격하다가 후비를 맡았던 위연(魏延)의 손에 싱겁게 죽었다.

왕수(王修) : 원소(袁紹)의 별가종사(別 從事). 원소의 두 아들 원담(袁潭), 원상(袁尙)이 싸울 때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통하지 않고 원담에게 쫓겨났다. 원담이 남피성(南皮城)에서 패하여 죽었을 때, 금법을 어기어 거상을 입고 통곡하다가 붙들렸으나 꿋꿋이 굽히지 않아 조조는 오히려 그를 중랑장(中郞張)에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왕식(王植) :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보호하여 조조 곁을 떠나갈 때 형양(滎陽)을 지키던 태수. 꾀를 내어 그를 불살라 죽이려 하였으나 탄로나 그의 손에 죽었다. 오관참장(五關參將)의 제 4호.

왕연(王連) : 촉한(蜀漢)의 문신.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문의(文儀). 제갈량의 남만(南蠻) 정벌을 반대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왕위(王威) : 유표(劉表) 막하의 충신. 유표의 작은아들 유종(劉琮)이 형주 땅을 들어 조조에게 항복할 때 틈을 보아 조조를 잡자고 주장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항복하고 난 뒤 유종에게 청주자사(靑州刺使)로 떠나라 할 때도, 다른 수하는 모두 벼슬에 눈이 어두워 주저앉았으나, 그만이 주인의 가족을 보호해 가다가 우금의 추격을 만나서 함께 죽었다.

왕윤(王允) : 후한의 중신. 사도(司徒)의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동탁을 제거하고자 조조(曹操)에게 집안의 보도인 칠성검(七星劍)을 주어 자객으로 보낸 적이 있음. 항시 조정 일을 근심하던 중, 자기 집 가기(歌妓) 초선(貂蟬)의 충성에 감격, 그의 몸을 희생시켜 연환계(連環計)로 동탁(董卓)과 여포(呂布)의 사이를 갈라, 결국 동탁을 죽이는 데 성공하였다. 구신(舊臣)들을 규합하여 이 일을 총지휘할 때, 시중(侍中) 채옹(蔡邕)이 동탁의 지우(知遇)를 입었던 정의(情誼)를 생각하고 곡하였다하여, 죽이기까지 한 것은 너무 박하다고 하더니 결국 자신도 동탁의 잔도들 손에 죽고 집안마저 멸족을 당하였다.

왕입(王立) : 후한의 중신(重臣)으로 시중(侍中) 태사령(太司令)의 직에 있었으나, 천문을 보아 조조의 세력이 커질 것을 예언하였다.

왕자복(王子服) : 후한의 중신(重臣)으로 시랑(侍郞) 벼슬에 있었는데, 허전(許田)의 사냥에서 조조의 외람된 행동을 보고 격분하여, 국구(國舅) 동승(董承)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치려 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붙잡혀 죽었다.

왕준(王濬) : 진(晋)의 대장. 호(湖) 사람으로 자는 사치(士治). 익주자사(益州刺使)로 여러 차례 오(吳)를 치기를 건의하였다 그러다 진주(晋主)의 명을 받고 용양장군(龍讓將軍)으로, 수병을 거느리고 흐름을 따라 내려오다가, 잠혼(岑昏)이 설치한 쇠사슬을 뗏목을 흘려 끊어버리고, 수륙 양로로 진격하니 오군(吳軍)은 이르는 곳마다 항복하였다. 오를 멸한 뒤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에 봉해졌다.

왕찬(王粲) : 유표(劉表) 막하에 있던 식객. 산양 고평(山陽 高平) 사람으로 자는 중선(仲宣). 외모는 보잘것없었으나, 중랑장(中郞張) 채옹(蔡邕)이 극진히 사랑하던 제자로 상객 대우를 받고 있었는데, 유표가 죽은 뒤 형주(荊州)를 바치고 조조에게 항복하기를 극구 권하였다. 그 뒤 관내후(關內侯) 승상연(丞相椽)으로 조조의 막하에 들었다. 시중(侍中)에 고관까지 올라가 끝까지 조조를 위하여 충성하다 병으로 죽었다. 학문이 높고 문사의 묘미가 극치에 이름.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

왕창(王昌) : 위(魏)의 장수.

왕충(王忠) : 조조의 막하 장수. 유비가 서주(徐州)를 차지하자 유대(劉岱)와 함께 명을 받아 이를 쳤으나, 관우의 손에 싱겁게 생포되었다. 유비가 싸움을 확대시키기를 원하지 않는 때였기 때문에, 살려서 잡은 것이요, 또 그런 때문에 살려서 돌려보내 주었다.

왕칙(王則) : 위(魏)의 문사.

왕평(王平) : 촉한(蜀漢)의 대장. 파서 암거(巴西 巖渠) 사람으로 자는 자균(子均). 조조의 밑에서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있었는데, 한중(漢中) 지방의 지리에 밝아 서황(徐晃)을 도와 부선봉이 되어 유비의 군대와 맞섰다. 서황이 배수진(背水陣)을 쳤다가 패하고는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므로 조운(趙雲)의 진에 항복하였다. 제갈량의 남만(南蠻) 정벌에도 부장으로 출전하였고, 평소에 매우 신중하였으므로 제갈량은 제 1차로 기산(祁山)에 출병할 때 마속(馬謖)을 도와서 나아가게 하였던 것인데, 마속은 그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가정(街亭)에서 패하고 말았다. 얼굴도 몸도 못생겼고, 또 글을 몰랐다고 하며, 그런 때문에 모든 문서를 입으로 불러서 꾸몄건만 모두 사리에 맞았다 한다. 전감군(前監軍), 진북장군(鎭北將軍)의 높은 벼슬을 하고 뒤에 병으로 죽었다.

왕필(王弼) 226 ∼ 249년 : 후한 말의 학자. 자는 보사(輔嗣). 고평(高平) 사람.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10세기경에 <노자>에 경도 했다. 뒤에 벼슬하여 조상(曹爽) 밑에 있었으나, 출세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노장학(老莊學)에 심취하여 <노자>, <역(易)>의 주석을 달았다. 청담(淸談)에 있어서는 당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필(王必) : 조조의 수하 장수. 그가 고생하던 시절부터의 부하라, 신임이 두터웠으나, 술을 즐기고 흘게가 늦어 미덥지가 못하였다. 조조가 위왕(魏王)이 된 것을 분히 여긴 경기(耿紀)의 무리들이 각각 가복(家僕)을 거느리고 봉기(蜂起)하였을 때, 어림군(御林軍)을 거느리는 책임자로서 그날도 술을 먹고 있다가 놀라 집으로 말을 달려 도망가던 도중 덮쳐서 죽었다.

왕항(王伉) : 촉한(蜀漢)의 문신(文臣). 영창군(營倉郡)의 태수로 있어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이 반(叛)하였을 때, 이웃 모든 고을이 함께 모반하였건만, 그들의 공격을 받고도 굳게 버티었다. 반란 평정 후 제갈량은 그에게 여개(呂凱)와 함께 익주(益州)의 네 고을을 다스리게 하였다.

왕해(王楷) : 여포(呂布)의 장수. 여러 곳의 싸움에 등장.

왕후(王侯) : 조조 수하의 관량관(管糧官)으로 군사의 식량배급을 맡았다. 원술(袁術)의 수춘성(壽春城)을 칠 때 양식이 딸리게 되자, 조조는 그에게 작은되로 나눠주라고 일러 놓고, 군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목베어 효시 하였다. 작은 아전으로 정책상 간웅(奸雄) 조조에게 억울하게 죽은 한 예다.

요립 : 촉(蜀)의 문사. 자기가 제갈량(諸葛亮) 다음 가는 재주인데 대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자 공명(孔明)이 그를 서인으로 만듦. 제갈량 사후 자기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며 통곡함. 벼슬은 장수교위(張繡校尉).

요화(寥化) ? ~ 264년 : 촉(蜀)의 장수. 양양(襄陽) 사람. 자는 원검(元儉). 본시 산적으로 있다가 관우가 조조의 막하에서 떠나 유비의 가족을 호위하여 나갈 때, 도중에서 가족을 납치한 동지 두원(杜遠)을 죽이고 구순하였다. 관우를 따르려다 이루지 못하더니 뒤에 관우가 형주(荊州)를 차지하였을 때, 홀연히 찾아와 그의 막하에 들어 활약하였다. 뒤에까지 남아 관우의 아들 연배(年輩)들과 함께 위(魏)의 군사를 막아 많은 싸움에 공을 세웠다. 상방곡(上方谷)에서는 단기로 도망하는 사마의(司馬懿)와 마주쳐 그를 쫓았는데, 나무를 싸고도는 것을 찍었다가 칼날이 나무에 박히는 바람에 아까운 기회를 놓쳤고, 그가 버리고 간 황금 투구를 거두어 공을 이뤘다. 그 뒤 계속하여 살아 남은 유일한 구장(舊將)으로서 강유(姜維)와 함께, 전전(轉戰)하며 잘 싸웠는데, 후주(後主)가 위(魏)에 항복하여 결국 촉한(蜀漢)이 망해버리자 집에서 나오지 않고 울분이 터져서 죽었다. 벼슬은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

우금(于禁) ? ∼ 222년 : 조조(曹操) 막하의 용장. 태산 거평(泰山 鉅平) 사람으로 자는 문칙(文則), 조조가 산동의 황건적(黃巾賊)의 잔당을 소탕하였을 때, 수백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수하로 들어왔다. 완성(宛城)에서 쫓길 때 군기를 세우기 위하여 노략질하는 하후돈(夏侯惇)의 청주 군사를 무수히 죽이고도 변명하지 않고 방전에 힘써 장수(張繡)를 멀리 도망가게 하였다 적벽대전 때는 별로 경험도 없었건만 채모(蔡瑁)·장윤(張允)의 뒤를 이어 모개(毛 )와 함께 수군의 총지휘를 맡았다가 크게 패했다. 양양성(襄陽城)에서 관우와 맞섰을 때, 구원 차로 대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는데, 궁지에 빠지자 항복하여 붙잡혀 옥에 갇혀 있다가, 그가 패사(敗死)한 뒤 손권이 보내주어 조조에게로 돌아갔다. 조비(曹丕)는 그에게 조조의 능 관리를 시켰는데 일 국의 대장으로 적에게 항복한 것을 비루 하게 여겨 조조의 공적을 그린 벽화 가운데 그의 항복하는 양을 그려 넣었었기 때문에, 이것을 보고 부끄럼과 노여움으로 병을 얻어서 죽었다. 관직은 호위장군(虎威將軍).

우금(牛金) : 조조(曹操)의 막하인 조인(曹仁)의 수항 맹장. 적벽대전 후 조인(曹仁)이 남군(南郡)을 지킬 때, 뛰어나가 싸우다 포위도 당하였으나, 줄곧 용감하게 싸웠다. 조인은 조조가 남긴 교훈도 잊고 그를 구하러 성을 나왔다가 양군 사이에 난전(亂戰)이 벌어졌던 것이다.

우길(于吉) ? ∼ 200년 : 낭야(瑯 ) 사람으로 강동(江東) 지방에서 숭배를 모으던 도사(道士). 선인(仙人)으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고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술법을 썼으나, 손책(孫策)은 그를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무리라 하여 잡아 죽였다. 그리고는 그의 망령(亡靈)에게 시달리다가 죽었다 한다.

우미(于靡) : 유요(劉繇)의 장수로 손책(孫策)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어 죽음.

우번(虞飜) : 손권 막하의 모사(謀士). 회계 여조(會稽 餘 ) 사람. 자는 중상(中翔). 역리에 깊이 통하고 의술을 겸했으며 박학하여 경(經)을 강의하는데 피곤한 줄 몰랐다. 역(易), 노자(老子), 논어(論語), 국책(國策) 등에 훈주를 달고 이들은 모두 전해짐. 벼슬을 물러나 10여 년간이나 강학(講學)하였는데, 제자가 늘 백 명이 넘었다 하며 병으로 죽었다. 원래 왕랑(王朗)의 부하로, 회계 군리(會稽 郡吏)로 있다가 손권의 부름을 받았고, 명의(名醫) 화타(華陀)를 천거하여 주태(周泰)의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관우가 양양(襄陽)에 출병한 사이 불의에 배후를 쳐서 형주(荊州)를 빼앗았을 때, 자진해 나서 부사인(傅士仁)에게 항복을 권하였고 이어 미방( 芳)마저 항복 받게 되었다. 벼슬은 기도위(騎都尉).

우보(牛輔) : 동탁(董卓)의 사위요, 막하 장수. 동탁이 패한 뒤 5천 병마를 거느리고 반격군의 선봉이 되어 장안(長安)을 노렸으나, 심복으로 믿었던 호적아(胡赤兒)와 금은보화를 꾸려 가지고 도망하다가 그의 손에 죽고 호적아 마저도 여포(呂布)에게 항복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우전(于詮) : 동오(東吳)의 장수.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씨(司馬氏)를 치고자 반기(叛旗)를 들었을 때 구원(救援)차로 파견되었으나, 수춘성(壽春城) 싸움 때 서문으로 짓쳐 들어가다가 위(魏)의 장수 왕기(王基)와 맞부딪쳤다. 왕기는 이긴 끝이라 그에게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싸움터에서 죽는다는 건 남아로서 당연하다'고, 맞붙어 삼십여 합을 싸우다가 난군(亂軍) 중에서 죽었다.

원담(袁潭) ? ∼ 205년 : 원소(袁紹)의 장자. 자는 현사(顯思). 청주자사(淸州刺使)로 있을 당시 서주(徐州)에서 패하여 단신으로 의지해 온 유비를 평소부터 숭배하고 있는 터라 반갑게 맞아들여 아버지에게 의탁해 있게 하였다. 원소가 패한 후 모사 신평(辛評)과 곽도(郭圖)가 그를 도왔다. 아우 원상(袁尙)과 싸우다 지쳐 조조에게 일단 항복하였으나 다시, 평원(平原)에서 또 남피(南皮)에서 항전하다가 조홍(曹洪)의 군대에게 죽었다.

원상(袁尙) : 원소(袁紹)의 셋째 아들. 자는 현보(顯甫). 후처 유씨(劉氏)의 소생으로 유씨가 매양 그의 재덕을 찬양하였고, 원소도 특별히 귀여워했다. 모사 심배(審配)와 봉기(逢起)가 그를 도왔다. 원소가 관도(官渡)에서 대패하고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창정(倉亭)을 반격하였을 때, 제 일 진에서 조조의 장수 사환(史渙)을 쏘아 죽였다. 아비 죽은 뒤 측근에 있어 후계권은 얻었으나, 형 원담(袁潭)과의 싸움으로 날을 보냈고, 멀리 흉노(匈奴)를 의지하고 다시 패하여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를 의지해 갔다가, 조조의 뜻을 상하지 않으려는 정책에 희생되어 공손도의 손에 죽었다.

원소(袁紹) ? ∼ 202년 : 후한의 명문 출신 장수. 여남 여양(汝南 女陽) 사람. 자는 본초(本初). 사대 째나 한나라에 정승한 집안으로 사예 교위(司隸 校尉)로 있을 때, 종제(從弟)인 원술(袁術), 대장군 하진(何進)들과 함께 환관(宦官)의 무리를 무찌르다가 하진이 도리어 죽음을 당하게 되자 무력으로 궐기하여 궁성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이나 되는 환관을 몰살시켰다. 이 기회를 틈타 동탁(董卓)이 겹쳐 들어와 권력을 잡고 횡포하게 굴자, 몇 번 이것을 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조조가 의병을 일으킬 때 발해태수(渤海太守)로서 참전하여 맹주(盟主)로 추대 받았다.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을 치자고 공손찬(公孫瓚)을 꾀어 놓고, 다른 꾀로 기주를 손쉽게 손에 넣자, 공손찬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여러 번 큰 싸움 끝에 그마저 쳐 없애어 성망(聲望)이 하북(河北)에 크게 떨치었다. 조조를 누를 수 있는 가장 실력 있는 존재였으나, 자신 결단성이 부족하고 또 모사들의 사이가 화목치 못하여 백마(白馬)·관도(官渡)·창정(倉亭) 등의 세 번 큰 싸움에 패했다. 후계권을 두고 아들들이 편이 갈려 다투는 가운데 병들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

원술(袁術) ? ∼ 199년 : 남양(南陽)의 태수. 자는 공로(公路). 여남 여양(汝南 汝陽) 사람. 사대 삼공을 낸 명문으로 원소(袁紹)의 종제(從弟)인데 일설에는 친형제라고도 한다. 사소한 일로 서로 불목 하게 지냈다. 회남(淮南) 일대로 영토를 넓히어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으나, 손책을 놓아 보낼 때 전국옥새( 國玉璽)를 손에 넣고는 천자가 될 것을 꿈꾸고 20만 대군을 일으켜 중앙 진출을 꾀하였다. 그러나 한섬(韓暹)·양봉(楊奉) 등 수하 장수의 내응도 곁들여 크게 패하고, 세력을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원소를 의지하려 하였으나, 도중에서 다시 유비한테 패하고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

원외(袁 ) ? ∼ 190년 : 후한의 중신(重臣). 태부(太傅)의 높은 벼슬에 있었는데 동탁(董卓) 토벌의 연합군이 크게 일어나자, 원소·원술과는 같은 일가들 사이라. 혹시 내응 할까 겁내어 동탁은 그를 잡아죽이고 일족까지 깡그리 살해하고 말았다.

원윤(袁胤) : 원술(袁術)의 조카. 원술이 죽자 전국옥새를 가지고 도망치다 서구에게 잡혀 죽음.

원희(袁熙) ? ∼ 207년 : 원소(袁紹)의 둘째 아들. 자는 현역(顯 ). 유주(幽州)를 지키고 있었다. 아비가 패망한 뒤 형 원담(袁潭)이나 아우 원상(袁尙)처럼 후계권을 싸고 싸우지는 않았으나, 여러 번 조조에게 패하고 아우와 함께 흉노(匈奴)에게로, 다시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에게로 의지해 갔으나, 도리어 그의 손에 형제가 같이 죽음을 당하였다. 아내 견씨(甄氏)는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맞아다 아내로 삼았다.

월길(越吉) : 서강(西羌) 국왕 철리길(徹里吉) 막하의 대장. 만부 부당의 용맹이 있어, 이들이 위(魏)에 협력하여 출전하였을 때, 맞아 싸우던 관흥(關興)은 그에게 쫓긴 끝에 낙마하여 위태로웠는데, 아버지 관우(關羽)의 영혼이 현신 하여 그를 넘어뜨리고 관흥이 살아나갈 길을 터 주었다. 뒤에 다시 관흥과 마주쳐 그의 칼에 죽음을 당하였다.

위강(韋康) : 기성(冀城)의 자사(刺使). 본시 마초(馬超)의 수하였는데 마초가 패해 달아났다가 재기하여 농서( 西)를 회복하였을 때, 홀로 항전하였다. 세궁역진(勢窮力盡)한 끝에 참군(參軍)의 충고를 물리치고 항복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을 당했다.

위개(衛凱) : 조조(曹操) 막하의 문신(文臣). 하동 안읍(河東 安邑) 사람으로 자는 백유(伯儒). 재주가 뛰어나 글을 잘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그로 인해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동지들과 함께 조조에게 위왕(魏王)되기를 권하였다. 죽은 뒤 경후(敬侯)의 시호를 받았다.

위관 : 위(魏)의 장수. 사마소(司馬昭) 수하의 감군(監軍)으로 있으면서, 두 차례나 등애(鄧艾)에게 해로운 심부름만 했다. 한번은 성도(成都) 함락 후 그의 벼슬을 낮춘다는 조서(詔書)를 전했고, 또 한 번은 종회(鍾會)의 지령으로 군사를 끌고 가, 그의 부자를 체포하여 낙양(洛陽)으로 압송하다가, 평소부터 등애(鄧艾)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전속(田續)을 시켜 살해했다.

위람(衛覽) : 손권의 막하에서 손권의 아우 손익(孫翊)을 도와 단양(丹陽)의 대도독(大都督)으로 있었다. 사소한 혐의로 상전인 손익을 죽이려고 군승(郡丞) 대원(戴員)과 짜고, 변홍(邊洪)을 시켜 죽이게 하고는 범인을 잡아죽이고 손익의 처 서씨(徐氏)를 손에 넣으려 하였다가, 도리어 계책에 빠져 죽었다.

위막(魏邈) : 동오(東吳)의 장수. 손침(孫 )이 권세를 잡아 폐립(廢立)을 감행하고 새 임금 손휴(孫休)를 또 농락하자, 시삭(施朔)과 함께 고변(告變)하고 노장 정봉(丁奉)을 움직여 잔치를 베풀고는 그 자리에 불러들여서 참하였다.

위속(魏續) : 본시 여포(呂布) 막하에 있다가 조조 수하에 든 장수. 조조가 원술(袁術)을 멸하고 유비를 쫓고, 다시 원소(袁紹)와 백마에서 대결하였을 때, 송헌(宋憲)의 뒤를 이어 안량(顔良)과 겨루었으나 이 역시 그의 칼에 싱겁게 죽었다.

위연(魏延) ? ∼ 234년 : 유비 막하의 용장. 강표 의양(江表 義陽) 사람으로 자는 문장(文長). 본시 유표(劉表)의 장수로 유비가 조조의 침공을 받아 신야(新野)·번성(樊城)을 차례로 빼앗기고 양양(襄陽)에 의지하려 하였을 때, 성문을 열고 그를 맞이하려다가, 이를 막는 문빙(文聘)과 맞부딪쳐 얼마를 싸우다 불리하여 혼자서 장사(長沙)로 태수 한현(韓玄)을 의지해 갔다. 거기서 다시 적벽대전(赤壁大戰) 후 장사를 차지하러 온 유비에게 한현의 목을 베어 바치고 항복하였다. 용맹이 뛰어나고 s장수로서의 역량도 있었으므로 제갈량은 평생 그를 일선에 세워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인격이 비열하여 공을 다투고, 제갈량의 너무 꼼꼼한 군사 행동을 비방하였으며, 유비·손권 등 식견이 있는 이는 누구나 그의 반복무상(反覆無常)함을 경계하였다. 제갈량은 사후, 양의와의 다툼에서 패해 도망치다가 마대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벼슬은 한중태수(漢中太守), 전군사(前軍師),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남정후(南鄭侯).

위홍(衛弘) : 조조(曹操)가 동탁(董卓)을 찌르려다 실패하고 돌아와 의거(義擧)할 때 군자금을 대어준 부호(富豪). 여러 군데 제후를 모아들여, 연합군을 조직하기까지의 비용은 모두 그의 사재에서 나왔다.

위황(韋晃) : 후한의 충신. 사직(司直) 벼슬에 있었는데, 조조가 위왕(魏王)이 되어 황실을 능멸하는 것을 분히 여겨, 경기(耿紀)·김위(金褘) 등 동지와 함께 가복(家僕)을 거느리고 봉기(蜂起)하였다가 일이 낭패되어 붙잡혀서 스스로 얼굴을 땅에 부딪쳐 죽었다.

유괴(劉 ) : 서촉 유장(劉璋) 막하의 장수. 유장이 장로(張魯)를 막으려 유비의 군대를 불러들이자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을 모시고 낙성(洛城)을 지키다가 유비에게 포위를 당하고도 항전하려 하였으나, 자기 편 장수인 장익(張翼)의 손에 죽고 성은 함락되었다.

유기(劉琦) : 유표(劉表)의 큰아들. 계모 채씨와 그의 오라비 채모(蔡瑁)의 시기를 받고 늘 유비를 사모 의지하고, 유비도 그의 보호를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 삼았다. 제갈량의 제의로 강하(江夏)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형주(荊州)를 떠나 아우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할 때에도 벗어났고, 계속 유비를 의지해 있어 명맥을 이어 형주 점령의 구실을 주었었으나 주색이 지나쳐 건강을 해쳐 오래 못 살고 죽었다.

유대(劉岱) ? ∼ 192년 : 후한의 구신(舊臣). 평원(平原) 사람으로 자는 공산(公山). 189년, 동탁(董卓)에게 발탁되어 연주자사( 州刺使)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지에 도착하자 동탁 토벌군에 참여. 흐지부지 와해되자, 트집을 잡아 동군(東郡) 태수 교모(喬瑁)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수하에 넣었다. 나중에 조조 밑에 들어 명을 받아 왕충(王忠)과 함께 서주(徐州)로 유비를 쳤으나, 장비의 꾀에 걸려 일진이 뭉그러지며 그의 손에 간단히 생포되었다. 그러나 조조와의 평화정책상 놓여서 돌아갔으며 192년 4월, 청주(淸州)에서 황건적 백만이 연주에 침입했을 때, 지구전으로 싸우라는 포신(鮑信)의 헌책을 듣지 않고 공격하다가 뒤에 전사하였다.

유도(劉度) : 유비가 형주(荊州)를 손에 넣었을 당시의 영릉군 태수(寧陵郡 太守). 유비가 병합하려 들자, 아들 유연(劉延)의 말을 듣고 대장 형도영(邢道榮)을 시켜 항전하였으나, 장비(張飛)·조운(趙雲) 등의 실력을 당할 길이 없어 이내 항복하였다. 유비는 그를 태수로 두어 민심을 수습케 하였다.

유리(劉理) : 유비(劉備)의 셋째아들. 양왕(梁王)에 책봉됨.

유민(劉敏) : 촉(蜀)의 장수. 편장군(偏將軍)을 지냄.

유반(劉磐) : 유표(劉表)의 조카. 유표가 패한 후 유현(攸縣)에 숨어살았는데, 유비는 형주(荊州)를 차지한 뒤, 황충(黃忠)의 권고로 그를 찾아내어 장사군(長沙郡)의 지배를 맡겼다.

유방(劉放) : 위(魏)의 중신(重臣). 조예(曹叡)가 모황후(毛皇后)를 죽인 뒤 병이 깊어지자, 그와 손자(孫資)를 불러 추밀원(樞密院)의 모든 사무를 부탁하고 태자를 보좌할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더니, 그들은 오래 조진(曹眞)의 은혜를 입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 조상(曹爽)을 천거하여 문무의 전권을 맡게 하였다.

유범(劉範) : 후한의 중신(重臣). 좌중랑장(左中郞張)으로 이각(李 )·곽사(郭 )의 무리가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있을 때, 동지들과 상의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들였다. 서량(西 ) 군사가 도착하여 격전이 벌어졌을 때, 내응 된 것이 발각되어 온 가족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유벽(劉 ) : 여남(汝南) 방면에 나타난 황건적(黃巾賊)의 잔당. 관우가 조조의 명으로 토벌에 나섰을 때, 그에게 의지해 있던 손건(孫乾)을 만나 그의 진력으로 유비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공도( 都)와 함께 무한 호의를 베풀어주어, 다시 만난 유비·관우·장비와 조운은 여남을 발판으로 하여 세력을 폈다. 조조가 원소(袁紹)를 치러 창정(倉亭)에 나간 사이 배후를 습격하였다가 고람(高覽)과 싸워서 죽었다.

유벽(劉壁) : 황건적의 장수. 하의(何儀)·황소(黃邵) 등과 함께 여남(汝南)·영천(潁川)에서 세력을 떨치다가 조조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관도(官渡)에서 조조가 원소(袁紹)와 싸울 때 원소 측으로 전향하여 허도(許都)를 남쪽에서 위협했다.

유보(柳甫) : 위(魏)의 장수. 공손연(公孫淵)의 부하. 항서를 받침.

유복(劉馥) : 조조의 막하 장수. 패국 상현(沛國 相縣) 사람으로 양주자사(楊州刺使)였는데, 조조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하여 뱃머리에서 창을 가로들고 시를 지었는데, 글귀가 불길하다고 탄 하다가, 그 창에 찔려 죽었다. 아들 유희(劉熙)는 아비의 시체를 달래어 고향에 장사지냈다.

유봉(劉封) : 유비의 양자. 원 이름은 구봉(寇封).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모부 유필(劉泌)을 의지하여 번성(樊城)에 가 있다가, 거기서 유비의 눈에 띄어 그의 양자가 되고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 계속 양부를 따라 다녔으나 한중(漢中)을 차지한 후 상용성(上庸城)을 지킬 때, 관우가 형주(荊州)에서 패하여 구원을 청했건만 들어주지 않았던 때문에 아비 손에 죽음을 당하였다. 벼슬은 부군중랑장(副軍中郞張).

유비(劉備) 161 ∼ 223년 : 촉한(蜀漢)의 초대황제. 자는 현덕(玄德). 탁군 누상촌( 郡 樓桑村)에 살았으며 전한 경제(景帝)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 신장이 팔 척이고 손이 무릎까지, 눈은 능히 자기 귀를 볼 수 있었고 성격은 너그럽고 말은 적었다. 기쁨과 노함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며 천하의 호걸들과 친교를 잘 맺었다. 탁월한 식견이 있어 사람을 잘 판독하고 또한 용병에도 밝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고 호협(豪俠)들과 교류하는 한편, 항상 쌍고검(雙股劍)을 차고 다니며, 관우·장비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도당(徒黨)을 모아 그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196년, 원술(袁術)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동장군(鎭東將軍) 의성정후(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나, 조조의 살해 계획에 참가했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했다. 원소의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는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갔다. 이 무렵 삼고지례(三顧之禮)로 제갈량(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를 대파하고는 형주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죽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되었다. 유비는 이 사이 한중(漢中)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가 한헌제(漢獻帝)의 양위(讓位)로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유비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이라 하니, 이른바 삼국의 촉한(蜀漢)이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육손(陸遜)에게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 영안궁에서 제갈량에게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부탁한 후 63세로 죽었다. 잘하면 제2의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꿈꾸었겠지만, 전편에 가끔 나오듯 정해진 운명은 어쩔 수 없었나? 그가 죽은 뒤 제갈량·강유(姜維)가 잘 붙잡았건만 아들 대에 결국 망하고 말았다.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인의(仁義)로 처리한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비육지탄( 肉之嘆)·수어지교(水魚之交) 등의 고사성어에 관련 있는 삼국지 최고의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묘사됨.

유선(劉禪) 207 ∼ 271년 : 촉한(蜀漢)의 2대 황제. 자는 공사(公嗣). 미부인( 夫人)의 소생. 조운(趙雲)이 당양파(當陽坡)에서 품에 품고 달리던 아두(阿斗)가 곧 그다. 무능한 인물로서, 유비가 죽자 대위를 잇고 후주(後主)라 칭해짐. 사람됨이 유약하고 우둔하며 주색에 탐닉했다. 처음에 제갈량(諸葛亮)이 정사를 보필함에 이를 믿고 나라를 크게 다스림. 제갈량에 이어 장완(蔣琬)·비위(費褘)가 보좌하고 있는 동안은 나라가 평안했으나, 그들이 잇달아 죽은 뒤 유선은 환관 황호(黃皓)를 신임하여 국정의 부패를 초래했다. 이어서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성도(成都)가 함락됨으로써 재위 32년(223∼263)에 아비의 반평생 기업을 위(魏)에 바쳐 항복하여 3국 정립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위나라는 유선을 안락현공(安樂縣公)에 봉했는데 그는 이것을 만족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한다. 그 후 중국에서는 그의 아명인 아두가 무능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낙양에서 살다 태강7년에 죽었다.

유선(劉先) : 유표(劉表) 수하의 장수. 유표가 죽은 뒤 채씨의 일당이 되어 형주(荊州)를 지켰으나, 유종(劉琮)이 항복하여 죽고, 조조의 대군이 밀려들어오자 견디지 못할 것을 알고 성밖에 나와 항복하였다.

유섭(兪涉) : 원술(袁術)의 장수. 근왕병(勤王兵) 때 화웅(華雄)에게 죽음.

유순(劉循) : 서촉 유장(劉璋)의 아들. 아비보다는 출중하여 유비의 침공을 받았을 때 자원하여 출전하였으나, 몇 번 싸움에 패하고는 아비와 함께 항복하고 말았다.

유실(劉實) : 위(魏)의 장수. 종회(鍾會)가 촉한(蜀漢)을 치러 출사하는 날, 문무백관이 모두 환송 나와 그의 위풍을 흠모하였으나, 홀로 냉정히 미소를 머금고 바라볼 뿐이었다. 태위(太尉) 왕상(王祥)이 까닭을 물으니 '종회(鍾會)·등애(鄧艾) 두 사람이 촉을 멸망시키되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고 말할 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유심(劉諶) : 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다섯째 아들. 유선에게는 모두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아비를 닮아 변변치 못하고, 유심만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용모가 준수하고 성품이 과단성이 있으며 식견이 탁월함. 아비가 나라를 들어 위(魏)에 항복하려 할제, 맹렬히 간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자 친히 아들 3형제의 목을 베고, 조묘(祖廟)에 가 실컷 울고 이어 스스로 목을 쳐서 자살하였다.

유안(劉安) : 유비가 여포(呂布)에게 패하여 허도(許都)로 조조를 의지해 가던 때 묵은 집주인. 사냥꾼이었는데 유예주(劉豫州)를 대접할 길이 없다고 자기 아내를 죽여서 대접하였다. 조조가 이 얘기를 듣고 그에게 많은 물자를 내림.

유언(劉焉) : 후한의 익주목(益州牧). 강하 경릉(江夏 景陵) 사람으로 자는 군랑(君郞). 노공왕(魯恭王)의 후예로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영제(靈帝) 때에 익주의 목(牧)을 자원했으니, 이는 당시 익주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참위설(讖緯說)에 따른 것이었다. 성도(成都)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 등창이 터져서 죽고 아들 유장(劉璋)은 암우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유비(劉備)에게 내어 주었다.

유연(劉延) : 유비가 형주(荊州)를 손에 넣었을 당시 영릉군(零陵郡) 태수(太守)였던 유도(劉度)의 아들. 유비의 침공을 받고 대장 형도영(邢道榮)과 함께 항전하였으나, 그는 조운(趙雲)의 창을 맞아 죽고 자신도 사로잡혔다가 놓이어 아비를 귀순시킨 공으로 부자 함께 눌러서 영릉군을 지켰다.

유연(劉延) : 조조(曹操) 산하의 동군 태수(東郡 太守). 활주(滑州) 경계에서 관우가 유비 가족을 이끌어 오는 도중을 막으려 하였으나, 관우는 그걸 개의 않고 밀고 나갔다.

유염(劉琰) : 촉한(蜀漢)의 대신. 노국(魯國) 사람. 자는 위석(威碩) 풍류객이어서 사치와 풍악을 즐김. 담론을 잘하고 일의 주선을 잘함. 아내 호씨가 제법 자색이 있었는데, 황후를 뵈러 입궐했다가 눌러 한 달이나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에 꼭 황제와 사통한 줄만 안 그는, 장하의 군사들에게 신발을 벗어 얼굴을 때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법에 어긋난 짓이라고 그는 거리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황실의 위엄은 이렇게 점점 땅에 떨어져간 것이다. 벼슬은 거기장군(車騎將軍).

유엽(劉曄) : 조조(曹操) 막하의 모사(謀士). 회남 성덕(淮南 成德) 사람으로 자는 자양(子陽). 광무 황제(光武 皇帝)의 적파 자손, 고양왕 유연의 후예. 곽가(郭嘉)의 천거로 그의 막하에 들었다. 관도(官渡)의 싸움에서는 원소(袁紹)의 토산 위 시렁을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쳐 부셨는데, 이에 놀란 적은 벽력거(霹靂車)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또 굴자군(掘子軍)이라고, 터널을 파고 들어오는 것을 깊은 도랑을 파서 저지하였다. 여러 차례 싸움에 공을 세우고, 뒤에 벼슬이 대홍로(大鴻 ), 동향후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일경(日景).

유영(劉永) : 유비(劉備)의 둘째 아들. 노왕(魯王)에 봉해짐.

유요(劉繇) : 후한 말의 무장(武將). 동래 모평(東萊 牟平) 사람. 자는 정례(正禮). 한종실 유총(劉寵)의 조카요, 연주( 州) 자사 유대(劉岱)의 아우다. 양주자사(洋酒刺使)로 있었으나 원술(袁術)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곡아(曲阿)로 와 있었는데, 손책(孫策)의 침공을 받아 태사자(太史慈) 등 잘 싸워주었으나 크게 패해 유표(劉表)를 의지해 달아났다. 그 뒤 물러나 예장(豫章)·팽택(澎澤)을 지키다 병으로 죽었다.

유장(劉璋) ? ∼ 219년 : 촉중(蜀中) 서천(西川)의 영주. 경릉(景陵) 사람. 자는 계옥(季玉). 한종실 노(魯)의 공왕(恭王)의 자손나 결국 항복하여 진위장군(鎭威將軍)의 허무한 칭호를 받고 형주(荊州)으로, 익주목(益州牧) 유언(劉焉)의 아들. 유언이 죽은 뒤 주(주)의 세력 있는 아전 조위(趙 ) 등이 받들어 조정에서도 그를 익주목으로 삼았다. 그는 전에 한중(漢中)의 장로(張魯)의 어미와 아우를 죽인 적이 있으므로, 서로 원수의 사이였는데, 조조가 마초(馬超)를 깨친 뒤, 한중(漢中)을 칠 것을 두려워 한 장로가 이번엔 서천을 취하여 세력의 기반을 잡으려 하자, 본시 암우하기로 소문난 그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하 가운데 외부에서 영특한 군주를 맞아들이려는 장송(張松)·법정(法正) 같은 무리가 나오고, 드디어는 유비에게 청하여 그의 군사를 불러들여 자신 멸망의 구렁을 마련한다. 유비도 처음에는 동종간(同宗間)의 우의를 내세웠으나 점차로 영토를 차지하려는 본색을 드러내, 수하의 충신들이 애써 항전하였으로 옮겨졌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뺏은 뒤 익주목(益州牧)을 삼았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유종(劉琮) : 유표(劉表)의 작은아들. 후처 채씨(蔡氏)의 소생으로 아비가 죽은 뒤 외가 일족에게 옹립(擁立)되어 열네 살에 형주의 주인이 되고, 뒤이어 형주의 주인을 삼아 주마는 바람에 조조에게 항복하니 그를 청주자사로 삼고 열후에 책봉했다. 하지만 청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조의 명을 받은 우금(于禁)에게 그와 일족이 모두 멸족 당하였다.

유준(劉峻) : 유표(劉表)의 장수.

유파(劉巴) ? ∼ 222년 : 촉한(蜀漢)의 장수. 영릉 승양(零陵 丞陽) 사람으로 자는 자초(子初). 유표(劉表) 휘하에 있다가 조조의 형주(荊州)공격 때 그에게 항복하여 장사(長沙)·영릉(零陵)·계양(桂陽) 등으로 귀순 권고를 하러 다녔다. 적벽대전 후 유비가 그 3군을 손에 넣자 멀리 안남(安南) 지방으로 망명했다가 유장(劉璋)의 휘하에 들었다. 유비가 형주(荊州)로 조조를 막으러 간다는 핑계로 양식과 군사를 빌려 달라는 것을 주지 못하게 적극 반대하였고, 후에 유장이 항복한 뒤 집에서 나오지 않다가, 유비가 몸소 찾아가 권하는 통에 감복하여 다시 벼슬하게 되었다. 유비가 황제를 칭(稱)하였을 때의 모든 문서와 고명(誥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벼슬은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유표(劉表) 142 ∼ 208년 : 형주(荊州)의 자사(刺使). 자는 경승(景升). 산양 고평(山陽 高平) 사람으로 한실의 종친이기도 하다. 외모는 우아하나 의심이 많고 학식이 풍부하나 결단성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유학자-팔준(八俊)의 한사람-로 알려졌으며, 당고사건 때는 몸을 피하여 위기를 면했다. 그 후 하진(何進)의 속관이 되었다가 형주자사(荊州刺使)에 임명되었다. 당시 형주에는 군소 호족들이 할거하고 회남(淮南) 원술(袁術)도 이곳 진축을 꾀하고 있었다. 무력을 갖지 못한 유표는 그 지방 출신 호족으로 학자로서의 명망도 높던 채모(蔡瑁) 등과 손을 잡고 그들의 협력을 얻어 군소 호족들을 평정하는 동시에 192년에는 원술의 선봉장으로 침공한 손견(孫堅)을 무찔러 반석 같은 기반을 닦았다. 무장군 10만의 수비를 받는 형주는 중원의 전란에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잠정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이름난 유학자들이 난을 피해 모여 왔다. 유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경전의 교정작업 등을 하게 했다. 그러나 조조·원소(袁紹)의 관도(官渡) 싸움 때 케스팅 보우트를 쥐고 있으면서도 우유 부단한 성격으로 망설이고만 있었으므로 천하 웅비의 기회를 놓쳤다. 수하에 연평(延平) 사람 괴량( 良)·괴월( 越)과 양양 사람 채모(蔡瑁)의 여러 장수가 있었다. 손견이 전국옥새( 國玉璽)를 얻고 돌아가는 길을 끊고 격전을 벌여, 내내 강을 사이에 두고 원수가 되었다. 유비가 패하여 의지해 왔을 때 극진히 보호하고 뒷길을 부탁했으나, 그가 죽은 후 부인 채씨 일족은 저의 소생 유종(劉琮)을 세워 조조에게 항복하였다가 멸족을 당하고, 장자 유기(劉琦)는 유비의 보호로 강하(江夏)를 유지하였으나 그나마 오래 살지 못하였다.

유표(劉豹) : 촉(蜀)의 문사.

유필(劉泌) : 유비가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지해 있으며, 신야(新野)에서 조조의 토벌군을 쫓고 번성(樊城)에 들어갔을 때 맞이해 준 그곳 현령(縣令). 그에게 와있던 그의 처조카 구봉(寇封)은 유비의 청으로 양자가 되어 성을 고쳐 유봉(劉封)이라 하였다.

유현(劉賢) : 영릉태수(零陵太守) 유도(劉度)의 아들. 유비(劉備)에게 항복함.

유훈(劉勳) : 오(吳)의 장군.

유회(劉恢) : 대주(代州) 태수. 장비가 행정 감독관인 독우(督郵)를 때림으로써, 정부에서 체포령이 내려지자, 유비의 일행은 일시 그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육개(陸凱) : 동오(東吳)의 중신(重臣).

육경(陸景) : 동오(東吳)의 장수. 진(晋)의 진격을 맞이하여 수로(水路)로 나와 그를 막았는데, 주지(周旨)가 앞질러 강을 건너 불을 지른 것을 멀리 보고, 얼른 물에 올라 달아나려다가 장상(張尙)과 마주쳐 그의 손에 죽었다.

육손(陸遜) 183 ∼ 245년 : 손권 막하의 장수. 오군 오현(吳郡 吳縣) 사람으로 자는 백언(伯言). 소패왕(小覇王) 손책(孫策)의 사위. 병법에 능통했고 기계(奇計)를 잘 썼다. 그는 일족을 이끌고 손권(孫權) 휘하에 들어가 회계산(會稽山)과 파양호(破陽湖)에 근거하던 도적을 무찔러 명성을 얻었다. 219년에는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형주(荊州)에 주둔, 탁월한 전략으로 관우를 무찔러 형주를 오나라의 영유로 삼았다. 그 공으로 진서장군(鎭西將軍)이 되고 누후(누侯)에 봉해졌다. 촉나라의 유비는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긴 일로 곤권에게 원한을 품고 221년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왔다. 이때 육손은 오나라 병권의 책임자로서 이릉(夷陵)에서 맞아 싸웠다. 역전노장(歷戰老將)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침착하게 작전하여, 그의 40여 진지를 불살라 역으로 승리를 이끈 것이 모두 그의 지모에서 나온 것이다. 유비를 추격할 때, 어복포(魚腹脯)에 이르렀을 때는 제갈량이 남긴 돌로 쌓은 팔진도(八陣圖)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을, 가까이 살던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黃承彦)이 그해 주어서 살았다. 이것이 유명한 <이릉(夷陵)의 싸움>으로서 그 결과 육손이 대승했다. 그 후 육손은 보국장군(輔國將軍) 형주목(荊州牧)으로 승진하고 강릉후(江陵侯)가 되었다. 그 뒤에도 계속 형주에 남아 위·촉의 동향을 살피며 손권에 대해 헌책 했다. 손권 역시 내정·외교면 에서 중대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리하여 244년, 형주에 주재한 채로 정승에 임명되는 등 오의 중신으로 군림했다. 이에 앞서 손권은 왕부인(王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손화(孫和)를 태자로 삼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동생 손패(孫覇)를 사랑하여 노왕(魯王)으로 봉하고 태자와 같이 대우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 태자 파와 노왕 파가 대두되어 서로 다툼을 벌였다. 형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육손은 상서를 올려 태자에게 더 비중을 두도록 요구했다. 이에 겁먹은 노왕 파는 21개 군에 달하는 육손의 죄상을 들어 손권에게 제출했다. 이에 손권이 일부러 형주에까지 문책의 사신을 보내자 육손은 분노 끝에 죽고 말았다. 나중에야 손권도 그의 무죄를 알고 후회했다.

육적(陸績) : 손권의 막하 모사(謀士). 자는 공기(公紀). 여섯 살 때 구강(九江)에서 원술(袁術)을 뵈었었는데, 그때 먹으라고 준 귤 세 개를 안 먹고 품에 간직하였다가 물러나려고 인사할 때 떨어뜨렸다. 원술이 '육랑(陸랑)은 왜 그것을 먹지 않고 가지고 있었느냐'고 하였더니 '돌아가 어머님께 드리려 하였습니다'고 하여, 그의 효심을 칭찬 받고, 뒤에 24효에 들어 널리 알려졌다. 이조 중엽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는 이 고사를 두고 읊은 것이다.

육항(陸抗) : 동오(東吳)의 중신(重臣). 자는 유절(幼節). 대사마(大司馬) 형주목(荊州牧)을 지냄. 오주(吳主) 손호(孫皓)가 서자 승상(丞相)이 되었는데, 그가 사치 방탕을 일삼아 백성의 원성이 높으므로, 장문의 상소를 올려 이를 간하였다.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강구(江口)에 둔 치고 있을 때, 당면의 적장인 양호(羊祜)와는 지기(支機)로 사귀었던 때문에, 치라는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벼슬이 깎이어 사마(司馬)로 되었다.

윤대목(尹大目) : 위(魏)의 장수. 조상(曹爽)과 친한 사이라 사마의(司馬懿)의 쿠데타 때 그의 진 사이를 왕래하며 달래어 대장의 인을 순순히 내어놓게 주선하였다. 그러나 늘 원수 갚을 길을 찾더니, 문흠(文欽)이 동병 하여 사마사(司馬師)의 죄를 묻자, 핑계를 만들어 진을 빠져나가 문흠에게 귀띔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윤묵(尹默) : 촉(蜀)의 태사(太師). 자동 낙(洛) 사람. 자는 사잠(思潛). 고학(古學)에 경사(經史)에 통달. 벼슬은 태중태부(太中太夫). 내정에 능했음. 병사.

윤봉(尹奉) : 마초(馬超)가 재기하여 농서( 西)를 차지하였을 때 기성자사(冀城刺使) 위강(韋康)을 항복 받아 죽였는데, 그의 수하였던 장수로서 동지를 규합하여 마초를 쳐서, 결국 발붙일 곳을 잃고 도망가게 만들었다. 관직은 통병교위(統兵校尉).

윤상(尹賞) : 위(魏)의 문사.

윤예(尹豫) : 위(魏)의 장수.

윤직(倫直) : 위(魏)나라 요동 태수(遼東 太守) 공손연(公孫淵)의 충신. 그가 반(叛)하였을 때 극력 사리를 들어 반대하다가 노염을 사 저자에서 베임을 당하였다. 사마의(司馬懿)는 공손연을 멸한 뒤 그와 가범(賈範)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무덤에 봉토 하여 자손을 명예롭게 하여 주었다.

윤해(尹楷) : 위(魏)의 장수.

은규(殷 ) : 요동(遼東)의 성점가(星占家). 조조가 관도(官渡)에서 크게 원소(袁紹)를 무찌르고 황하 가에 머물렀을 때, 지방 고로(古老)들의 말이, 은규라는 이인(異人)이 있어 이러 이렇게 예언하였노라고 하며, 조조의 덕과 앞날을 칭송하였다. 그래 조조는 그들을 우대하고 군기를 엄하게 하여 인심을 얻기에 더욱 힘썼다. 유비가 유표(劉表)를 의지하여 신야에 있을 때, 사마휘(司馬徽)에게 어찌하여 이 지방엔 이렇게 인재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전에 은규라는 천문가가 별이 이곳에 모여 있어 현인이 많이 나리라고 예언하였더라 는 말을 했다.

응소(應邵) : 조조(曹操)의 막하 장수. 태산 태수(泰山 太守)로 명을 받아 낭야(瑯 )로 가 조조의 아비 조숭(曹嵩)을 모셔 오는 길에 도겸(陶謙)의 수하인 장개(張 )에게 일가족을 몰살당하는 정경을 겪고, 주인을 대할 낮이 없어 달아나 원소(袁紹)에게 의지하였다.

이각(李 ) ? ∼ 198년 : 동탁(董卓)의 수하 장수. 북지(北地) 사람. 동탁이 패한 후 잔병을 규합하여 반격할 때, 여포(呂布)와 마주 싸우면 불리할 것을 알고, 앞에서 치다가는 쫓기고, 등뒤에서 일어났다가는 다시 쫓기는 전법으로, 여포를 괴롭히는 가운데 주력을 도성으로 들여보내 점령해버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원술(袁術)을 의지하여 도망하였다. 그래 그들은 황제를 핍박하여 사도(司徒) 왕윤(王允)을 끌어내어 죽이고, 중앙 정부를 휘둘러 횡포를 마음껏 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태위(太尉) 양표(楊彪)·대사농(大司農) 주전(朱鐫)의 이간책(離間策)에 걸려, 곽사(郭 )와 서로 투기하여 싸우다 지쳤을 때, 조조의 대군이 나타나 대항할 길이 없어, 녹림당 강도가 되어 세궁역진(勢窮力盡)하였을 때, 같은 당 단외(段 )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감(李堪) : 서량(西 )의 마초(馬超)군의 장수. 그가 장안(長安) 성을 뺏고 동관(潼關)에서 조조와 오래 대진하게 되었을 때 화친할 것을 권한 것으로 보아 한수(韓遂)의 부하였던 것 같다. 마초·한수가 서로 갈려 싸울 때는 마초를 죽이자는 다섯 장수 틈에 끼었다가 그에게 쫓겨 도망가던 중, 우금(于禁)이 쏜 화살을 마초가 피하는 바람에 그 살을 맞고 죽었다.

이규(李珪) : 유표(劉表) 막하의 중신. 유표가 죽었을 때 채모(蔡瑁)·장윤(張允)이 거짓 유언장(遺言狀)을 만들어 채부인 소생인 유종(劉琮)을 세웠을 때, 정면으로 반대하여 형주 아홉 고을이 네놈들 채가들 손에 망하리라고 부르짖고 죽음을 당하였다.

이낙(李樂) : 이각(李 )·곽사(郭 )의 북새통에 등장한 녹림당(綠林黨) 출신의 장수. 밀조(密詔)를 받아 잠시 어가를 호송하였으나 횡포가 많았다.

이몽(李蒙) : 동탁(董卓)의 잔당으로 장안(長安) 성주에 있다가, 이각(李 )·곽사(郭 )의 무리들이 반격해 오자, 내응 되어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 바람에 여포(呂布)는 멀리 도망가고, 도성을 점령한 일당은 다시 세상을 어지럽혔다. 서량태수(西 太守) 마등(馬騰)을 맞아 싸우다가, 마등의 아들 마초(馬超)에게 동지 왕방(王方)과 함께 싱겁게 죽었다.

이별(李別) : 동탁(董卓)의 수하 장수.

이몽(李蒙) : 여포(呂布)의 수하 장수.

이부(李孚) : 원소(袁紹)의 셋째 아들 원상(袁尙)의 수하 주부(主簿). 기주성(冀州城)이 조조에게 포위되었을 때 조조의 도독(都督)이라 속이고 성에 접근, 지키는 장수 심배(審配)와 상의하여 항전하고, 한때 조조의 말을 쏘아 쓰러뜨리기까지 하였다.

이섬(李暹) : 동탁(董卓)의 장수. 이각(李 )의 조카.

이숙(李肅) ? ∼ 192년 : 동탁(董卓)의 수하 장수. 호분 중랑장(虎賁 中郞張) 벼슬에 있었는데 동향(동향)인 여포를 매수할 계획을 세워 친히 천리준총(千里駿 ) 적토마(赤兎馬)를 끌고 그를 찾아 의부 정원(丁原)을 죽이고 동탁 편에 붙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동탁이 높이 써주지 않아 불평에 잠겼을 때, 한조(漢朝)의 구신(舊臣)들의 부름을 받아 그의 능숙한 구변과 수단으로 동탁을 장안까지 데려다 죽이고 가산을 적몰하는 데 줄곧 앞장서 활동하였다. 동탁 쪽 잔당의 반격에도 잘 싸워 선봉 우보(牛輔)의 예기를 꺾었으나, 안심하였다가 야습을 당해 패한 죄로 여포(呂布)에게 군법 시행을 당해 죽었다.

이승(李勝) : 위(魏)의 무신(武臣).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공소(公昭). 조상(曹爽)에게 붙어 그가 어린 임금 조방(曹芳)을 돌보고 있는 사이, 하남윤(河南尹)으로서 권세를 같이하였다. 그들의 눈의 가시인 사마의(司馬懿)를 찾아 근황을 살폈는데, 그가 귀먹고 바람맞은 척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사마의는 그들이 경계를 풀고 성밖으로 사냥 나간 사이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쥐고 그들 삼형제와 그의 일당을 모조리 처형하였는데, 그 가운데 끼어서 죽었다.

이엄(李嚴) ? ∼ 234년 : 촉한(蜀漢)의 장수. 남양(南陽) 사람. 자는 정방(正方). 먼저 유장(劉璋)의 처남 비관(費觀)의 천거로 면죽관(綿竹關) 수비에 당하였다가, 노장 황충(黃忠)과 싸워 크게 용명을 떨쳤으나 궁지에 몰려 결국 항복하고, 비관도 권하여 항복하게 하였다. 영안성(永安城)에 있어 출정 중인 제갈량의 군량미 조달을 맡았었으나, 여의치 않자 엉터리 통보를 하여 동오(東吳)가 침범하여 온다고 일러 놓고, 후주(後主)에게는 또 제갈량이 까닭 없이 회군했다고 고해 올렸다. 호군한 제갈량은 크게 노해 그를 베려 했으나, 선제(先帝) 유비가 후주를 위탁한 중신(重臣)인 때문에, 벼슬을 깎아 평민을 만들어 내치는 데 그쳤다. 뒤에 제갈량의 죽음을 듣고 슬퍼한 나머지 병이 되어서 죽었다.

이유(李儒) : 동탁(董卓)의 사위이자 그의 제1의 모사(謀士). 간사한 계책을 많이 내었으나 확실히 뛰어나 세상안목이 있었다. 줄곧 동탁의 신변에 있어, 동탁에게 초선(貂蟬)을 여포(呂布)에게 줄 것을 요구하지만 듣지 않자 자기운명을 느꼈다. 동탁이 패하자 저자에서 베임을 당하였다.

이의(李意) : 성도 청성산(成都 靑城山) 서쪽에 숨어살던 도사(道士). 유비가 동오(東吳)를 치기에 앞서 진진(陳震)을 보내 앞길의 길흉(吉凶)을 점치게 하였더니, 그림을 그려서 은근하게 유비가 패해 죽을 것을 예언하였다. 이미 뜻을 굳힌 유비는 그를 미친 늙은이로 돌리고 동병을 강행하였다가 실패를 본 것이다.

이이(李異) : 손권(孫權)의 막하 장수.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 출병하였을 때, 선봉 손환(孫桓)을 돕던 부장. 첫 번 대전에서 관흥(關興)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적(伊籍) : 유비의 막빈(幕賓). 산양(山陽) 사람으로 자는 기백(機伯). 본시 유표(劉表)의 식객으로 유비가 그에게 의지해 있을 때 남다른 호의를 베풀어, 채모(蔡瑁)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를 해치려 할 때마다, 눈치 빠르게 일러주어 그때마다 위기를 모면하게 하여 주었다. 적벽대전 후 유비가 형주(荊州)를 차지하였을 때 마량(馬良)·마속(馬謖)들의 형제를 천거하였다. 유비 아래서 소문장군(昭文將軍)까지 하고 뒤에 병으로 죽었다.

이전(李典) : 조조(曹操) 막하의 용장. 산양 거록(山陽 鉅鹿) 사람으로 자는 만성(曼成). 조조가 처음 진류(陳留)에서 의거(義擧)하였을 때 악진과 함께 맨 먼저 참여하였다. 장수치고는 공부를 많이 하였으며, 조조를 따라 다니며 여러 곳의 싸움에 모두 많은 공을 세웠고, 뒤에 벼슬이 파로장군(破虜將軍)에 이르렀다가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민후(愍侯).

이통(李通) : 조조(曹操)의 막하 장수. 강하 평춘(江夏 平春) 사람으로 자는 문달(文達). 한 때 진위중랑장(鎭威中郞張)까지 지냈으나 낙향해 있다가 조조가 장수(張繡)를 치고 돌아오다 후군의 추격으로 고생할 때 접응해 줌으로써 그의 수하에 들었다. 마초(馬超)가 장안성(長安城)을 함락시키고 동관(潼關)에 닥쳤을 때, 이와 마주 싸우다가 창에 찔려 죽었다. 이 싸움에서는 조조도 수염을 자르고 도망가는 급한 고비를 치뤘다.

이풍(李豊) ? ∼ 254년 : 위(魏)의 충신. 중서령(中書令) 벼슬에 있었는데, 사마의(司馬懿)의 아들 사마사(司馬師)가 황제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분하게 여겨, 황제 조방(曹芳)의 밀조(密詔)를 받아 내어 그를 제거할 것을 도모하다가, 퇴궐하는 길에 우연히 그를 만나 밀조를 빼앗기고 동지 하후현(夏候玄)·장즙(張楫)들과 함께 잡혀 다른 사람에게 누가 미칠 것을 두려워 고의로 악담을 퍼부어 사마사의 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회(李恢) : 촉(蜀)의 문사(文士)이자 장군(將軍). 건녕 유원(建寧 兪元) 사람으로, 자는 덕앙(德昻). 본래 유장(劉璋)의 신하로 장로(張魯)의 침입을 앞두고 유비를 불러들이자는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뒤에 조운(趙雲)의 추천으로 유비에게 귀순하고, 자진하여 마초(馬超)의 진에가 달래어 유비에게 귀순하게 하였다. 제갈량의 출병에는 군량 수송의 중책을 맡았으며, 남만(南蠻) 정벌 때도 뛰어난 공이 있었다. 뒤에 자사(刺使) 벼슬을 하였으며 병으로 죽었다. 말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짐.

이흠(李歆) : 촉한의 대장. 제갈량이 죽은 후 강유(姜維)의 첫 번 출전에, 구안(句安)과 함께 국산(麴山)에 두 개의 성을 쌓고 지켰다. 곽회(郭淮)의 공격을 받은 뒤에 개울의 상류를 끊기어 성안에 물이 떨어지자 혈로(血路)를 뚫고 나와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많은 장병 중에서 혼자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뿐 뒷일은 소상치 않다.

임준(任峻) : 위(魏)의 장수.

[자]

자하선인(慈霞仙人) : 유비가 서촉을 출병하였을 당시 금병산(錦屛山)에 살던 늙은 도사(道士). 이인(異人)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어 유장의 장수들이 그에게 앞일을 물었더니 여덟 귀의 글을 써주었는데, 지난 뒤에 보니 일마다 용하게도 예언이 들어맞았었다.

잠위(岑威) : 위(魏)의 장수. 사마의(司馬懿)를 따라 종군하였다가 촉한의 것을 본떠 만든 목우유마(木牛流馬)를 영도하여 양곡을 수송했는데, 촉장 왕평(王平)의 습격을 받아서 싸우다 죽었다.

잠혼(岑昏) : 동오(東吳)의 환관(宦官)이자 간신(奸臣). 오주(吳主) 손호(孫皓)에게 빌붙어 그의 흉포한 행동에 부채질을 했다. 진(晋)나라 군사의 진격을 앞두고 쇠사슬로 강을 막는 계책을 들었으나, 두예(杜預)는 뗏목으로 모두 끊어 버렸다. 사세가 위급해졌을 때 여러 장수는 손호에게 벌줄 것을 강요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일제히 몰려들어가, 끌어내어 배를 갈라 죽였다.

장각(張角) ? ∼ 184년 : 황건적(黃巾賊)의 난의 지도자. 거록(鉅鹿) 사람. 후한(後漢) 말기의 종교결사로서 후대의 도교(道敎)의 원류의 하나인 태평도(太平道)의 창시자이다. 후한은 순제(順帝) 때부터 내정이 문란해져서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고 세상이 어지러워졌다. 그런 속에서 장각은 주술을 행하고 부적이나 영수(靈水)를 마시게 하여 병을 고친다는 요법으로 민심을 모아 태평도를 일으켰다. 이어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자칭하고 제자를 각지에 파견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대중을 조직화한 후, 184년 한조(漢朝) 타도를 모교로 거병 하였다. 반란군은 새 왕조의 출현을 표방하는 황색 천을 매고 있었으므로 황건(黃巾)이라 불렀고, 장각은 천공장군(天工將軍)이라 칭하여 두 동생 장보(張寶)·장양(張梁)과 함께 농민을 규합했다. 그러나 그 해 병사함으로써, 반란군도 황보숭(皇甫嵩) 등의 군세에 패하고, 장각의 관은 파헤쳐져서 그 목은 낙양(落陽)으로 보내졌다. 조조(曹操)나 유비(劉備)가 모두 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장간(蔣幹) : 조조(曹操)의 막빈(幕賓)으로 자는 자익(子翼). 구강(九江) 사람으로 주유(周瑜)와 동문 수학했던 옛날 정의를 이용하여 그를 꾀이려 파견되었으나, 도리어 그의 월등히 높은 수단에 넘어가 수군의 영솔자 채모(蔡瑁)·장윤(張允) 두 장수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다시 주유의 진을 염탐차 강을 건넜을 때도, 이 역시 주유에게 역이용 당해, 방통(龐統)을 데리고 건너가 연환계(連環計)를 성공시켜, 나아가서는 적벽의 패전을 맛보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뒤에 병으로 죽었다.

장개(張蓋) : 원소(袁紹)의 옛 부하로 조조에게 항복하여, 적벽대전에서는 조조가 패해 달아나는 길에 나타나, 2천 기병으로 그를 옹위했으나 동오(東吳)의 장수 감녕(甘寧)과 부딪쳐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장개(張 ) : 본시 황건적(黃巾賊)의 잔당으로 서주태수(徐州太守) 도겸(陶謙) 아래서 도위(都尉)로 있다가, 조조의 아비 조숭(曹嵩)과 가족 일행을 호위하게 되었는데, 사소한 불평으로 그의 일행을 몰살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도망쳤다. 그로 인해 조조가 원수를 갚겠다고 동병하고 다시 한번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사단을 이루었다.

장굉(張紘) : 손권 막하의 모사(謀士). 광릉(광릉) 사람으로 자는 자강(子綱). 지략이 깊고 문장이 뛰어남. 외교 교섭으로 중앙에 파견되었다가 조조의 수호 사절(修好 使節)로 돌아와 회계 도위(會稽 都尉)로서 내정을 맡아 그를 도왔다. 장소(張昭)와 함께 손권을 도와 참모가 되어, 항상 한 사람이 출정하면 다른 한 사람은 조정을 지켰다. 손권이 부업을 계승하자 도읍을 말릉( 陵)으로 옮기는 계책을 세웠고, 동오로 가서 가족을 데리고 오던 도중에 죽었다.

장기(蔣奇) : 원소(袁紹)의 수하 장수. 관도(官渡)의 싸움에서 조조가 친히 오소(烏巢)의 양식 저장소를 야습할 때 장기의 군대라고 속였고, 돌아오는 길에 정작 장기는 조조의 용장(勇壯) 장요(張遼)의 손에 죽었건만, 거짓 사신을 보내 장기가 오소의 적을 물리쳤다고 원소를 속여 그의 구원병 보낼 길을 막았다.

장기(張旣) : 조조(曹操) 수하. 장안(長安)의 경조윤(京兆尹). 풍익군 고릉(馮翊郡 高陵) 사람으로 자는 덕용(德容). 마초(馬超)를 파한 뒤 하후연(夏後淵)이 천거하여, 함께 장안에 머물러 서촉에 대비하였다.

장남(張南) : 촉한(蜀漢)의 대장.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 출병하였을 때 선봉이 되어 손환(孫桓)의 진영을 엄습하여 공을 세웠다. 오래도록 이릉성(夷陵城)에서 손환(孫桓)을 포위했었는데, 육손(陸遜)의 반격으로 적의 협공(挾攻)을 받아 난군중(亂軍中)에 죽었다.

장남(張南) : 조조(曹操) 막하의 장수. 원소(袁紹)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군대를 거느렸다가 상대가 안될 것을 깨닫고 항복하였다. 조조가 손권을 강상에서 칠 때 적벽대전에 앞서 자진하여 출전하였다가 동오(東吳)의 장수 주태(周泰)의 손에 싱겁게 죽었다.

장달(張達) : 촉(蜀)의 장수. 범강(范彊)과 함께 장비(張飛)를 죽임. 뒤에 오(吳)에 항복했으나 다시 촉으로 넘겨져 장포(張苞)의 손에 원수갚음을 당함.

장당(張當) : 위(魏)의 환관(宦官). 대단한 간신(奸臣)이라 조상(曹爽)이 어린 임금 조방(曹芳)을 보호하여 권세를 잡자, 앞서 조예(曹叡)의 시첩이었던 여성들을 7, 8인이나 골라 그의 저택에 보내 환심을 샀다. 사마의(司馬懿)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 그를 심문한 결과 일당이 모반하려 하였다는 공초(供招)가 나와 조상의 일당은 모조리 처형당하였다.

장도(張稻) : 조비(曹丕)의 총신(寵臣). 조비가 황제가 된 뒤로 맞아들여 귀비를 삼은 곽영(郭永)의 딸이, 조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상의하여 일을 꾸몄다. 그래, 오동나무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황후가 저주(詛呪)한 것이라고 무고하였다. 그로 인해 황후는 죽음을 당하고, 곽씨가 대신 황후가 되었다.

장두(張頭) : 동탁(董卓)의 장수. 이각(李 )·곽사(郭 )의 난리 때 죽음.

장로(張魯) : 한중(漢中)의 영주(領主). 패국 풍현(沛國 豊縣) 사람. 자는 공기(公祺). 조부 장릉(張陵)이 창시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계승하고 도교(道敎)의 교주 격으로 익주목(益州牧) 유언(劉焉)의 명으로 한중을 토벌할 때 오두미도에 입각한 독립국을 세웠다. 부적을 써서 사람을 미혹. 215년, 마초(馬超)가 패주한 뒤 조조가 토벌군을 이끌고 오자 저항하지 않고 투항하려 했으나 동생의 반대로 대항하여 싸워 군사를 움직여 서천을 빻아 기반을 삼고 이에 대비하기를 꾀하였다. 요새인 양평관(陽平關)이 뜻밖에 함락된 뒤 소수 민족지역으로 도망쳐 저항을 계속했으나 마침내 조조의 설득으로 귀순하여 진남장군(鎭南將軍) 낭중후에 봉해졌다. 그의 서촉 침입 때문에 유장(劉璋)은 유비를 불러들여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그 뒤론 산중에 들어가 도교 교주(敎主)로서의 지위만을 부지하였다.

장료(張遼) : 위(魏)의 용장. 안문 마읍(雁門 馬邑) 사람으로, 원래 성은 섭(攝)이고 자는 문원(文遠). 본시 여포(呂布)의 장수로서 정원(丁原), 하진(何進), 동탁(董卓)을 섬기며 동분서주하였으나, 관우와는 전장에서 대하여도 마음이 통하여 서로 아끼었다. 하비성(下 城) 함락 때 붙잡혔으나 버티고 항복하지 않은 것을 유비와 관우가 충의지사(忠義之士)라고 조조에게 간청하여 목숨을 건지고, 그리하여 조조의 막하에 들었다. 관우를 일시나마 조조에게 귀순시켰던 것도 그 은의(恩義)에 대한 보답이었고, 전후 수십 차 출전에 무수한 공을 세웠으며, 동오(東吳)와 대항하여 합비(合 )를 지켰을 때는, 합비를 에워싼 손권(孫權)의 군대를 8백의 돌격대로 격퇴해,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이들이 울음을 그친다고 할만큼 용명을 날리었다. 후에도 자주 손권의 군대를 무찔러 오나라 군사를 두렵게 했다. 무력이 탁월하고 도략이 깊으며 식견이 넓어 어느 일이나 잘 처리 함. 나중에 조비(曹丕)가 대군을 출정할 때 싸움에서 전장군(前將軍)으로 임하던 중, 노장 정봉(丁奉)이 쏜 화살을 맞고 허도(許都)에 돌아가 치료하던 중에 금창(金瘡)이 터져서 죽었다. 시호는 강후(剛侯).

장막(張邈) ? ∼ 195년 : 진류 태수(陳留 太守). 수장(壽張) 사람. 원소(袁紹)·조조(曹操) 등의 친구로서 190년 1월, 반동탁(反董卓) 연합군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 후 원소가 오만해지자 이를 간하다가 미움을 받았다. 원소가 조조에게 장막의 암살을 명했으나 조조가 이를 거절한 것을 알고는 조조에 대한 신뢰를 깊이 했다. 그 후 조조가 봉기할 때 영지를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맹주로 삼았다. 194년, 조조가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진궁(震宮)·장초(張超) 등의 모략을 받아들여 여포(呂布)와 동맹하고 조조를 배반했다. 이듬해 조조에게 패하여 여포와 함께 유비 휘하로 들어가 원소의 구원을 청하러 가는 도중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장무(張茂) : 위(魏)의 충신. 조예(曹叡)가 사치를 일삼고 크게 토목공사를 이룩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머리 풀고 지전 걸고 나와 표를 올리며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 저자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무도한 암군(暗君), 머지 않아 망하리라'고 목숨이 끊길 때까지 소리쳤다고 한다.

장무(張武) : 유비가 형주(荊州) 유표(劉表)에게 의지해 있을 때, 백성을 약탈하고 모반하려던 장수. 유비 일행의 토벌을 받아 조운(趙雲)의 손에 죽었다.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천리준총으로서 유비가 차지했는데, 소위 적로마(赤盧馬)라서 타는 주인에게 해를 끼친다 하더니, 유비는 도리어 그 덕분으로 생명을 건지기까지 하였다.

장비(張飛) ? ∼ 221년 : 촉(蜀)의 무장(武將). 자는 익덕(翼德). 하북성(河北城) 탁군( 郡) 사람. 유비와는 동향이나, 선대의 고향을 따져 연인(燕人) 장익덕으로 통하였다. 유비·관우와 도원 결의한 이래로 계속 고난을 같이하여 용명이 무쌍하였다. 유비나 관우가 독서한 사람으로서 상당한 교양을 쌓은 데 비해, 무식하고 졸직(拙直) 단순한 성격과 인간미로 많은 독자의 공명을 받는다. 술이 과하고 부하에게 혹독하게 대하여 실수가 많았으나,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荊州)에 있던 유비가 조조(曹操)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아주 급박하게 되었을 때 당양 장판(當陽 長坂) 싸움에서 장판교(長坂橋)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하고 일갈하여 조조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이래 용명이 전국에 떨쳤고, 중년 이후는 전술도 제법 원숙하여졌다. 서촉을 취하러 가는 길에는 엄안(嚴顔)을 꾀로 잡아 의로 풀어 주어 귀순시키는 등 큰공을 세워 파서 태수(巴西 太守)가 되었다. 한중 싸움에서는 와구관에서 술에 묻힌 체 위(魏)의 명장 장합(張 )을 유인하여 크게 이겼고, 마초(馬超)와도 좋은 싸움을 벌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 사예교위(司隸校尉)에 임명되었다. 관우가 전사한 뒤로는 거의 광적(狂的)일 만큼 복수심에 불탔는데, 군사를 움직이려는 전날 밤 수하 장수 손에 싱겁게 목숨을 잃었다(55세). 역시 부하에게 심하게 대했던 보답이었는데, 그의 성미가 어찌나 급했던 지는 항간(巷間) 속담에 '장비 군령(軍令)이냐?'는 문자가 통용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들 장포(張苞)는 대를 이어 촉한(蜀漢)의 장수로 활약하다 죽었고 딸은 후주(後主)의 황후가 되었다. 오호장군(五虎將軍)의 한사람으로 시호는 환후(桓侯). 후주 유선(劉禪)의 장인. 벼슬은 거기장군이며 18자나 되는 장팔사모창을 사용.

장상(張象) : 동오(東吳)의 장수. 진(晋)의 침공을 맞이하여 도준(都濬)과 함께 수군을 거느리고 항전했으나, 파도가 높아 운선할 수가 없어 왕준(王濬)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곤 전부(前部)가 되어 석두성(石頭城)으로 나가, 소리쳐 성문을 열게 하고 진군을 이끌고 들어가 항복 받게 하였다.

장서(蔣舒) : 촉한(蜀漢)의 대장. 제갈량이 죽은 뒤 강유(姜維)의 추천으로 군대의 조련과 지휘를 맡았는데, 뒤에 종회(鍾會)가 진공해 왔을 때 부첨(傅僉)과 함께 양평관(陽平關)을 지키다가 그가 싸우러 나간 사이, 위(魏)에 항복하여 부첨은 용감하게 싸우다 죽고 관은 쉽게 함락되었다.

장소(張昭) 156 ∼ 236년 : 손권의 모사(謀士)로 오(吳)의 건국공신. 팽성(彭城) 사람으로 자는 자포(子布). 어려서부터 박식하기로 이름나 서주자사(徐州刺使) 도겸(陶謙)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하여 감금된 일이 있다. 그 뒤 황건적의 난을 피해 강남(江南)으로 이주했다가 197년에, 손책이 원술(袁術)에게서 돌아올 때 주유(周瑜)의 추천으로 그의 막하에 들어 무군중랑장(撫軍中郞張)이 되었다. 200년, 손책의 유촉(遺囑)을 받은 그는 비탄에 잠긴 손권을 꾸짖어 상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게 하고 전군을 순찰시켰다. 그후 주유 등과 협력하여 젊은 손권을 잘 보좌했다. <춘추좌씨전해(春秋左氏傳解)>, <논어주(論語注)> 등의 명저를 저술하기도 했다. 본시 문신이라 사람됨이 소심하고 침착하여, 적벽대전을 앞두고는 사리를 들어 신중론으로 조조에게 항복하기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였으나, 매양 소극적인 입장에 서서 경솔한 정책을 간하였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되찾고자 출병하려 하였을 때는 유장(劉璋)과 장로(張魯)에게 동시에 사신을 보내 유비를 고립시키는 꾀를 내었다. 바른말을 잘하여 손권도 그를 높이어 장공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다. 관직은 보오장군(輔吳將軍). 죽은 후 문후(文侯)라 시호하였다.

장송(張松) ? ∼ 212년 : 익주(益州) 유장(劉璋)의 수하 별가(別 ). 자는 영년(永年). 성도(成都) 사람으로 되빡 이마에다 납작코, 버드렁니에 키는 다섯 자도 못 되고 목소리는 종을 깨뜨리는 것 같았다. 사정을 기민하게 살피는 데 능했고 변술 에도 능하고 박학다식함. 기억력이 강함. 주인 되는 유장이 암약하여 익주를 부지 못할 것을 알고 달리 영웅을 불러들여 나라를 내어 줄 계책을 세우고, 마초(馬超)가 패하자 한중(漢中)을 칠 것을 권고하러 조조를 찾았으나 대접이 소홀한 데 분하여 실컷 그를 농락하고 그곳을 떠났다. 유비는 그가 돌아가는 도중 맞아들여 빈객으로 대한 결과, 장송은 감격하여서 서천 지도를 바치고 안에 있어 협력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또, 유장에게 냉대를 받던 법정(法正)과도 친교를 맺었다. 211년, 한중(漢中)의 장노(張魯) 토벌에 나선 조조에 대한 대비책으로 유비와 함께 한중을 치도록 유장에게 진언하고 그 사신으로 법정을 추천했다. 맹덕신서(孟德新書), 양수(楊修)와 관련이 있는 인물. 서촉에 출병하였던 유비가 방통(龐統)의 계책으로 회군하여 형주(荊州)로 돌아간다는 소문을 곧이 듣고 그에게 계략을 이르는 편지를 썼다가, 그것이 친형 장숙(張肅)의 손에 들어가 그로 인해 온 가족과 함께 도륙을 당하였다.

장수(張繡) : 동탁(董卓)의 잔당인 장제(張濟)의 형의 아들. 자는 무위(武威). 양주(楊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변장(邊章)·한수(韓遂)의 군사를 무찔러 이름을 날렸다. 장제가 죽은 뒤 그 군대를 인계 받아 모사(謀士) 가후(賈 )와 계교를 써서 완성(宛城)에 진을 치고 허도(許都)를 엄습하려 하였을 때, 역시 가후의 주선으로 화의를 성립시켰으나 조조가 자기의 숙모-장제(張濟)의 처 추씨-를 데리고 자는 틈을 야습하여 일진을 크게 파하여 전위(典韋)와 조조의 장남 조앙(趙昻)을 죽이고 계속 추격하다가 우금(于禁)의 항전에 배기지 못하여 유표(劉表)를 의지해 달아났다. 거기서 다시 재기하여 유표(劉表)와 협공(挾攻)의 계를 짜고 가후의 계교로 조조의 토벌군을 반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178년 5월에 조조군에게 패했다. 다시 이듬해 11월, 관도(官渡)의 싸움 때 조조가 유엽(劉曄)을 보내어 권하는 바람에 모사 가후의 진언에 따라 조조 휘하에 들어가 큰공을 세워 파강장군(破羌將軍)이 되었다. 뒤에 오나라를 정복하다가 도중에 죽음. 또는 자살 설도 있다. 시호는 정후(定侯).

장숙(張肅) : 서천 유장(劉璋)의 부하 관원. 장송의 형. 장송과는 달리 풍채가 좋아 조조로부터 광한 태수(廣漢 太守)에 임명되었다. 아우를 찾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유비의 내응이 되려는 계책을 쓴 편지를 입수하고 주인에게 고발하여 아우의 전 가족은 이 때문에 살육을 당하였다.

장승(張承) : 오(吳)의 장수.

장억(張 ) : 촉한(蜀漢)의 장수. 파서(巴西) 남충국(南充國) 사람으로 자는 백기(伯妓). 사람됨이 강개하고 충성되어, 제갈량이 제2차로 위(魏)를 칠 때는 적의 장수 왕쌍(王雙)과 싸우다 유성추(流星鎚)를 등에 맞아 피를 토하며 돌아왔으나, 이내 다시 종군하여 각지로 전전하였다. 뒤에 강유(姜維)가 단곡(斷谷)에서 등애(鄧艾)에게 퇴로를 끊겨 고전할 때 나타나 그의 위급을 구해 주었으나, 자신은 난전(亂箭)에 맞아 죽었다.

장연(張燕) : 황건적의 일파인 흑산적(黑山賊)의 지도자. 진평(眞平) 사람. 원래의 성은 저(猪)였으나 동료인 장우각(張牛角)이 죽은 뒤 장씨로 고쳤다. 황하 이북에서 맹위를 떨쳐 한때 그 휘하에 백만 군사를 거느렸다. 후에 영제(靈帝)에게 귀순하여 벼슬했으나 동탁(董卓)의 장안(長安) 천도 후에 다시 독립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공손찬(公孫瓚)을 돕다가 원소(袁紹)에게 패하고, 조조에게 흑산(黑山)의 도적 10만을 거느리고 항복하여 업(業)에 들어가 벼슬했다.

장영(張英) : 유요(劉繇)의 부하로 손책(孫策)과의 싸움에서 죽음.

장온(張溫) : 후한의 중신. 조등(曹騰)의 천거로 출세한 인재의 한 사람이다. 황건적 토벌군 사령과 주전(朱鐫)의 경질을 영제(靈帝)에게 상서하여 철회시키고, 184년 말 양주(楊州)에서 변장(邊將)·한수(韓遂)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동탁의 작용으로 반란군을 미양(美陽)에서 격파했는데, 이를 추격한 6개군 중 5개 군이 패하고 동탁의 군사만이 무사히 귀순했다. 그 후 명령 위반으로 동탁의 처형을 주장하는 손견(孫堅)의 진언을 물리쳤으나, 장안(長安) 천도 후 동탁에게 살해되었다.

장온(張溫) : 손권의 막하 모사(謀士). 오군 오현(吳郡 吳縣) 사람으로 자는 혜서(惠恕). 글을 잘하고 언변이 뛰어나, 촉한(蜀漢)과의 사이를 왕래하며 양국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손권의 신임이 두터워 벼슬이 태자태부(太子太傅)에까지 올랐고 촉에 사신으로가 진복(秦宓)과 천하를 논함. 하지만 손권이 촉의 정치를 찬양하는 데 기분을 상하고, 또 명성이 너무 떨치는 것을 꺼려, 이를 빙자하여 죄를 주어 조정에서 쫓았다. 뒤에 병으로 죽었다.

장완(蔣琬) ? ∼ 245년 : 촉한(蜀漢)의 중신(重臣). 영릉 상향(永陵 상향) 사람으로 자는 공담(公 ). 형주(荊州)의 양양(襄陽) 일대의 명사로 제갈량은 그를 기용하여 내무를 맡겼으며, 제갈량의 출전중 성도(成都)에 머물면서 원정군의 식량 보급과 군사 조달에 만전을 기해 제갈량으로부터 '나의 오른팔'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제갈량과 같은 위엄은 갖지 못했으나, 침착한 집무 태도로 승상이 되어 제갈량이 없는 촉의 동요를 막고 피폐된 국력회복에 전력했으나, 병이 들어 전권을 비위(費褘)에게 넘겨주고 죽고 말았다. 벼슬은 참군(參軍). 안양정후(安陽亭侯)에 이름. 시호는 공후(恭侯).

장위(張衛) : 한중(漢中) 장로(張魯)의 장수이자 그의 아우. 조조의 침공을 받았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이를 막아 싸웠으며, 마지막으로 초토작전(焦土作戰)을 써서 항전하기를 권하였으나 들어지지 않았고, 허저(許 )와 맞싸우다 그의 칼에 죽었다. 장로도 이내 전의를 잃어 창고를 봉하고 항복해 버렸다.

장윤(張允) : 유표(劉表) 수하의 장수. 유표의 후처 채씨 소생의 작은아들 유종(劉琮)의 편을 들어 채모(蔡瑁)와 함께 갖은 책략을 다하였으며, 조조에게 항복하였을 때, 조조는 그들의 아첨하는 태도와 경솔함이 싫어서 죽이고 싶었으나 잠시 수하에 두고 적벽(赤壁)에서 채모와 함께 수군대도독을 맡겼다. 오(吳)의 장수 주유(周瑜)가 친히 조조군의 진영을 둘러보다 장윤의 유능함을 보고 오나라에 위협이 되리란 것을 알고 염탐차로 온 조조의 빈객(賓客) 장간(蔣幹)을 계교로 속여 조조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하였다. 수전(水戰)에 무척 능함.

장의(張疑) : 촉(蜀)의 장군. 제갈량(諸葛亮)을 따라 중원정벌에 공을 세움. 공명사후(孔明死後) 강유(姜維)와 중원을 치다가 죽음.

장의거(蔣義渠) : 원소(袁紹) 막하의 장수. 원소가 관도(官渡)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왔을 때, 여양(黎陽)군에서 그를 맞아 잔병을 수습하여 그를 도왔다. 후에 조조(曹操)에 항복.

장익(張翼) : 유비(劉備)의 중수. 건위 무양( 爲 武揚) 사람. 자는 백공(伯恭).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의 명장이었으나 낙성(洛城)에서 유비에게 포위 당하자, 항전하려는 유괴(劉 )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제갈량의 남만(南蠻) 정벌에 부장으로 출전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강유와 함께 대장군이 되어 항상 같이 다니며 싸웠는데, 뒤에 종회(鍾會)의 군사가 성도(成都)를 뺏으러 왔을 때 이를 맞아 싸우다 난군(亂軍) 중에서 죽었다. 군사를 잘 거느리고 견식 또한 탁월.

장임(張任) :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 장수. 유장이 장로(張魯)를 막고자 유비를 불러들이려 할 때 극력 반대하였다. 방통(龐統)이 유현덕과의 첫 대면 연회에서 위연(魏延)을 시켜 칼춤을 추게 하고 기회를 보아 유장을 죽이려 하였을 때, 마주 나가 춤추며 주인을 감싸 돌았다. 유비가 부관( 關)을 손에 넣고 낙성(洛城)을 치러 나왔을 때는 성 동편 작은 길을 막고 화살을 마구 쏘아 내려, 방통을 낙봉파(落鳳坡)에서 죽게 했다. 낙성을 지키다가 제갈량의 꾀에 빠져 사로잡혔으나, 의(義)를 내세워 굴하지 않았으며 제갈량도 굳이 권하지 않고 죽음을 내려 그의 의로운 이름에 흠이 가지 않게 하였다.

장저(張著) : 촉(蜀)의 장수. 한중(漢中)싸움에서 조운(趙雲)의 아장(牙將)으로 활약함.

장절(張節) : 위(魏)의 구신(舊臣).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있으면서, 사마염(司馬炎)이 황제위를 뺏으려는 것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장제(張悌) : 동오(東吳)의 대장. 오(吳)가 망할 때 승상으로 진(晋)의 침공을 받았는데, 몇 번 항전에 실패하자 도망하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미구에 망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마는 국난을 당하여 어찌 안연히 있겠느냐'고 나가 싸우다 난군중에서 죽었다. 진제(晋帝)는 그 자손에게 봉작을 내렸다.

장제(張濟) : 동탁(董卓)의 수하 장수. 이각(李 )·곽사(郭 )와 같은 당으로 동탁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 하에 장안(長安)에 들어와 횡포가 심하였다. 이각·곽사의 난리 후 장안에서 군사를 모아 형주(荊州)·양성(穰城)을 치다가 화살을 맞아 죽었다. 그의 아내 추씨(鄒氏)는 마침 완성(宛城)에 있을 때, 장수(張繡)를 치러 왔던 조조를 잠자리에 모시게 되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밤 야습으로 조조는 크게 패하여 씻지 못할 오점을 남겼다.

장제(蔣濟) : 조조 막하의 모신(謀臣). 자는 자통(子通).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승상부(丞相府)의 주부(主簿)로 있었는데, 관우가 양양(襄陽)에서 조조군을 깨치고 위엄을 떨쳤을 때, 동오(東吳)와 손을 잡아 화의 하여 그의 배후를 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뒤에 태위(太尉)의 높은 자리에 올라 사마의를 위해 조상(曹爽)이 모반한다는 표문을 닦아 올렸다.

장즙(張楫) : 위(魏)의 척신(戚臣)이자 충신. 조방(曹芳)의 장인. 광록대부(光祿大夫)였는데 사마의(司馬懿)의 아들 사마사(司馬師)가 황제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분하게 여겨, 황제의 밀조(密詔)를 받아 내여 그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다가, 퇴궐(退闕)하는 길에 유연히 그와 마주쳐 밀조를 빼앗기고 동지 하후현(夏候현)·이풍(李豊) 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장특(張特) : 위(魏)의 장수. 사마사(司馬師)를 도와 동오(東吳)를 쳤을 때 그를 도와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제갈각(諸葛恪)이 성을 세운 지 석 달이나 되도록 잘 버티었다. 나중에는 호적(戶籍)과 장부(帳簿)를 바치며, 며칠만 더 참으면 아주 항복하마고 속여놓고, 일신(一新)하게 전비를 갖추어 다시 대항하였다. 성중에서 쏘아붙인 살에 제갈각도 부상하여 패군을 이끌고 물러났으며 돌아가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장패(藏 ) : 위(魏)의 장수. 태산 화음(泰山 華陰) 사람. 자는 선고(宣高). 처음에 여포(呂布) 막하에 장수로 있었으나 여포가 하비(下 )에서 패하자 항복하여 조조의 사람이 되었다. 뒤에 적벽대전을 앞두고 서서(徐庶)가 농서( 西)를 지키겠다고 핑계하고 떠날 때 같이 갔다. 관직은 집금오(執金吾). 시호는 공후(恭侯).

장포(張布) : 동오(東吳)의 권신(權臣) : 오주(吳主) 손휴(孫休)가 죽을 때 아들 손완(孫完)을 가리키며 숨을 거뒸건만, 아직 어리다는 구실로 오정후(吳程侯) 손호(孫皓)를 세워 황제를 삼았다. 그런데 손호가 날이 갈수록 주색에만 파묻히고 행동이 난폭하므로, 여러 차례 간하였다가 노염을 사 삼족이 함께 멸망을 당하였다.

장포(張苞) : 촉한(蜀漢)의 대장 장비의 아들. 관흥과 같이 제갈양의 총애가 컸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일찍 죽었다.

장합(張 ) : 위(魏)의 용장. 자는 준문(雋文). 하간군 정현(河間郡 鄭縣) 사람. 본시 한복(韓馥) 휘하에 있었으나 그가 죽은 뒤 원소(袁紹)에게 투항하여 그의 공손찬(公孫瓚) 격멸에 큰공을 세웠다. 관도(官渡)의 싸움 중에 곽도(郭圖)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오래 있기 어렵게 되자, 고람(高覽)과 함께 조조에게 항복하여 중용(重用)되었다. 당양파(當陽坡) 싸움에서는 조운(趙雲)이 아두(阿斗)를 품에 품고 달려나오는 것을 만나 싸웠으나, 쫓기던 조운이 말과 함께 굴청에 빠졌다가 붉은 기운과 함께 솟구쳐 나와 달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후세 사람들은 아두가 뒤에 황제가 될 복운(福運)이라고들 하였다. 215년, 한중(漢中)의 장노(張魯) 토벌에 선봉대의 역할을 하고 하후연(夏後淵)과 함께 한중을 수비했으나, 217년 유비(劉備)·법정(法正)에게 패하여 한중을 잃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231년, 사마의(司馬懿)가 총대장으로 부임하자 그와 의견이 자주 충돌했다. 그 해 제갈량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사마의(司馬懿)의 선봉이 되어 출전하였을 때는, 위기에 빠진 대릉(戴陵)을 단기로 달려들어 건져내었다. 이때 용맹을 본 제갈량은 그를 없애야겠다고 마음먹게 되고, 결국 목문도(木門道) 깊이 유인해 들여 쇠뇌를 퍼부어 죽게 하였다. 관직은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

장호(張虎) : 위(魏)의 장수. 용장 장료(張遼)의 아들로서 조진(曹眞)의 군대의 선봉이 되어 기산(祁山)에서 제갈량의 재차 침공을 맞아 싸웠을 때, 포위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강유(姜維)의 침입을 막고자 여러 번 출정.

장화(張華) : 진(晋)의 중신. 비서승상(秘書丞相)으로 진주(晋主) 사마염(司馬炎)이 동오(東吳)의 어지러운 틈을 타 공략하자는 건의를 받고 망설이고 있을 대 함께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을 쓸며 그를 권하여, 동오 정벌의 단안을 내리도록 하였다.

장횡(張橫) : 마등(馬騰)의 수하장수. 조조(曹操)와의 싸움에 출정.

장훈(張勳) : 원술(袁術) 산하의 대장군.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7로의 군사를 동원하여 중원(中原)을 도모하려 할 때, 전군을 통솔하였으나 한섬(韓暹)·양봉(楊奉)의 배반으로 허무하게 뭉그러졌다.

장휴(張休) : 오(吳)의 참군. 장소(張昭)의 아들로 손권(孫權)의 태자(太子) 손등(孫登)의 보필을 맡음.

장흠(將欽) : 오(吳)의 장수. 구강 수춘(九江 壽春) 사람으로 자는 공혁(公奕). 난세를 당하여 손책(孫策)이 유요(劉繇)를 칠 때 도와주고 그의 막하에 들어 별부 사마(別部 司馬)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무예가 과인하고 특히 수군을 통솔하는 데 뛰어나 벼슬이 탕구장군( 寇將軍)에 이르렀으며 유비가 손부인을 데리고 가는 행차를 추격하다 실패한 일도 있다. 수군을 이끌고 면환(沔還)으로 진공하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죽었다.

저수(沮授) : 원소(袁紹)의 모사(謀士). 광평(廣平) 사람. 그가 조조와 대결하려 할 때 반대하였다가 노염을 사 진중에 감금되었을 때, 천문을 보아 적의 야습을 알고 대책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 싸움에서 대패하여 달아나다가 조조에게 붙잡혔으나 항복하기를 거절했으나 후대 받음. 원(袁)씨를 복귀시키려고 모의하다 발각되어 말을 훔쳐 타고 도망하려다 붙잡혀 죽었다.

저혹(沮或) : 저수(沮授)의 아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원(袁)씨를 도와 싸우다 죽음.

전만(典滿) : 위(魏)의 장수. 전위(典韋)의 아들. 전위 사후(死後) 여러 번 출정.

전속(全續) : 위(魏)의 장수 등애(鄧艾)의 부장이었는데 그가 성도(成都)를 칠 때 강유성(江油城)을 뺏고 부성( 城)으로 짓쳐 나가려 드는 것을 간(諫)하였다가, 노염을 사 죽게 되었었는데 여러 장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런 일이 있은 때문에 위관(衛瓘)은 낙양(落陽)으로 호송 중인 등애를 그에게 죽이게 하였다.

전속(全續) : 오(吳)의 장수. 전종(全琮)의 둘째 아들.

전위(典韋) : 조조 수하의 용장. 진류 파병(陳留 巴兵) 사람. 악래(惡來)라는 별호가 있다. 팔의 힘이 과인 하여 80근이나 되는 양지(兩枝) 쌍철극(雙鐵戟)을 잘 씀. 사냥을 일삼던 천하장사로 원래 장막(張邈)의 휘하에 있었으나, 장막의 다른 부하와 다툼이 생겨 한 주먹에 때려죽이고 산 속에 숨어 지내던 중 하후돈(夏侯惇)이 천거하였다. 항상 조조(曹操)의 측근에서 시위했으며 정벌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움. 복양( 陽)에서 여포(呂布)에게 쫓겨 곤경에 빠졌을 때 잘 막아 싸웠다. 조조가 완성(宛城)에서 동탁(董卓) 잔당 장수(張繡)와 화의하고, 그의 숙모를 데리고 묵는 동안, 줄곧 호위하다 장수·가후(賈 )의 모략에 빠져 조조를 보호하다가 수십 군데 상처를 입고 죽었다. 허저(許 )와 함께 호위군(虎位軍)을 이룸.

전위(全韋) : 동오(東吳)의 장수. 위(魏)의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씨(司馬氏)의 죄를 물어 반기를 들었을 때, 동오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도왔는데, 수춘성(壽春城) 안에 있는 오(吳)와 제갈탄의 연합군을 돕고자 입성하려 했으나, 사마소(司馬昭)의 포위군이 길을 터주지 않아 부득이 그들에게 항복하고 만다. 그리곤 명을 받아 수비군에게 글을 써 성중에 쏘아 보내, 전역(全 )·전단(全端) 등 오나라 장수들을 항복하게 하였다. 전종(全琮) : 동오(東吳)의 장수. 사마의(司馬懿)의 남침을 받았을 때, 위진(魏陳)의 후방을 습격하고 설교(薛喬)의 진영을 공격하여 적을 혼란에 몰아 넣었다. 위(魏)의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씨(司馬氏)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동오의 군대를 이끌고 이를 도우러 나갔다. 그러나 수춘성(壽春城)에 이르다가 사마소(司馬昭)의 포위군에게 패하여 항복했다.

전주(田疇) : 원래 원소(袁紹)의 부하였으나, 조조가 원소를 멸하고 멀리 사막지대까지 원정을 하였을 때 조조에게 기용되어, 노룡구(盧龍口)에서 백단(白檀)의 산길을 넘어 무인지경을 거쳐 유성(柳城)을 칠 것을 건의, 이것이 채용되어, 일이 성공되자 정북장군(靖北將軍) 유정후(柳亭侯)를 봉하려 하였으나, 군신의 의에 벗어나 도망친 자로서, 은혜로 살았으면 됐지 영예를 받기는 죽어도 싫다고 하여 조조도 그의 의를 장히 여겨 의랑(議郞)을 시키는 데 그쳤다. 후에 계속 요동부근을 지킴.

전풍(田豊) : 원소(袁紹)의 별가(別 ). 거록(鉅鹿) 사람. 자는 원호(元皓). 조조와의 관도대전(官渡大戰) 때 저수(沮授)와 같이 지구전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전투 준비에 분망하고 있던 조조가 원소(袁紹)와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킨 유비를 공격할 때, 그 배후를 치도록 건의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소가 남진(南進)을 개시하기 직전에도 다시 간언 했다가 옥에 갇혔다. 원소의 패배가 결정적으로 확실해지자 다른 이의 참소에 의해 저자에서 베임을 다하였다.

정건(鄭虔) : 서촉 유장(劉璋)의 수하 종사(從事). 유비의 침공을 당하여 초토작전(焦土作戰)으로 그를 곤경에 몰아넣고 치려는 계책을 제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관(丁管) : 상서(尙書) 벼슬로 있으면서 동탁(董卓)이 폐립(廢立)하는 자리에서 만조백관이 모두 숙연할 때 감히 상아(象牙) 홀(笏)을 들어 치며 호령하여 충의를 빛내었다. 물론 동탁의 손에 죽었다.

정기(程畿) : 촉한(蜀漢)의 장군.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출병하였을 때 모사(謀士)로 종군하였다. 육손(陸遜)의 반격으로 쫓기게 되었을 때 끝까지 수군을 지휘하다가, 포위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목베어 죽었다.

정무(程武) : 위(魏)의 모사. 정욱(程昱)의 아들. 지략과 병법에 능함. 제갈량(諸葛亮)의 제1차 정벌에서 조운(趙雲)을 곤경에 빠뜨리게 함.

정문(鄭文) : 위(魏)의 장수로, 제갈량과의 위수(渭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사마의(司馬懿)의 명을 받아 거짓 항복하고, 충성을 보이려 추격군의 대장 진랑(秦朗)을 죽였으나, 기실 진랑이 아니라 그의 아우 진명(秦明)이었다. 이것은 간파(看破)한 제갈량의 명령을 어길 길 없어, 사마의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유인해 냈고, 제갈량은 사마의를 대파한 뒤 그를 잡아내어 죽였다.

정밀(丁謐) : 위(魏)의 문신. 패국(沛國) 사람으로 자는 언정(彦靖). 조상(曹爽)에게 붙어, 그가 어린 임금 조방(曹芳)을 돌보고 있는 사이 상서(尙書)의 높은 자리에 있어 호강을 하였으나, 사마의(司馬懿)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세를 잡자 일당이 모두 붙잡혀 처형을 당하였다.

정병(程秉) : 손권의 막하 모사(謀士). 여남(汝南) 남돈(南頓) 사람으로 자는 덕추(德樞). 일찍이 정현(鄭玄)을 따라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다. 손권이 그의 명성을 듣고 예로써 모셔들여 매우 공경하였다. 벼슬이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정보(孫堅) : 손견(孫堅) 막하의 용장. 우북평(右北平) 토은(土垠) 사람으로 자는 덕모(德謀). 오나라 장수 중에서 가장연로하고 인물등용이 뛰어나 존경을 받았다. 손견(孫堅)을 따라 황건적(黃巾賊) 토벌 후 더욱 신임을 받았다.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동탁(董卓)을 칠 때 사수관( 水關) 싸움에서, 화웅(華雄)의 아장(牙將) 호진(胡軫)을 찔러 죽여 사기를 떨친 명장이다. 후에 주유(周瑜)가 대도독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못마땅해 첫 번 모임에 아들 정자(程咨)를 대신 보냈었으나, 아들의 복명으로 모든 것이 법에 맞은 것을 알고, 자신이 달려가 잘못을 빌고 그에게 심복하여 부도독(副都督)을 맡았다. 서성(서성)과 짝이 되어 싸움 때마다 등장하여 활약했다. 손견·손책(孫策)·손권(孫權)까지 삼대에 걸쳐 황개(黃蓋)·한당(韓當) 등과 누차 전공을 세운 노장으로, 벼슬이 탕구장군( 寇將軍)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사리판단이 언제나 바르고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었다.

정봉(丁奉) : 손권 막하의 용장. 여강 안풍(廬江 安豊) 사람으로 자는 승연(承淵). 계략이 뛰어나게 많으며 능히 큰일을 처단할 수 있었음. 제갈량이 남병산(南屛山)에서 동남풍을 빌고 떠나는 길을 서성(徐盛)과 함께 추격한 때문에, 적벽가(赤壁歌) 가운데 불려져 있어 우리 귀에도 익은 이름이다. 계략에 있어 능히 대사를 처단하고 전투에 가장 용감하여, 여러 차례 전투에 위공을 세운 중에도, 사마사(司馬師)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불과 3천 명의 군대로 선봉 호준(胡遵)의 진을 습격하여 환가(桓嘉)·한종(韓綜)의 두 장수를 베고 무인지경같이 휩쓸었다. 뒤에 다시 동흥(東興)에서 제갈탄(諸葛誕)의 군대를 눈 가운데서 파해 위(魏) 나라 사람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장포(張布)와 함께 계략을 꾸며 손침(孫 )을 죽이고 대장군이 되어 서주목(徐州牧)을 겸했는데, 귀현해지자 교만한 태도가 드러나, 손호(孫皓) 때 헐뜯는 이가 있어 임천으로 옮겨 가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관직은 대장군(大將軍)에 서주목(徐州牧).

정비(丁斐) : 조조 수하의 위남현령(渭南縣令). 동관(潼關) 싸움에서 조조가 마초(馬超)에게 몹시 쫓겼을 대, 남쪽 산 위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주 다급하게 되자 소와 말을 있는 대로 풀어서 내몰았다. 이 바람에 마초의 군사는 그것을 붙잡느라고 정신이 팔려, 이 사춤에 조조는 신변의 위험을 모면하였다. 이 공로로 그는 전군교위(全軍校尉)로 승진되었다.

정욱(程昱) : 조조의 모사(謀士). 동군 동아(東郡 東阿) 사람으로, 자는 중덕(仲德). 순욱(荀彧)의 천거로 그의 막하에 들었다. 194년 조조가 두 번째 서주(徐州) 공격에 나섰을 때 장막(張邈)과 진궁(陳宮)이 배반하여 근거지인 연주( 州)를 여포(呂布)에게 넘겨주었을 때, 순욱과 함께 진성과 다른 두 현(縣)을 확보하고 조조를 맞아들였다. 귀환한 조조는 사기가 떨어져 원소(袁紹)의 제의를 받아들여 인질을 보내 손잡으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꾸짖으며 조조를 격려했다. 조조가 원소(袁紹)의 대군과 창정(倉亭)에서 마지막 겨룰 때, 십면매복계(十面埋伏計)를 올려 원소 토벌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조조가 손권과 유수(儒須)에서 싸웠을 때는 싸움이 불리하여 회군할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더니, 결국 거의 사로잡힐 뻔하기까지 하고 나서야 얻은 것 없이 회군하였다. 196년, 헌제(獻帝)를 맞아들이자는 조조의 제안에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순욱과 함께 적극 찬성했다. 또 유비를 경계해 그에게 군사를 맡기는데 반대하고 그를 죽이자고 진언했다. 그리고 서서(徐庶)가 유비를 떠나게 할 수밖에 없는 간계를 성공시키기도 함. 권모술수에 능했고, 사태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벼슬이 위위(衛尉)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정원(丁原) : 병주자사(幷州刺使) 때 여포를 발견하고 그를 수양 아들로 삼아 길렀다. 하진(何進)이 환관을 없애고자 군웅(群雄)을 낙양(落陽)으로 불러들일 때 그의 명에 따라 낙양 교외의 맹진(孟津)에 불을 지르고 혼란에 빠진 낙양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동탁(董卓)이 권력을 쥐어 황제를 폐립(廢立)하려 들자 정면으로 이에 반대하였다가 동탁에게 매수된 여포의 손에 죽었다.

정의(丁儀) : 위(魏)의 문신. 패(沛) 사람으로 자는 정체(正體). 용모가 추하고 한 눈이 멀었으나, 민첩하고 글을 잘하였다. 조식(曹植)에게 빌붙어 사이좋게 지냈으므로, 조조가 그를 태자로 세우려 할 때 좋게 말한 때문에 조비(曹丕)에게 밉게 보여, 즉위하자 이내 잡아 가뒀다가 죽였다.

정은(程銀) : 마등(馬騰)의 장수. 조조(曹操)와의 싸움에 출정.

정자(程咨) : 손권 막하의 장수 정보(孫堅)의 아들. 처음에 정보는 주유(周瑜)가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오른 게 마땅치 않아 첫 번 군사 모임에 나가지 않고, 정자를 대신 보냈던 것인데 그의 보고로 장재(將材)임을 알고는 달려가 사죄하고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 아비의 뒤를 이어 여러 곳 싸움에 종군하였다.

정현(鄭玄) : 후한의 덕망 높은 학자. 자는 강성(康成). 마융(馬融)이 가장 아끼던 제자로서 환제(桓帝) 때 상서(尙書) 벼슬을 하였으나 십상시(十常侍)의 난 후 고향에 돌아가 서주(徐州)에 숨어살았다. 유비는 탁군( 郡)에 있을 때 그를 스승으로 섬겼으므로 서주를 차지한 뒤에도 자주 찾아 교시(敎示)를 받았다. 원술(袁術)을 멸한 후 조조가 대거하여 유비를 치려 하자 부득이 원소(袁紹)의 원조를 받아야겠는데 줄이 없어 애태울 때 혼연히 그를 위하여 편지를 써서 원소로 하여금 조조의 배후를 치게 하였다.

제갈각(諸葛恪) 203 ∼ 253년 : 동오(東吳)의 대장. 양도(陽都) 사람.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의 장자로 자는 원손(元遜). 관직은 위북장군(威北將軍), 도향후(都鄕侯)에 대장군(大將軍)까지 지냄.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손권(孫權)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공으로 위북장군을 배하고, 육손(陸遜)이 죽은 뒤 대장군이 되었으며 무창(武昌)에 머물러 형주(荊州)를 지켰다. 손권이 후사를 부탁, 어린 황제 손양(孫亮)의 즉위와 함께 부채의 면제, 물품 세의 철폐 등 내정 면에서 인심을 수습하는 한편 위(魏)가 손권의 상중을 기회로 대군을 이끌고 오자 이를 대파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53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에 대한 침공 군을 일으켰다가 작전의 실패와 병으로 대패하고, 신성(新城)을 에웠다가 오래 함락시키지 못한 채 사졸(士卒)이 피로하여 원성(怨聲)이 물끓듯한 기회를 탐타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꺼린 손준(孫峻)이, 오주 손양에게 그가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온 가족이 도륙을 당하였다. 변론에 능했음.

제갈균(諸葛均) : 제갈량(諸葛亮)의 아우. 삼형제 중 맏이인 근(瑾)은 손권을 섬겼고, 제갈량은 유비를 좇아 떠날 때, 농사나 잘 지으며 천시를 지키고 있으면, 공명을 이룬 뒤 돌아와 다시 예 와서 숨으리라고 균에게 부탁하였더니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에 촉(蜀)의 교위로 일함.

제갈근(諸葛瑾) 174 ∼ 241년 : 손권 막하의 모사(謀士). 자는 자유(子喩). 제갈량(諸葛亮)의 형. 낭야군 남양현(瑯 郡 南陽縣) 사람. 용모가 좋으며 얼굴이 긴 것이 특징. 효성이 지극했음. 간 할 때는 항상 비유하여 말하고 직접 반대하는 언사를 쓰지 않았다. 난을 피해 강동(江東)에 가 있다가 노숙(魯肅)의 천거로 손권을 섬기게 되었다. 동생인 제갈량이 촉(蜀)을 받들고 있어서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손권으로부터는 절대적 신임을 받고, 주로 유비 측과의 외교 접촉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나 사사로이 만나는 일이라곤 없었다. 215년에 오(吳)와 촉이 형주(荊州)를 둘러싸고 공방전을 되풀이하는 동안 조조가 한중(漢中)에 침입했다. 이에 유비가 손권에게 강화를 제의하여 회담을 열었을 때 쌍방의 대표로서 만난 것이 제갈 형제였다. 대장군(大將軍) 좌도호(左都護)에 예주목(豫州牧)을 겸했는데 뒤에 병으로 죽고, 아들 각(恪)이 대를 이었으나 권력이 너무 커져 죽음을 당했다.

제갈상(諸葛尙) : 촉한(蜀漢)의 대장. 제갈량의 손자요, 첨(瞻)의 아들. 병서와 무예에 능함. 불과 열아홉 살로 아버지를 따라 선봉으로 출전하여 잘 싸웠고, 아버지가 전사하는 것을 보자, 이내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이 역시 돌격하여 장렬하게 죽었다. 이로써 제갈량의 집안은 3대가 촉한에 충성을 다한 것이다.

제갈서(諸葛緖) : 위(魏)의 장수. 옹주 자사(雍洲 刺使)로 종회(鍾會)가 촉한(蜀漢)을 칠 때 참전하여 강유(姜維)의 돌아갈 길을 끊었다. 그러자 강유가 다른 길로, 옹주를 치는 척하였으므로, 그가 속아 군사를 움직인 사이 강유는 회군하여 위군의 진지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종회가 노해 군법에 회부시켜 죽이려 했으나 등애(鄧艾)의 수하 사람이므로 우선 함거(檻車)에 실어 낙양(落陽)으로 보냈다.

제갈량(諸葛亮) 181 ∼ 234년 : 촉한(蜀漢)의 승상. 낭야군 양도현(瑯 郡 陽都縣) 사람으로 자는 공명(孔明). 한(한)의 사예교위(司隸校尉) 제갈풍(諸葛豊)의 후손. 신장은 8척이고 얼굴은 구슬 같고 윤건을 쓰고 우선(羽扇)을 들어 마치 신선과 같았음.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솔직하며 담백하고 고요했다. 천하를 휘두르는 재주를 가지고 신출귀몰한 계략을 씀. 진법에 통달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움을 보고 남양 땅에 엎드려 밭 갈며 나아가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아 사람들은 복룡(伏龍)이라 부름. 사마휘가 말한 소위 와룡·봉추(와룡·봉추) 가운데 와룡선생으로서, 처사(處士)인 서서(徐庶)의 추천으로 유비는 그를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맞아들이고, 스스로 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水魚之交)고 비유해 말했다. 유비의 은의에 감동해 일어선 것이 나이 이십 팔 세 때. 관우와 장비의 무례를 누르고 그를 군사로 받들어 재기를 꾀하는데, 삼국지를 크게 셋으로 가른다면 중간 부분은 순전히 그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한다. 한 평생을 유비·유선(劉禪) 두 주인을 섬기며 촉나라 기업의 일등공신임. 208년, 적벽대전(赤壁大戰)의 동남풍(東南風), 10만개 화살, 화용도의 예언, 형주(荊州)를 계교로 취한 것, 주유(周瑜)를 계교로 죽인 것, 서천을 점령, 한중을 점령, 팔진도(八陣圖), 칠종칠금(七縱七擒), 만두, 읍참마속(泣斬馬謖), 수어지교, 목우유마(木牛流馬), 축지법, 출사표(出師表), 모사재인(謀士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죽은 뒤 사마의를 달아나게 한 것, 위연(魏延)을 금낭으로 참한 것 등 너무 유명함. 214년, 유비가 촉으로 돌아와 교전을 하자 장비, 조운 등과 함께 성도(成都)를 공격했다. 220년, 조조가 위(魏)나라를 세우자, 다음해에 유비도 한나라의 황제라 칭함과 동시에 그는 승상이 되었다. 223년, 유비가 병으로 죽자 후주(後主) 유선을 받들어 촉나라를 다스리는데 전념하였다. 법가를 바탕에 두고 안국(安國)의 선정을 실시. 225년, 남쪽 변방을 치러 갔다가 남방의 수령 맹획(孟獲)을 일곱 번잡아 일곱 번 놓아주어 남방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227년, 위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쳤는데 성충(誠忠)이 오히려 본받을 점이라, 그의 출사표를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렀다. 228년, 군대를 이끌고 기산(祁山)으로 나아가 위나라의 군사와 접전을 하는 중 참모인 마속의 실수로 첫 번째 위나라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이 해에 손권과 위나라 대사마인 조휴의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진창(陳倉)을 공략했으나 적의 단단한 수비로 인해 후퇴했다. 다음해, 위나라의 3군(郡)과 싸우는 전과를 낳았으나, 그 후 두 번에 걸친 정벌에서는 위의 사마중달이 편 지구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대패하고 병으로 죽었다(54세). 관직은 군사(軍師),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 익주목(益州牧). 시호는 충무후(忠武侯). 아들 첨(瞻)과 손자 상(尙)이 모두 촉한(蜀漢)이 망할 무렵 등애(鄧艾)의 침입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삼대가 모두 충의로 이름을 남기었다.

제갈첨(諸葛瞻) 227 ∼ 263년 : 촉한(蜀漢)의 대장. 제갈량의 적자. 자는 사원(思遠)이요, 양도(陽都) 사람. 어머니는 황씨(黃氏)였다. 재사가 깊고 서화에 능했음. 후주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마(駙馬)가 되고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 받았으나, 환관(宦官) 황호(黃皓)의 하는 양이 미워, 나오지 않다가 마지막 판에 극정( 正)의 주선으로 위장군(衛將軍)에 올라 병마 권을 맡았다. 처음 아버지의 목상을 내세워 종회(鍾會)의 위군(魏郡) 선봉을 물리쳤고, 이어 필마단창(匹馬單窓)으로 위병을 시살 하였다. 동오(東吳)로 구원병을 청했으나 시일이 걸려도 회답이 오지 않으므로, 단념하고 위진(魏陳) 중에 돌격하여, 최후의 힘을 다해 싸우고는 스스로 목을 쳐서 죽었다.

제갈탄(諸葛誕) : 위(魏)의 대장. 낭야남양(瑯  南陽) 사람으로 자는 공휴(公休). 제갈량의 집안 동생으로 위에 벼슬하였는데, 제갈량이 죽은 뒤부터 비로소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사마사(司馬師)를 도와 관구검(貫丘儉)의 군대를 토벌한 적도 있었으나, 사마소가 찬탈(簒奪)하려는 태도가 엿보이자, 군사를 동원하여 그를 치기로 하고 먼저 양주성(楊州城)에서 항거하는 악침(樂 )을 찔러 죽여 기세를 올렸다. 오나라 군사의 도움을 받아 연합군으로 수춘성(壽春城)에 웅거하였을 때, 먼저 전역(全 ) 등 동오 장수가 포위군에게 항복해 나가고, 이어 장반(蔣班) 등 모사들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고립하여 싸우다가 호준(胡遵)을 만나 그의 칼에 죽었다. 수하 군졸 수백 명이 포로가 되었으나, 모두가 항복하기를 거절하고 남아답게 죽음을 택하였다.

조광(趙廣) : 촉(蜀)의 장수. 조운(趙雲)의 둘째 아들.

조구(趙衢) : 위(魏)의 장수. 조앙(趙昻)의 동생. 마초(馬超)가 재기하여 농서( 西)를 차지했을 때 기성자사(冀城刺使) 위강(偉康)을 항복 받아 죽였는데, 그의 참군이던 양부(楊阜)가 거짓 항복하였을 때 천거한 군관. 동지들과 마초를 칠 군대를 움직였는데, 특히 마초의 아내와 어린 세 아들과 십여 명 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려, 이에 눈이 뒤집힌 마초는 상대편 장수의 가족은 물론 많은 죄 없는 백성을 수없이 죽이고 쫓기어 장로(張魯)를 의지해 갔다.

조누(趙累) : 유비의 막하 장수. 관우를 도와 형주(荊州)에서 그의 번성(樊城) 공략 중 양곡 보급을 맡았는데, 사람됨이 성실하였다. 관우가 패하여 궁지에 빠졌을 때,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동오 여몽(呂蒙)의 의향을 떠보는 등 갖은 방법을 다 써봤으나 이루지 못하고, 맥성(麥城)에서 혈로를 뚫고 나가다 난군(亂軍) 중에서 죽었다.

조덕(曹德) : 조조(曹操)의 친동생으로 조조가 태산태수 응소(應邵)에게 부친 조숭(曹嵩)을 모셔오라고 시키고 서주태수(徐州太守) 도겸(陶謙)의 부하장수인 장개(張開)가 조숭일가를 몰살시켰을 때 조숭과 함께 죽었다.

조모(曹 ) : 위(魏)의 제4대 마지막 황제. 조비(曹丕)의 손자. 자는 언사(彦士). 즉위하기 전 고귀 향공(高貴 鄕公)으로 있었는데, 사마사(司馬師)의 옹립을 받아 위(魏)에 올랐다. 사람됨이 강직하여 사마소(司馬昭)의 날뛰는 꼴을 차마 못 보아, 친위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치러 나가다 성제(成濟)에게 찔려 죽었다.

조무(祖茂) : 손견(孫堅) 막하의 용장. 오군 부춘(吳郡 富春) 사람. 자는 대영(대영). 쌍도를 잘 썼다. 손견이 동탁(董卓) 토벌군의 선봉으로 사수관(사수관)을 치다가, 패해 달아날 때 손견의 위급을 구해 주고, 자신은 손견의 붉은 수건을 대신 쓰고 싸우다가 화웅(화웅)의 손에 죽었다.

조방(曹芳) : 위(魏)의 삼대 황제. 자는 난경(蘭卿). 조예(曹叡)가 얻어다 기른 자식으로 아무도 그 근본을 아는 이가 없다. 여덟 살에 아비 죽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는데, 보좌를 부탁 받은 사마의의 품에 안겨, 그의 목을 안고 놓지 않으며 따랐으나, 권신들의 농간 속에 빈자리만 지켰을 뿐, 재위 십 오년만에 그의 아들인 사마소(司馬昭)의 손에 패하여 제왕(齊王)으로 봉해 졌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조범(趙範) : 유비가 형주(荊州)를 손에 넣었을 당시의 계양군(桂陽郡) 태수. 교위(校尉) 진응(陳應)·포융(鮑隆) 두 장수를 시켜 그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들은 조운(趙雲)에게 붙잡혀 죽고, 자신은 항복하였다. 조운과는 의형제를 맺어 동생뻘이었는데, 과부로 사는 형수를 바치려다가 노여움을 사 크게 혼이 났다. 형주가 오(吳)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계양을 지켰다.

조비(曹丕) 186 ∼ 226년 : 위(魏)의 첫 번째 황제인 문제(文帝). 제위 기간은 220 ∼ 226년, 자는 자환(子桓)이고 조조의 둘째 아들. 날 때 이미 이조(異兆)가 있었다고 한다. 십 팔세 에 아비를 따라 원소(袁紹)를 쳐 기주(冀州)를 함락시켰을 때, 원소의 궁전 깊숙이 들어가 며느리 견씨(甄氏)를 보고는 미색에 반하여 자기 아내로 삼았다. 조조의 임종을 지켜 위의 왕이 되었고 황제를 핍박하여 자리를 빼앗고 국호를 대위(大魏)라 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에 제정된 9품 관인법(九品 官人法)은 6조 시대의 귀족 사회의 기초를 이룬 것으로 중국역사상 중요시되었다. 그는 정치가이기보다는 문학자로서 거의 시(특히 악부시)는 알기 쉬운 어휘와 치밀한 묘사로 이루어 졌다. 아버지 조조, 동생 조식(曹植)과 함께 건안시대 대표적인 시인이며 문인. 문학을 논한 그의 <전론논문(典論論文)>은 후에 건안칠자(建安七子)라 불리는 그와 동시대의 문학자 7명의 사람됨과 문학을 논하여 중국의 문예 비평의 선구자가 되었다. 문무에 뛰어난 자질이었으나 가정 내 사정에 들어서는 간신의 고촉을 받아 황후 견씨를 죽이고 귀인 곽씨로 대신하는 등 비극이 있었다. 오(吳)를 친정(親征)하였으나 얻은 바 없었고, 주색을 좋아하여 나이 불과 사십에 상한병(傷寒病)으로 죽었다. 시호를 문황제(文皇帝)라 하고 견씨 몸에 난 독자 예(叡)로 대를 잇게 하였다.

조상(曹爽) : 위(魏)의 권신(權臣). 조진(曹眞)의 아들. 조예(曹叡)가 위독하여 후사(後嗣)로 조방(曹芳)을 세우게 되자 그의 보호인으로서 군사권을 한 손에 쥐었다. 자를 소백(昭伯)이라 하며 소시부터 궁중에 드나들어, 매사에 조심스러운 때문에 조예도 신임했던 것인데, 막상 권세를 잡고 보니, 오백이나 된다던 식객 중에서 하안(何安)·등양(鄧 )·이승(李勝)·정밀(丁謐)·필궤(畢軌)·환범(桓範) 등 간사한 무리들이 주위에 모이어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오직 경계하는 것은 사마의(司馬懿) 뿐이었는데 사람을 놓아 알아보니 늙고 병들어 형편없다는 보고라, 안심하고 군신들이 사냥을 나간 산이, 사마의의 쿠데타를 만나 자리를 빼앗기고, 자신은 편안히 노후를 보내기를 꿈꿨으나 일동 함께 저자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조성(曹性) : 여포(呂布)의 장수. 서주의 싸움에서 하후돈(夏侯惇)의 눈을 잃어버리게 한 인물. 그러나 하후돈의 용맹에 압도되어 죽음을 당함.

조순(曹純) : 조조의 막하인 조인(曹仁)의 아우. 적벽대전 후 조인이 남군을 지킬 때 종군하여, 형을 도와 잘 싸웠다.

조숭(曹嵩) ? ∼ 193년 : 조조(曹操)의 아비. 본시 하후씨(夏候氏)였으나, 환관(宦官)인 중상시(中常侍) 조등(曹騰)에게로 양자 들어가 조씨라 일컫게 되었다. 조등이 죽자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1억 전(錢)을 영제(靈帝)에게 바쳐 태위(太尉) 벼슬을 얻었다. 퇴직 후 고향으로 은퇴했다가 동탁(董卓)의 난을 피하여 낭야(瑯 ) 산중에 숨었더니, 조조가 득세하여 자리가 잡히자 부장을 시켜 모셔오게 한 것이, 도중 서주태수(徐州太守) 도겸(陶謙)이 호위로 붙여준 장수 장개(張開)에게 일족이 몰살당하는 결과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조조가 은혜로 대하는 여백사(呂伯奢)의 가족을 몰살시켰던 보답이라고들 하였다.

조식(曹植) 192 ∼ 232년 : 조조(曹操)의 넷째 아들이며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아우이다. 자는 자건(子建). 안휘성(安徽城) 사람. 재사가 민첩하매 거보성장(擧步成章)하여 조칠보(曹七步)라고 불렸다. 조조가 무척이나 아꼈음. 조조, 조비, 조식 그들 세 사람을 삼조(三曹)라 하며, 함께 건안칠자(建安七子)의 중심적 존재로서 중국 문학사상의 주공(周公)·공자(孔子)라 칭송되었다. 부(賦), 송(頌), 시(詩), 잡론(雜論) 등 백여 편을 남김. 아비가 죽었을 때 분상(奔喪)하지 않은 죄로, 조비(曹丕)가 허저(許 )를 보내 잡아 올려 다스릴 때, 칠보시(七步詩)를 지어 대답할 만큼 영민 하였다. 술을 즐기고 그리 성실치 못했다. 맏형 조비와 태자 계승 문제로 암투를 하다가 29세 때 아버지가 죽고 형이 위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 시인 정의(丁儀) 등 그의 측근자들은 죽음을 당했고 그도 평생 정치적 위치가 불우하게 되었다. 그의 재주와 인품을 싫어한 문제에 의해 거의 해마다 새 봉지로 옮겨 살도록 강요당하였고 엄격한 감시 하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마지막 봉지인 진(陳)에서 죽었다. 진왕(陳王)에 책봉. 그는 공융(孔融!)·진림(陳淋) 등 건안칠자(建安七子) 들과 사귀어 당시의 문학적 중심을 이루었고 오언시를 서정시로서 완성시켜 문학사상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 위·진(晋)을 거쳐 당나라의 두보(杜甫)가 나오기까지 그는 시인의 이상상(理想像)이기도 하였다. 동작대부의 작자로 유명하며 시호는 사(思)이다.

조안민(曹安民) : 조조형의 아들. 조조가 완성(宛城)으로 동탁(董卓)의 잔당 장수(張繡)를 쳤을 때, 기껏 장제(張濟)의 처를 수청(守廳)으로 천거하였다가, 야습으로 큰 피해를 당하게 되고, 자신도 도보로 조조를 호위해 가다 죽음을 당하였다.

조앙(曹昻) ? ∼ 197년 : 조조의 맏아들. 자는 자수(子修). 생모인 유부인(劉夫人)이 일찍 죽어 정부인(丁夫人)에게 양육되었다. 197년, 조조를 따라 남양(南陽)의 장수(張繡) 정벌에 참가하여 항복 받았으나, 이 해 장수의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나, 야습으로 아비가 탔던 말까지 죽어 위경에 빠지자 자신의 말을 태워 살려내고 자신은 화살을 맞아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

조앙(趙昻) : 위(魏)의 장군. 양부(楊阜), 강서(姜敍) 등과 장안을 지킴. 마초(馬超)가 재기하여 농서( 西)를 차지하였을 때 기성자사(冀城刺使) 위강(韋康)을 항복 받아 죽였는데, 그의 수하였던 장수로서 동지를 규합하여 마초를 쳐서, 결국 발붙일 곳을 잃고 도망가게 만들었다.

조언(曹彦) : 위(魏)의 장군. 위주(魏主) 조환(曹奐)의 사촌.

조예(曹叡) 205 ∼ 239년 : 위실(魏室)의 2대 황제. 자는 원중(元仲). 문제(文帝)의 태자로 226년에 즉위하고 명제(明帝)가 되었다. 생김새가 영준 하고 재주가 있으며 말과 활을 잘씀. 성품이 무겁고 모든 일을 독단으로 행함. 아버지의 유조(遺詔)에 의해 조진(曹眞)·조휴(曹休)·사마의(司馬懿)·진군(陳群) 등이 보좌했다. 그는 침착 과단한 인품으로 부화(附和)의 무리를 물리치고 스스로 정치를 행하였다. 즉위 초, 오(吳)와 촉(蜀)이 연합하여 위를 공략했으나 그는 사마의 등 무장을 파견하고 자신도 전투에 출진 하여 오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에 빠졌고 토목공사를 즐겨 굉궐하게 궁전을 짓고, 또 모황후(毛皇后)를 죽이고 곽씨(郭氏)를 대신 세우는 등, 가정사에도 실책이 많았다. 그가 죽자 양자로 삼았던 제왕(薺王)인 방(蒡)을 보좌하던 자들의 내분으로 사마씨(司馬氏)가 실권을 쥐게 되었다. 재위 13년 36세에 상한병(傷寒病)으로 죽었다.

조우(曹宇) : 위(魏)의 종친. 조조의 아들로 마지막 위(魏)의 황제 조환(曹奐)의 아버지. 연왕(燕王)에 봉해 있었는데, 조예(曹叡)가 병들어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로 대장군을 봉하여 태자 조방(曹芳)의 보좌를 부탁하였으나, 본시 신중하고 안존한 성격이라 이미 기울어진 황실을 어쩔 수 없어, 극력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조상이 권력을 쥐자 벼슬을 깎고 시골로 내치었다.

조운(趙雲)  ? ∼ 229년 : 유비(劉備) 막하의 용장. 상산 진정(常山 眞定) 사람으로 자는 자룡(자룡). 사람을 대할 때는 부드럽고 의리를 중하게 여겼다. 훌륭한 창법으로 수많은 싸움에서 전공을 세움. 오호장군(五虎將軍)의 한 사람으로 청홍검(靑紅劍)을 소지 한 것으로 유명. 본디 원소(袁紹) 관할에 있다가 그의 인품에 싫증을 느껴 공손찬(公孫瓚)을 위기에서 건져주고 그의 막하에 들었다. 거기서 유비와 알게 되고 서로 몹시 흠모하게 되었다. 공손찬이 망한 뒤 오관참장(五關參將)하고 오는 관운장과 유비, 장비를 함께 만나,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이들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당양파(當陽坡) 싸움에서는 단기필마로 유비의 부인인 감부인(甘夫人)을 구하고, 미부인( 夫人)이 임종에 맡긴 아두(阿斗)를 품에 안고 적진 중을 돌파하여 용명을 떨쳤다. 유비가 서촉(西蜀)에 출병한 사이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동오(東吳)로 가는 뱃길을 따라가, 이때 역시 아두를 도로 찾아 돌아왔다. 214년에는 성도(成都) 공격의 일익을 담당하여 출진 했고, 219년에는 한중(漢中) 공방전에서 정찰도중 위(魏)의 주력 부대를 만났으나 뛰어난 전술로 후퇴에 성공하여 찬탄을 받았고 한중에서 황충(黃忠)을 구해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출병하였을 때도, 반대를 무릅쓰고 강주(江州) 수비에 나서 용감히 싸워 패군 한 유비를 도왔으며, 228년,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위를 치고자 기산(祁山)에 출전하였을 때는,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건만 참오장(斬五將)이 되어 등지(鄧芝)와 함께 양동작전으로 기곡(箕谷)에 진주했다가 조조의 대군을 만나 소수의 군대로 잘 싸우고 적장 한덕(韓德)의 5부자, 다섯 장수를 혼자서 싸워 죽여 용맹이 쇠하지 않음을 보였다. 제갈량이 재차 위(魏)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전진 중에 달리면서 번번이 그만큼 큰공을 세우고도 와석종신(臥席終身)하였음은 진실로 복장(福將)이라 하겠다. 일의 처리에 있어 실수가 없이 거의 완전무결하게 처리한 둘도 없는 충신. 아들에 조통(趙統)·조광(趙廣)이 있어 촉한에 벼슬하였으나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조웅(曹熊) : 조조의 넷째 아들. 몸도 약하여 아비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는데, 형이 즉위하자 자기에게 위해가 올까 미리 겁내어 목을 베어 죽었다. 뒤에 소회왕(蕭懷王)으로 추증 되었다.

조인(曹仁) 168 ∼ 223년 : 조조의 종제요, 수하의 대장. 자는 자효(子孝). 조조가 처음 동탁(董卓)을 치려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 이미 천명 부하를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관도대전(官渡大戰) 때, 유비가 허도(許都) 남쪽에서 반란을 선동하자 이를 진압했다. 무용이 절륜하여 적벽대전 후 서황(徐晃)과 함께 강릉(江陵)에 머물러 추격군을 막았다. 그 후 번성(樊城)에 근거하여 관우의 공격을 잘 막았다. 남군(南郡)을 지켰을 때는 조조가 남겨 놓은 계교로 주유(周瑜)를 크게 파하고 부상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마초(馬超)의 장안(長安) 침공 때는 신중하게 용병 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 밖에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전공을 세우고 대장으로서는 드물게 와석종신(臥席終身)하였다.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충(忠).

조자(趙咨) : 손권 막하의 모사(謀士). 자는 덕도(德度).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러 출병하였을 때 그의 예봉(銳鋒)을 늦추기 위하여 자진하여 위에 사신으로 가, 양국을 연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돌아와 벼슬이 도위(都尉)로 올랐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조잠(趙岑) : 동탁(董卓)의 부하장수. 후에 난군중에 죽음.

조조(曹操) 155 ∼ 220년 : 삼국시대 위왕조(魏王朝)를 세운 인물. 패국(沛國) 초군(焦郡) 사람으로 자는 맹덕(孟德).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본시 하후씨(夏候氏)였으나, 아비 조숭(曹嵩)이 환관(宦官)인 중상시(中常侍) 조등(曹騰)에게 양자 들어간 때문에 조씨로 일컬었다. 사태를 기민하게 살피고 권모술수에 능하고 이름이 나기를 좋아함. 무(武)에 대해서 능하며 문학에도 재예가 비상함. 기도위(騎都尉)로 황건적(黃巾賊) 토벌에 참여한 것을 시초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동탁(董卓)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돌아가 의병을 일으켜 산동 지방에 기반을 닦았다. 헌제(獻帝)가 궁지에 빠졌을 때는 시간을 지체 않고 그를 맞아 들여 호령 천하 하는 명분을 삼았다. 기회를 보는 데 빠르고 문무를 겸전하여, 육십 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천하를 주름잡았다. 수하에 많은 인재를 거느려 능소능대(能小能大)하게 그들을 구사(驅使)하였으며, 적과 싸워 위험한 경지에 빠진 적이 무수히 있었으나 그때마다 천행으로 모면하였고, 또한 야심을 꺾지 않았다. 건안(建安) 13년 손권(孫權)·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 이후로 그 세력이 강남(江南)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丞相), 동 18년 위공(魏公), 21년 위왕(魏王)까지 되었던 때문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심리로 작용되었겠지만, 삼국지 연의란 본시 관우가 민간에서 신으로 숭배된 뒤, 그의 의기(義氣)를 중심으로 엮어졌기 때문에 줄곧 미움의 대상으로 그려져 있으나, 전반부에서 단연 주인공의 위치를 차지해 있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을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낙양(落陽)에서 죽었다(66세).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사람을 너무 수단적으로 삼은 것이 그를 잔인하게 평가하게 한 이유가 됨. 그는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그 아들 조비(曹丕)·조식(曹植)과 함께 시부(詩賦)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흥륭(興隆)을 가져오게 했다. 아들 조비는 대를 잇자, 이내 황제위를 일컫고 그에게 무제(武帝)라 시호를 올렸다. 후세에 조조는 간신(奸臣)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의 재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삼국이라고 하나 실력에서 월등하게 우세하였다 보겠고, 촉한(蜀漢)이 한의 법통을 이은 것을 표방하나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서는 그의 세력의 후계자인 위(魏)를 정통으로 처리하고 있다. 의천검(依天劍), 청홍검(靑紅劍), 맹덕신서(孟德新書), 조황비전(爪黃飛電) 등 여러 보물을 소유하기도 함.

조준(曹遵) : 위(魏)의 장수들. 제갈량이 제1차로 위를 치러 출병하였을 때 주찬(侏讚)과 함께 조진(曹眞)의 부장으로 선봉이 되어, 서강왕(西羌王) 철리길(徹里吉)의 군과 함께 진격하였으나, 조준은 위연(魏延)에게, 주찬은 조운(趙雲)의 창에 각각 죽음을 당하였다.

조진(曹眞) ? ∼ 231년 : 위(魏)의 대장. 조조의 집안 조카. 자는 자단(子丹).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조에게 양육되었다. 성정이 충근한 위에 용맹이 뛰어났었고, 매양 출정할 적마다 사졸 들과 노고를 같이했으며, 군용이 모자라는 것은 사재를 털어서 충당하였다.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 때 조비(曹丕)의 유언을 받고 조예(曹叡)의 후견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군대를 따라 다니며 전후에 공도 많았는데 228년, 제갈량의 침공 때 군대를 이끌고 선전했고, 230년에는 촉한(蜀漢)을 치다가 패하고 병이나 누웠으며, 사마의(司馬懿)에게 대장인을 전하였다. 대사마(大司馬)가 되고 병이 완쾌되어 이듬해 제갈량의 재차 침공에 다시 출전하였다가 또 패군하고는 제갈량의 조롱하는 편지를 받고 병이 커져서 죽었다.

조창(曹彰) ? ∼ 222년 : 조조의 셋째 아들. 자는 자문(子文). 어려서부터 궁마에 통달하고 힘은 맹수를 잡을 만하였는데, 수염이 노랗다고 조조는 그를 황수(황수)라 부르며 자랑으로 삼았다. 문(文)보다는 무(武)에 관심이 많아 어려서부터 무예에 열중함. 조비(曹丕)·조식(曹植)이 아버지의 문재(文才)를 이어받았다면, 그는 무재(武才)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군을 거느려 오환족(烏丸族)의 반란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는데, 조조가 죽었을 때 군사를 이끌고 상경하였다가, 이내 전군을 형 조비에게 인계하고 뒤에 임성왕(任城王)으로 봉해졌으나 음으로 양으로 박해를 받다가 몇 해 후 입경 하였다가 객사에서 갑자기 죽었다.

조표(曹豹) : 서주태수(徐州太守) 도겸(陶謙)의 장수였으나, 그가 죽은 후 유비를 따랐다. 워낙 술을 못 먹는 것을 장비가 강권하는 바람에 애걸하듯 빌던 나머지 여포(呂布)가 자기 사위인 것을 말하였다가, 도리어 매를 맞고 그 길로 여포에게 밀사를 보내 서주(徐州)를 점령하게 만들고는, 이어 장비에게 찔려 죽었다.

조필(組弼) :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를 핍박하여 선위 받을 때의 옥새(玉璽) 관리인인 부보랑(符寶郞). 조홍(曹洪)과 조휴(曹休)가 어전에서 칼을 빼어 들고, 옥새 내어놓기를 강요하였을 때 당당히 항거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조홍(曹洪) ? ∼ 232년 : 조조의 사촌동생. 자는 자렴(子廉). 조조가 동탁(董卓)을 치려고 의병을 모을 때, 천명 수하를 거느리고 이에 참여하였고, 조인(曹仁)과 함께 일찍부터 조조를 따라다니며 많은 전공을 세움. 장안(長安) 천도(遷都) 때 동탁을 추격하였다가 형양(滎陽)에서 서영(徐榮)에게 패했을 때, 부상당한 조조를 자기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가며 몸으로써 그를 구해냈다. 산동(山東)의 황건적(黃巾賊) 잔당(殘黨)을 칠 때는 절천야차(截天夜叉) 하만(何曼)이라는 적괴를 타도배작계(拖刀背斫計)로 쳐서 죽었다. 195년, 헌제(獻帝)가 안읍(安邑)에 피난했을 때 조조로부터 헌제를 맞이하라는 명령을 받고 안읍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방해를 받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조조가 오소(烏巢)로 출격하자 본영을 잘 지켜 적장 장합(張 )·고람(高覽)의 공격을 방어했다. 성격이 몹시 조(燥)하고 참을성이 없어 마초(馬超)가 장안을 치고 동관(潼關)을 뺏으러 왔을 때는 같이 출전한 서황(徐晃)의 말을 안 듣고 날 뛰다가 패하였다. 그러나 조조가 수염을 자르고 쫓겼을 때는, 뒤쫓는 마초를 맞아 사오십 합이나 싸워 급한 고비를 모면하게 하였다. 여러 차례 전장에 출전하여 전공이 컸으며 벼슬이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이르고 뒤에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공후(恭侯).

조환(曹奐) : 위(魏)의 마지막 황제. 사마사가 조모(曹 )를 시해하고 맞아들였다. 처음 이름을 황(璜)이라 했으며 자는 경소(景召)였는데 황제가 되자 이름을 고쳤다. 조조의 손자인 연왕(燕王) 조우(曹宇)의 아들이다. 위(魏)에 있은 지 육 년만에 사마염(司馬炎)에게 찬탈 당하여 위는 망했고, 진류왕(陳留王)이란 헛된 이름으로 금옹성에 옮겨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태강 원년 280년).

조훈(曹訓) : 위(魏)의 장수. 위주 조방(曹芳)의 사촌.

조휴(曹休) : 조조(曹操)의 조카요, 아끼는 장수. 자는 문렬(文烈). 조조가 자기 집의 천리구(千里駒)라고까지 자랑하였다. 무(武)에 관심이 많고,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워 번번이 공이 있었다. 조비(曹丕)를 섬겨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이 되고, 조비가 죽을 때 그 아들 조예(曹叡)의 보필을 부탁 받았다. 228년, 대사마(大司馬)의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군대를 끌고 동오(東吳)의 손권을 쳤다가, 주방(周 )의 거짓 항복에 속아 석정 싸움에서 참패를 하고는 그것이 빌미가 되어 등창(악성종양)이 터져서 죽었다. 시호는 장후(壯侯).

조희(曹羲) : 위(魏)의 권신(權臣). 조상(曹爽)의 아우로서, 그가 어린 임금 조방(曹芳)을 돌보고 있는 사이, 중령군(中領軍)의 높은 벼슬로써 권세를 같이 했으나, 형이 놀기에만 정신을 쓰는 것을 탄하고 충고하였다. 나중 사마의에게 권세를 빼앗기고 삼형제가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종신(鍾神) : 조조의 막하인 하후돈(夏侯惇)의 수하 대장. 조운(趙雲)이 아두를 품에 품고 장판교(長坂橋)를 향해 달릴 때, 형인 종진(鍾縉)과 함께 가로막았으나 형은 한 창에 찔려 죽고, 그 마저 조운을 거의 잡을 듯하다가 그의 내리치는 청홍검(靑紅劍)에 두 동강이 나 죽었다.

종여(宗?) : 촉한(蜀漢)의 문신. 남양 안중(南陽 安衆) 사람으로 자는 덕염(德 ). 제갈량이 죽은 뒤, 동오(東吳)와의 관계를 염려한 나머지, 스스로 동오에 사신으로 가 손권과 사적으로도 친교를 맺어 양국의 우의를 계속하기에 진력하였다. 벼슬이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종요(鍾繇) 151 ∼ 230년 : 위(魏)의 중신(重臣). 영천 장사(潁川 長沙) 사람으로 자는 원상(元常). 이각(李 )·곽사(郭 ) 지배하의 장안(長安)에서 헌제(獻帝)를 도와 그의 장안 탈출을 위해 노력하고 후에 조조의 휘하로 들어갔다. 동무정후 시중 상서 좌복야(東武亭侯 侍中 尙書 左僕 )의 엄청난 직책으로 조조의 동작대(銅雀臺) 잔치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 관중(關中)에 세력을 떨친 마초(馬超)·한수(韓遂) 등을 내몰고, 관도(官渡) 싸움 때는 관중에서 말 2천여 두를 공급하여 조조를 감격케 했다. 장안군(長安郡) 태수로 있을 때는 마초(馬超)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해 성을 빼앗기고, 아우 종진(鍾進)은 방덕(龐德)의 칼에 맞아 죽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형옥을 다스리는 데 뛰어나 남의 원망을 사는 일이 없었다 한다. 위 건국 후 벼슬이 태부(太尉)에 이르고 명제(明帝) 때까지 중신으로 있었다. 서예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태부(太傅)를 지내고, 정릉후(定陵侯)에 봉해졌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나중 촉한(蜀漢)을 토멸하고 죽은 종회(鍾會)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종진(鍾縉) : 조조의 막하인 하후돈(夏侯惇)의 수하 대장. 조운(趙雲)이 아두를 품에 품고 장판교(長坂橋)를 향해 달릴 때, 아우 종신(鍾神)과 함께 가로막았으나 그는 한 창에 찔려 죽고, 종신 마저 조운을 거의 잡을 듯하다가 그의 내리치는 청홍검(靑紅劍)에 두 동강이 나 죽었다.

종회(鍾會) : 사마씨 휘하의 대장. 영천 장사(潁川 長沙) 사람으로 자는 사계(士季). 태부 종요(鍾繇)의 아들로서 장재(將材)가 있어 하후패(夏候覇)는 촉한에 항복했을 때 그를 일러 훗날 반드시 촉한(蜀漢)의 위협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등애(鄧艾)와 길을 나눠 촉한을 쳤는데, 거짓으로 항복한 강유(姜維)에게 여러 가지로 농락 당하고, 뒷날 등애를 쳐 없앤 뒤, 중앙에서 자신마저 멸하려는 것을 알자, 강유의 권고로 모반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진 앞에서 난전(亂箭)에 맞아 죽었다. 등애와 쌍벽을 이룸.

좌자(左慈) : 조조가 위왕(魏王)이 되었을 때 나타난 괴도사(怪道師). 애꾸눈이며 절름발이였는데 하는 짓과 말이 괴상했고, 스스로 자는 원방(元放), 도호를 오각(烏角) 선생이라 하며, 조조와는 동고향이라고 하였다. 석실의 신선의 글을 얻었고 육갑신술에 밝다. 갖은 재주와 도술로 상식에 벗어난 기적을 보이고 조조를 술법으로 희롱하고 유비에게 나라 일을 맡기라고 조조에게 나무라자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는 조조를 욕한 끝에 학을 불러 타고 종적을 감추었다. 조조의 죽음을 예언.

좌현왕(左賢王) : 흉노(匈奴)의 영도자. 원소(袁紹)의 조카 고간(高幹)이 쫓기어서 의지해 가자, 본시 조조(曹操)와는 혐의진 일이라곤 없는데 새로운 혼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그를 쫓아버렸다.

주광(朱光) : 조조 막하의 장수. 조조가 두 번째 손권을 치다가 소득 없이 돌아갈 때, 여강 태수로서 완성(宛城)을 지키었다. 동오(東吳)의 포위를 받고, 합비(合 )의 장료에게 구원을 청하는 한편, 화살을 퍼부어 용감하게 싸웠으나 성을 기어 넘어 들어온 감녕(甘寧)의 손에 죽었다.

주령(朱靈) : 조조(曹操) 막하의 장수. 유비가 원술(袁術)을 맞아 싸우러 갈 때, 그에게 군대를 맡기는 것이 안심되지 않아 따라 보냈었으나, 원술을 멸한 후 유비는 군대를 차지해 독립하고 그는 맥없이 돌아갔다. 뒷날 마초(馬超)가 장안성을 뺏고 동관(潼關)에 웅거하였을 때는 서황(徐晃)과 함께 그의 퇴로를 끊었고, 장노(張魯) 토벌의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장합과 함께 선봉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주방(周 ) : 동오의 용장. 오군 양선(吳郡 養羨) 사람으로 자는 자어(子魚). 관내후(關內侯) 때 팽식, 팽기가 쳐들어왔을 때 토벌하여 파양군 태수( 陽郡 太守)에 소의교위를 더했다. 위(魏)의 침공을 앞두고 거짓으로 항복하는 글을 보내 7개조의 의견을 보냈으나, 이미 지략(智略)으로 이름난 사람이라 모두 믿지 않았으나 스스로 자살하려는 양까지 하여가며 조휴(曹休)를 끌어들여 다음 회전(會戰)에 크게 승리를 거두는 바탕을 만들었다. 공으로 비장군(飛將軍)을 봉했으며, 군에 있어 다스린 지 십 삼 년에, 은혜와 위엄을 베풀어 선치(善治)로 이름을 날렸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주비(周毖) : 후한의 충신. 상서(尙書)직에 있으며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과 함께 장안천도를 반대하다가 참수를 당함.

주선(周善) : 손권 수하의 장수. 담력이 크다고 알려짐. 유비가 유장(劉璋)의 부름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서촉에 출동하는 동안, 형주(荊州)를 치려는 계획에 따라 유비의 부인인 손권의 누이를 빼내어 오는 직책을 맡았다. 예정대로 손부인과 유비의 아들 아두(阿斗)를 배에 싣고 강을 저어 내려오는데, 조운이 뛰어 들어 아두를 뺏으려 하고 이어 장비가 뛰어든 것을 막으려고 서두르다 장비에게 죽었다.

주소(周訴) : 위(魏)의 장수.

주연(朱然) : 손권 막하의 장수. 단양 고장(丹陽 故障) 사람으로 자는 의봉(義封). 원래 성은 시(施). 손권이 집권한 후 그를 임용하여 관직이 소위장군(昭威將軍)에 이르고 서안향후(西安鄕侯)에 책봉. 형주(荊州) 공방전 때 반장(潘璋)과 함께 맥성(麥城)에서의 탈출을 시도한 관우의 퇴로를 차단했다. 여몽(呂蒙)의 임무를 대행하여 강릉(江陵)을 지킴. 후에 유비의 침공을 받고는 수군을 거느리고 항전하였다. 사십여 진에 불을 질러 사태가 뒤집히자, 유비 신변을 바짝 추격하다가 바람같이 나타난 조운(趙雲)의 창에 찔려 죽었다. 당양후(當陽侯), 좌대사마(左大司馬), 우군사(右軍師)를 배수함.

주유(周瑜) 175 ∼ 210년 : 손권의 장수요, 동지. 여강 서성(廬江 舒城)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 도략이 밝고 장수재목이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수전(水戰)에 능했다. 손책(孫策)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동서간으로도 교공(喬公)의 두 딸을 나눠 얻으니 모두 절세의 미인이었다. 손책이 강동을 차지했을 때 이미 건위중랑장( 爲中郞張)이었다. 손책이나 오태부인(吳太夫人)-손권의 생모-의 유언에, 모두 군사에 관해서는 공군에게 물으라던 유능하고 신임 받던 장수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荊州)를 공략하고 남하했을 때는, 조조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노숙(魯肅)과 함께 단호히 싸울 것을 주장하고 필승의 이유를 들어 손권으로 하여금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에게서 파견된 장간(蔣幹)을 역이용하여 처음에는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을 죽게 하고, 나중에는 연환계(連環計)를 성공시키는 등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대승을 거둔 후 남군태수(南郡太守)가 되었다. 유비를 경계하여 미인계(美人計)를 쓰기도 하고 제갈량(諸葛亮)과 대립하다 익주(益州)의 유장(劉璋)이 한중(漢中)의 장노(張魯) 공격을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노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馬超)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남군에서 조조군에게 맞은 화살의 상처가 터져 시상구(柴桑口)의 진중에서 죽으니 그때 나이 삼십 육 세였다. 후임으로 노숙(魯肅)을 천거하였고, 이남 일녀를 두었는데, 위는 순(循), 아래는 윤(胤)이었다. '하늘은 왜 주유를 탄생시키고 또 제갈량을 탄생시켰나?'라는 말이 유명함.

주이(朱異) : 동오(東吳)의 장수. 253년, 제갈각(諸葛恪)의 대위(大魏) 작전에 종군했으나 제갈각의 작전을 비판하다 지휘권이 박탈되었다. 257년에 위(魏)의 제갈탄(諸葛誕)의 사마씨(司馬氏) 토벌의 군사를 일으켰을 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도왔다. 안풍(安豊)에서 지체한다고 오의 권신 손침(孫 )에게 힐책을 받고 수춘성(壽春城)을 급격히 치다가 위장 종회(鍾會)의 속임수에 빠져 대패하여 돌아와, 손침은 그의 죄를 물어 참해 버렸다.

주전(朱鐫) : 후한 말엽의 중신(重臣).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조칙(詔勅)을 받들어 황보숭(皇甫嵩)·노식(盧植) 등과 함께 영천(潁川)·여남(汝南)·진국(陳國)의 3군(郡)을 평정하고, 남양(南陽)으로 군대를 몰아 완성(宛城)을 점거한 황건적 10여만을 1만 8천의 군대로 섬멸했다. 동탁(董卓)의 잔당의 손에 많은 동지가 죽음을 당하였으나, 살아남아 있다가, 반란군이 인심 수습차 불러들여 태복(太僕)의 자리에 앉혔다. 청주(淸州)에 다시 황건적의 여당(餘黨)이 일어났을 때 조조를 등용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평정시키고 태위(太尉) 양표(楊彪)와 상의하여 곽사(郭 ) 처의 질투 심한 것을 이용하여, 서로 반목 자멸하게 하였으나 여러 날 싸움에 황제의 괴로움을 보다 못하여 고뇌하다 피를 토하고 죽음.

주지(周旨) : 진(晋)의 장수. 두예(杜預)의 아장(牙將)으로, 오(吳)와의 대전에 앞서 팔백 명의 적은 군사로 몰래 강을 건너 낙향(落鄕)을 야습해 뺏어, 발판을 삼고 동오의 장수 표기장군(驃騎將軍) 손흠(孫歆)과 좌장군(左將軍) 심영(沈榮)을 차례로 베어 대공을 세웠다.

주찬(侏讚) : 위(魏)의 장수들. 제갈량이 제1차로 위를 치러 출병하였을 때 조준(曹遵)과 함께 조진(曹眞)의 부장으로 선봉이 되어, 서강왕(西羌王) 철리길(徹里吉)의 군과 함께 진격하였으나, 조운(趙雲)의 창에 각각 죽음을 당하였다.

주창(周倉) : 촉(蜀)의 중수. 관우(關羽)의 부장으로 천하 장사. 본시 황건적(黃巾賊) 장보(張寶)의 부하 대장이었으나, 그가 죽은 뒤 와우산(臥牛山)에 웅거하여 산적 질을 하다가 평소 흠모하던 관우가 오관참장(五關參將)하고 유비의 가족을 보호해 오는 도중에 만나, 그로부터 관우를 섬겨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우직(愚直)하리 만큼 충성을 다하였다. 헤엄을 잘하여 형주(荊州)를 지킬 때는 조조의 장수 방덕(龐德)을 물 속에 끌어들여 사로잡아 공을 세웠다. 관우가 패해 달아날 때도 최후까지 행동을 같이 하다가 그가 죽자 왕보(王甫)와 함께 자결.

주치(朱治) : 동오(東吳)의 장군. 단양 고장(丹陽 故障) 사람으로 자는 군리(君理). 향리에서도 덕망이 있었고 군략에 뛰어났다. 손견(孫堅)을 따라 도적을 토벌하는데 공이 컸다. 손견이 죽자 손책을 받들어 그를 권하여 강동(江東)을 평정하고, 오군(吳郡)의 태수(太守)로 일보았다. 오랑캐를 토벌하여 동남방을 안정시키고 황건적의 잔당을 뿌리뽑음. 뒤에 남만(南蠻)을 쳐서 안국장군(安國將軍)에 봉하여 졌으며 병으로 죽었다. 관직은 오군태수(吳郡太守), 안국장군, 고장후(故障侯)에 책봉.

주태(周泰) : 오(吳)의 장군. 구강 하채(九江 下蔡) 사람. 자는 유평(幼平). 관직은 한중태수(漢中太守), 능양후(能陽侯). 손책(孫策)을 따라 여러번 공을 세웠고 손권(孫權)이 그를 좋아하여 자기의 좌우에서 집무하게 했다. 후에 조조(曹操)와의 합비싸움에서 공이 가장 컸고 유비(劉備)와의 싸움에서도 활약.

주포(朱褒) : 장가군 태수로 있던 중 맹획(孟獲)이 반란을 일으키자 항복함.

주환(朱桓) : 손권의 막하 대장. 오군 오(吳郡 吳) 사람으로 자는 휴목(休穆). 병서에 통달하고 계모가 많고 기억력이 강함. 처음 여요를 제거시켜 선정을 베풀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출병하였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뒤, 유수도독(濡須都督)으로 있을 때 위(魏)가 조인(曹仁)을 보내 침공했는데, 그때 나이 아직 스물일 곱이었으나, 선봉장 상주(常 )를 베어 그들을 패주하게 하였다. 뒤에 사마의(司馬懿)의 남침을 받았을 때도, 위장 장보(張普)의 복병을 만났으나 그를 베어서 승리로 이끌었다. 탈무장군(奪武將軍) 가흥후(嘉興侯)에 봉해졌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지습(脂習) : 북해태수(北海太守) 공융(孔融)이 조조를 간하다 죽음을 당하였을 때, 그의 시체를 안고 울어 조조의 노여움을 샀으나, 한편 의인(義人)이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이가 있어 죽음을 면하고 공융 삼 부자를 성심껏 장사지냈다.

진경동(秦慶董) : 동승(董承)의 집 하인으로, 몰래 주인의 첩 운영(雲英)을 가까이 하다가 들켜 벌을 받고는 그것에 원한을 품고 의대조(衣帶詔)를 받은 모든 사실을 조조에게 고해 바쳐, 그로 하여 동승과 그의 동지는 일망타진(一網打盡)으로 멸망을 당하였다.

진교(陳矯) : 조조의 막하인 조인(曹仁)의 장사(長史). 적벽대전 후 남군(南郡)을 지킬 때 조인의 용맹만 믿고 자주 날뛰려는 것을 계속 만류하였다. 주유(周瑜)가 부상하여 물러나 죽었다고 속여, 조인의 일행이 몰수 야습을 나갔을 때, 홀로 남아 성을 지키다가 조운(趙雲)의 기습을 받아 성을 빼앗기고 그가 가졌던 병부(兵符)는 유비 편이 양양성(襄陽城)을 뺏는 데 이용되었다.

진교(陳矯) : 위(魏)의 중신(重臣) : 광릉 동양(廣陵 東陽) 사람으로 자는 계필(季弼). 병부 상서(兵部 尙書) 직에 있을 때 조조가 죽었는데, 칼을 빼어들고 나서서 즉간으로 태자 조비(曹丕)가 위왕의 자리를 이을 것을 주장하였다. 벼슬이 사도(司徒)에 이르렀으며, 죽으매 정후(貞侯)라 시호하였다.

진군(陳 ) : 조조의 모사(謀士). 자는 장문(長文). 영천군 허창(潁川郡 許昌) 사람으로 명사 진식(陳寔)의 손자요, 진기(陳紀)의 아들. 환계(桓階)와 함께 조조에게 황제위에 오르기를 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아들 조비 대 에야 성사시키었다.

진궁(陳宮) ? ∼ 198년 : 여포의 모사(謀士). 동군(東郡) 사람. 자는 공대(公臺). 충(忠)과 의(義)를 깊이 알고 계모가 깊다. 처음 초군( 郡) 중모 현령(中牟 縣令)으로 있을 때, 동탁(董卓)을 찌르려다 실패한 조조를 구해 같이 도망하다, 그가 여백사(呂伯奢)의 마지막 식구까지 죽이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도중에서 이탈하였다. 동군 도사(東郡 都事)로 있을 때, 서주태수 도겸(陶謙)을 치러 온 조조와 만나 달래다가 이루지 못하매, 다시 도겸을 찾을 낮이 없어 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에게로 가서 의지하였다. 마침 방랑 중에 있던 여포(呂布)를 기용하여 연주( 州)를 함락시키고, 도겸과 대치 중이던 조조의 배후를 위협하여 연주를 뺏고 복양( 陽)에게 싸워 크게 이겼다. 여포가 패하여 유비에게 의지한 뒤 서주를 취하게 하고, 줄곧 보좌했으나 듣지 않고 패하매 조조에게 잡히어 끝까지 굽히지 않고 의롭게 죽었다.

진규(陳珪) : 후한 말의 명사. 진등(陳登)의 아버지. 자는 한유(漢瑜). 회포(淮浦) 사람. 어려서부터 명문이었던 관계로 원술(袁術)과 친했다. 패국(沛國)의 집정관으로 있을 때 같이 천하를 도모하자는 원술의 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민심이 조조에게 쏠려 있다고 충고했다. 197년, 여포(呂布)가 원술(袁術)과 결친(結親)하려 든다는 소문을 듣고 감연(敢然)히 일어나 이것을 반대하고 아들과 손이 맞게 움직여 여포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합류하도록 했다. 그 공으로 조조의 영접을 받고 원술 군을 격퇴하고, 여포를 멸망하도록 이끌어서 성공시켰다. 명제 때는 사마의(司馬懿)를 따라 양평(襄平)에서 반란을 일으킨 공손연(公孫淵) 토벌에 종군했다.

진기(秦琪) : 조조 막하 하후돈(夏侯惇)의 수하 대장. 채양(蔡陽)의 조카로, 황하 나루터를 지키다가, 관우가 유비 가족을 보호해 오는 일행을 막으려 하였으나 이 역시 그의 손에 죽었다. 소위 오관참장(五關參將)의 제 5호.

진등(陳登) : 자는 원룡(元龍). 서주자사(徐州刺使) 도겸의 모사(謀士)였으나 소패(小沛)에서 유비가 떠난 후, 여포(呂布) 밑에 있으며 진규가 여포(呂布)를 조조 측에 이끌어들일 때 아버지 대신 조조에게 가서 여포 주멸을 권했다. 돌아온 뒤 조조에게서 은상이 없다고 격노한 여포를 비유를 들어 진정시켰다. 원술(袁術)의 칠로 군이 쳐들어오자 5로 군의 대장 한섬(韓暹)을 찾아 대의를 들어 내응 하도록 만들었다. 여포의 신임을 일신에 받아 의심 않도록 만들어 놓고, 안팎으로 교묘하게 주선하여 198년, 하비(下 )성 공격의 선봉을 맡아 여포를 패망시키게 했다. 우에 광릉태수로 있다가 병사.

진란(陳蘭) : 원술(袁術)의 막하 장수. 원술이 전국옥새( 國玉璽)를 손에 넣고 황제라 참칭(僭稱)하여 사치를 일삼다 세력이 날로 기우는 것을 보고, 그의 지휘를 벗어나 수하를 이끌고 숭산(嵩山)으로 들어갔다가, 유비와의 접전 때 원술의 양초를 약탈하고 측면을 교란하여 그의 멸망을 촉진하였다.

진랑(秦朗) : 위(魏)의 중신. 아명은 아소(阿蘇). 모친이 조조의 측실이 되었기 때문에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후에 명제(명제)의 눈에 들어 효기장군(驍騎將軍), 시종장(侍從長)을 지냈다. 사마의(司馬懿)의 군대의 선봉이 되어 출전하였다가, 제갈량에게 유인 당하여 난군(亂軍)중에서 죽었다. 정문(鄭文)은 먼저 제갈량에게 거짓 항복하고, 추격군의 대장을 진랑이라 하고 단칼에 죽였으나 이를 간파(看破)한 제갈량에게 이용당하여 사마의에게 전하는 편지를 썼기 때문에 이 희생을 당한 것이다.

진림(陳淋) : 후한의 문신(文臣).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 광릉(廣陵)사람으로 자는 공장(公璋). 주부(主簿) 벼슬에 있으면서 하진(何進)의 십상시를 토벌하기 위하여 외부 군사를 불러들이자는 계획을 반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기주(冀州)로 돌아가 있었을 때, 원소(袁紹)의 부름을 받아 조조를 치는 격문(檄文)을 초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격렬하였다. 원소가 패망한 뒤 붙잡혔으나, 조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그 죄를 묻지 않고 종사(從事)로서 부리기로 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국가, 군사 등에 관한 글과 격문은 그의 손에서 나옴.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진무(陳武) : 오(吳)의 장수. 여강 송자(廬江 松滋) 사람. 자는 자열(子烈). 손책(孫策)이 유요(劉繇)를 칠 때, 곡아(曲阿)에서 내응 하여 그의 막하에 들었다. 조조의 세 번째 남침을 맞아 싸울 때, 방덕(龐德)을 만나 격전이 벌어졌는데, 구원병은 오지 않고 산골짜기 숲 사이로 쫓기었다가, 반격하려는 찰나 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린 것을 방덕이 내리쳐서 목숨을 잃었다. 관직은 편장군(偏將軍)에 이름.

진복(秦宓) : 서촉의 문신(文臣). 광한 면죽(廣漢 綿竹) 사람으로, 자는 자칙(子 ). 성도(成都)를 내어 주기에 앞서 사신으로 온 간옹(簡雍)의 오만한 태도를 꾸짖어 굴복 받고, 함께 들어가 유장(劉璋)에게 항복을 권하였다. 나중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 동오(東吳)를 정벌할 때, 반대하다가 노여움을 샀으나 주위 사람의 간청으로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였다. 유비가 졸한 뒤 동오 사신으로 가서 능숙한 외교 수완으로 양국의 수교(修交)에 진력하였다. 뒤에 벼슬이 대사농(大司農)에 이르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생(陳生) : 유표(劉表)의 장수.

진손(陳孫) : 유비가 형주(荊州) 유표(劉表)에게 의지해 있을 때, 백성을 약탈하고 모반하려던 장수. 유비 일행의 토벌을 받아 장비의 손에 힘없이 죽고 잔당은 모두 귀순하였다.

진식(陳式) : 촉한(蜀漢)의 장수. 한중(漢中)에서 조조의 군대와 싸웠을 때 하후연(夏後淵)에게 사로잡혔다가, 황충(黃忠)이 잡아놓은 하후상(夏候尙)과 맞바꾸어서 촉한에 돌아왔다. 222년,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오반(吳班)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장강(長江)을 내려가 오군(吳軍)과 대치했다. 229년, 제갈량의 명을 받아 위(魏)의 세력 하에 있는 성도(成都)와 음평(陰平)을 함락시켰다. 뒤에 군사를 거느리고 기산(祁山)을 나왔을 때, 대장의 몸으로 위연(魏延)들과 함께 제갈량의 전략을 비방하고 딴 짓을 하다가 패전을 한 때문에 군법 시행을 당해 죽었다. 뒤에 그의 아들 진수(陳壽)는 이 시대의 정사(正史)인 삼국지(三國志)를 엮었는데, 위(魏)를 정통(正統)에 앉혔으며 제갈량의 출전을 중원(中原)에의 침입(侵入)으로 기록하였다.

진응(陳應) : 계양태수(桂陽太守) 조범(趙範)의 수하 장수들. 유비가 적벽대전 후 위세를 떨치고 계양성을 손에 넣으려 할 때, 포융(鮑隆)과 함께 조운(趙雲)을 막아 싸우다 붙잡혔다가 놓이고선 닷 꾀를 내어 항거하다 조운의 손에 죽었다.

진진(陳震) : 촉한(蜀漢)의 문신(文臣).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효기(孝起). 본시 원소(袁紹)의 막하에 있었으나 관우가 조조에게 의지해 있을 때, 유비의 친서를 가지고 왕래하여 그들과 교분이 생겼다. 성질이 충성되고 늙을수록 더욱 성실하였으며, 특히 외국에 사신 가는 데 재간이 있었다. 동오(東吳)의 손권이 황제를 칭하였을 때, 명을 받아 찬하( 賀)하는 사신으로 가, 동맹의 계속을 다짐하였다. 돌아가 성양정후(城陽亭侯)에 봉함을 받았으며 늙어서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으로부터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신하의 한 사람으로 추천 받았다.

진취(陳就) : 유표(劉表)의 부하 황조(黃祖)의 수군대장. 손권의 침공을 막아 싸우다가 여몽(呂蒙)의 손에 죽었다.

진태(陳泰) : 사마의(司馬懿)의 막장(幕將). 조상(曹爽)을 칠 때와 하후패(夏候覇)의 모반을 막을 때 모두 앞장서 싸웠다. 사마사(司馬師)를 도와 철롱산(鐵籠山)에서 강유(姜維)와 맞섰을 때, 촉한(蜀漢)을 구원하러 온 강왕(羌王) 미당(迷當)의 진을 찾아 거짓 항복하고 향도가 되겠다고 속여서 끌어내 크게 파했다. 뒤에 등애(鄧艾)와 함께 촉한을 치다가 그의 뛰어난 지모에 감격하여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 사마소가 황제(皇帝) 조모(曹 )를 시하고 군신을 다 모았을 대, 혼자 오지 않아 불러들였더니 상복 입고 나와 곡하고, 가충(賈充)을 죽여 다소나마 천하에 사과하라고 직언 하였다.

진횡(陳橫) : 유요(劉繇)의 부하장수. 손책(孫策)과의 싸움 중에 죽음.

진희(陳嬉) : 위(魏)의 장수.

[차]

차주(車胄) : 조조 막하의 장수. 원술(袁術)을 멸한 직후 서주(徐州)를 지키고 있으며 밀령을 받아 유비의 일행을 속여서 잡으려 했으나 진등(陳登) 부자에게 속아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관우에게 죽었다.

채모(蔡瑁) : 유표(劉表) 수하의 장수. 형주(荊州)의 호족으로 수전(水戰)에 능함. 유표의 형주 입성에 협력한 외에 누이를 유표의 후처로, 조카를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에게로 시집보냈다. 이처럼 유씨와 굳은 인척관계를 맺고, 유표의 전처 소생 유기(劉琦)를 배척했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유표를 의지해 있을 때 그의 누이 채부인과 함께 매양 이를 모해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용하게 위기를 모면하였다. 유표가 죽을 때 뜻과는 달리 장윤(張允)과 짜고 누이의 소생 유종을 세우고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나 유종의 일가족은 이내 살해되고 자신은 수군을 부릴 줄 아는 때문에 그를 장윤과 함께 잠시 수군대도독(水軍大都督)에 임명. 적벽대전을 앞두고 주유(周瑜)의 꾀에 떨어진 조조의 손에 이 역시 죽음을 당하였다.

채양(蔡陽) : 조조(曹操)의 막하 장수. 관우가 임시 의지하였다가 조조 앞을 떠나 유비를 찾아갈 때 추격해 죽이겠노라고 나섰으나 여럿의 만류로 이루지 못하다가, 오관참장(五關參將)으로 관우에게 죽은 관문지기 장수 가운데는 자기의 생질 진기(秦琪)도 있었던지라, 다시 추격하였다가 고성 아래서 결국 관우 손에 죽었다.

채염(蔡琰) : 후한의 문신(文臣) 채옹(蔡邕)의 딸. 위도개(衛道 )의 아니가 되어 있는데 북쪽 달란인에게 잡혀 오랑캐의 아내가 되었다가, 조조가 몸값을 치러주고 구해내 동기(董紀)의 아내가 되어 남전(藍田)에 살고 있었다. 조조는 한중 출병 도중에 여기 들렀다가 조아(曹娥)의 비문을 보고 그 수수께끼 풀이에 고생을 했다.

채옹(蔡邕) 133 ∼ 192년 : 후한의 문신. 의랑(議郞) 직에 있으며 십상시(十常侍)들의 행패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나랏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그들의 모함으로 쫓겨나 있던 중, 동탁(董卓)이 그의 문장을 아끼고 국내의 명망이 높은 것을 이용하려 불러내어 등용하였다. 동탁이 패해 죽자, 그의 한 짓은 미우나 자기를 아껴준 정으로 시체를 안고 울다가, 의군(義軍)의 지도자 왕윤(王允)의 손에 죽었다. 천하의 재사라고 불림.

채중(蔡中) : 유표(劉表)의 처남이자 수군 대장이었던 채모(蔡瑁)의 사촌. 그가 죽은 뒤 조조의 막하에 들었었는데, 적벽대전에 앞서 정세를 염탐하기 위하여 조조의 명을 받고 손권의 진으로 파견되었다. 채모가 억울하게 죽은 때문에 거짓 항복하여 눈을 속이려 하였으나 이를 간파(看破)한 주유의 손에 실컷 역이용 당하고 다시 선봉 대장 감녕(甘寧)의 길라잡이로 이용된 후 죽음을 당하였다.

채화(蔡和) : 유표(劉表)의 처남이자 수군 대장인 채모(蔡瑁)의 사촌. 유표가 죽은 뒤로 조조 진에서 부장으로 있었는데, 적벽대전에 앞서 억울하게 죽은 채모의 사촌이라는 명목 때문에 손권 진영에 군기 염탐차 거짓 항복하였었으나, 이를 간파(看破)한 주유에게 실컷 역이용 당하고, 출진에 앞서 그의 목은 군기에 제물로 바쳐졌다.

채훈(蔡壎) : 유표(劉表)의 대장이었다가 조조에게 붙은 채모(蔡瑁)의 아우. 조조의 손권 정벌 때, 강상 제 1차 접전에서 오(吳)의 장수 감녕(甘寧)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초선(貂蟬) : 본시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집 가기(歌妓). 절세의 미인으로, 동탁(董卓)의 횡포와 나라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다 왕윤의 눈에 띄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동탁과 여포(呂布)의 틈에서 그들을 꾀 있게 농락하여 결국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하였다. 성사시킨 후는 여포의 실각(失脚) 유리(流離) 중에도 내내 그의 첩으로 지냈다.

초주( 周) : 서촉 유장(劉璋)의 모신(謀臣). 파서(巴西) 서충국(西充國) 사람으로 자는 윤남(允南). 육경(六經)을 연구하고 서예도 잘하고 천문에 밝았는데, 유비의 성도(成都) 입성을 앞두고 유장에게 천도(遷都)의 이치를 들어 항복하기를 권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을 버리고 도망한 뒤 유비로 한중왕을 봉하라는 표문을 초하였다. 벼슬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렀는데 뒤에 후주(後主)를 따라 위(魏)에 항복하여 양성정후(陽城亭侯)에 봉하였으며 낙양에서 병으로 죽었다.

초촉(焦觸) : 위(魏)의 장수. 원소(袁紹)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군대를 거느렸다가 상대가 안 될 것을 깨닫고 항복하였다. 조조가 대군을 회동하여 손권을 칠 때, 적벽대전을 앞두고 장남(張南)과 함께 자진하여 출전하였다가 동오(東吳)의 장수 한당(韓當)의 창에 찔려 죽었다.

최량(崔諒) : 위(魏)의 안정군(安定郡) 태수. 제갈량이 제1차로 위를 치고자 출병하였을 때 그의 꾀에 넘어가 군사를 끌고 성을 나왔다가 돌아갈 길이 끊겨 항복하였다. 남안군 태수(南安郡 太守) 양릉(楊陵)을 달래 항복시키마 하고 성에 들어가, 그와 합세하여 반격하려다가 장비의 아들 장포(張苞)의 손에 죽었다.

최염(崔琰) : 하북의 명사로 조조의 모신(謀臣). 청하군 동무성(靑河郡 東武城) 사람으로 자는 계규(季珪). 천하의 인재를 잘 가려냄. 후한의 기도위(騎都尉)를 지냈으며 여러 차례 원소(袁紹)를 간하여 자중하라 권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병이라 칭탁하고 집에 박혀 있다가 조조가 원소를 멸한 후 불러내어 별가종사(別 從事)로 임명하였다. 조조가 문무의 전권을 한 손에 쥐자 서조연(西曹椽)이 되어 그의 내정을 도왔다.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는데 뒤에 조조가 위왕(魏王)이 되려는 것을 간하고 욕한 때문에, 옥에 갇힌 뒤 난장(亂杖)을 맞고 죽었다.

최용(崔勇) : 위(魏)의 장수.

최의(崔毅) : 사도(司徒) 벼슬을 하던 최열(崔列)의 아우. 낙양(落陽) 교외에 농장을 치리고 살았다. 십상시의 난리에 쫓긴 젊은 황제와 진류왕(陳留王)이 집가에 숨자 꿈의 계시(啓示)로 이들을 구해내어, 무사히 환궁하게 하였다.

최주평(崔州平) : 남양(南陽)의 숨은 인재. 박릉(博陵) 사람으로 제갈량과 석광원(石廣元)·맹공위(孟公威)·서서(徐庶)들과 함께 친한 친구. 같이 공부하였으나 난세에 나오기를 꺼려 숨어 지냈다.

추정(鄒靖) : 유언(劉焉)의 부하장수.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비(劉備)를 도와 싸움. 교위(校尉).

충소( 邵) : 후한의 중신(重臣)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 벼슬에 있었다. 이각(李 )·곽사(郭 ) 등 동탁(董卓)의 잔당들이 장안(長安)을 점령하자, 동지들과 상의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들이기로 황제께 아뢰어 서량(西 ) 군사가 이르러 싸움이 되었을 때, 내응이 된 것이 탄로나 멸문을 당하였다.

축융부인(祝融夫人)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의 아내. 남편이 여러 차례 붙잡히는 것을 보고 자진 출전한 여중호걸. 등에 다섯 개의 던지는 칼을 메고 열 여덟 자 장창을 들고 나왔는데, 장억(張 )이 이를 맞아 싸우다 창을 맞고 사로잡혔고, 마충(馬忠)마저 그를 구하려다가 붙잡혔다. 그러다가 마대(馬岱)가 걸어 놓은 줄에 걸려 포로가 된 것을 앞서 두 장수와 맞바꾸었다.

충즙(忠楫) : 후한의 중신(重臣)으로 장수교위(長水校尉) 벼슬에 있었다. 허전(許田)의 사냥 때 조조의 외람된 행동을 보고 격분하여, 동지를 규합 이를 치려 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붙잡혀 죽었다.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냄.

[타]

타사대왕(朶思大王) :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과 합세하여 반(反)한 독룡동(禿龍洞)의 동주(洞主). 동중의 독천(毒泉)을 믿고 대항하였으나 무익하여 붙잡혔다가 풀리어 갔다. 맹획과 함께 여러 차례 붙잡혔다가 풀리곤 했는데, 삼강성(三江城)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탁응(卓應) : 촉(蜀)의 장수.

태사자(太史慈) : 손권(孫權) 산하의 맹장. 동래 황현(東萊 黃縣) 사람. 자는 자의(子義). 무예에 능한 이외에도 서사 등에도 능했음. 앞서 북해(北海) 태수 공융(孔融)을 도와 황건 잔당(黃巾 殘黨) 관해(管亥)의 무리를 물리치고 유비(劉備)에게 연락하여 도겸을 돕게 하여주고는, 양주자사(楊州刺使) 유요(劉繇)의 부름을 받아 총총히 떠났다. 그곳에서 손책(孫策)의 침공을 받아 그와 단기로 맞서 싸웠는데 손책은 그의 용맹을 아껴 사로잡아, 그로부터 손권의 사람이 되었다. 뛰어난 용맹으로 여러 차례 큰공을 세웠으나, 적벽대전 후 손권을 따라 합비(合 ) 성을 치다가 장료(張遼)에게 반격 당하여 난전(亂箭)을 맞고 돌아와 죽으니, 그때 나이 사십일 세였다.

태사향(太史向) : 태사자의 아들. 아버지가 죽은후 그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파]

팽양(彭 ) : 서촉의 호걸. 광한(廣漢) 사람으로 자는 영언(永言). 법정(法正)과는 오랜 친구로, 일찍 유장(劉璋)한테 미움을 사서 도예(徒隸)가 되었었다. 유비의 서촉 출병 중 자진해 찾아와서, 지리를 설명하고 부강( 江) 물을 막아서 물을 대어 칠 때 벗어날 계교를 일러주었다. 뒤에 맹달(孟達)이 상용관(上庸關)에 있으면서 관우를 돕지 않았던 죄를 추궁 당해 궁지에 빠졌을 때 유비가 그를 치려는 낌새를 채고 맹달에게 뚱겨주는 편지를 띄웠다가 탄로나 붙잡혀서 죽었다.

포융(鮑隆) : 계양태수(桂陽太守) 조범(趙範)의 수하 장수. 유비가 적벽대전 후 위세를 떨치고 계양성을 손에 넣으려 할 때, 진응(陳應)과 함께 조운(趙雲)을 막아 싸우다 붙잡혔다가 놓이고선 닷 꾀를 내어 항거하다 조운의 손에 죽었다.

포소(鮑素) : 촉한(蜀漢)의 장수. 강유(姜維)를 도와 등애(鄧艾)의 군사를 막아 싸웠는데 기산(祁山)의 진을 지키고 있다가 진태(陳泰)에게 패하여 죽었다.

포신(鮑信) ? ∼ 192년 : 후한 말의 무장. 양평(陽平) 사람으로 자는 윤성(允誠). 하진(何進) 휘하에서 후군교위(後軍校尉)로, 십상시(十常侍) 난리에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여 공을 세웠고 이어 동탁(董卓)이 횡포하게 굴자, 즉각 이를 쳐죽일 것을 건의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수하 군대를 이끌고 태산(泰山)으로 몰려갔다. 동탁 토별 연합군의 제9진에 제북상(濟北相)의 직위로 참전하였다. 공을 세우려고 화웅(華雄)을 습격하나 오히려 아우 포충(포충)과 군사만 잃음. 192년, 연주목 유대(劉岱)가 청주(淸州)의 황건적(黃巾賊)과 싸워 죽은 뒤 사절로 온 진궁(陳宮)의 설득에 따라 조조를 연주목으로 받아들였다. 조조와 함께 황건적 토벌의 제1선에 나서서 위기에 처한 조조를 구출했으나 자신은 전사했다.

풍습(馮習) : 촉한(蜀漢)의 장수.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 출병하였을 때 선봉으로 참전, 손환(孫桓)의 진영을 엄습하여 첫 공을 세웠다. 육손(陸遜)의 반격으로 이릉성(夷陵城)을 포위 당해 혈로를 뚫으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난군(亂軍) 중에서 죽었다.

풍예(馮禮) : 원소(袁紹)의 셋째 아들인 원상(袁尙)의 막하 장수. 심배(審配)의 지휘를 받아 기주(冀州) 성 동문을 지키던 중, 야순을 게을리한 죄로 매를 맞고 조조에게 항복,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공격 법을 제안하여 5백 군사를 이끌고 작업하다가 심배가 깨닫고 큰돌로 틀어막는 바람에 수하들과 함께 질식하여 죽었다.

필궤(畢軌) : 위(魏)의 무신. 동평(東平) 사람으로 자는 소선(昭先). 조상(曹爽)에게 붙어 그가 어린 임금 조방(曹芳)을 돕고 있는 사이, 사예교위(司隸校尉)로서 호강을 하였으나, 사마의(司馬懿)의 쿠데타를 만나 일당이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하]

하만(何曼) : 산동(山東)의 황건적(黃巾賊) 대장. 별명은 절천야차(截天夜叉). 보행으로 쇠몽둥이를 들고 나왔다가 조홍(曹洪)의 타도배작계(拖刀背斫計)에 걸려 칼을 맞고 죽었다.

하안(何晏) ? ∼ 249년 : 위(魏)의 문신(文臣). 남양(南陽) 사람으로 하진(何進)의 손자이며, 자는 평숙(平叔). 어머니가 조조의 측실이 되었기 때문에 위나라의 조정에서 자랐다. 문제(文帝)·명제(明帝) 시대에는 냉대를 받았으나 조상이 실권을 잡자 조상(曹爽)에게 붙어 그가 어린 임금 조방(曹芳)을 돕는 동안 상서(尙書)의 높은 벼슬로 호강을 하였으나, 관로(管輅)의 예언대로 오래지 않아 사마의(司馬懿)에게 붙잡혀 일당이 모두 처형을 당하였다. 궁정문화의 중심인물로서 현학(玄學)을 창조하고 청담(淸談)을 널리 폈다.

하진(何進) ? ∼ 189년 : 후한의 권신(權臣). 소제(少帝)의 모후인 하태후(何太后)의 친정 오라버니. 완(宛) 사람으로 자는 수고(遂高). 본시 돼지나 잡던 천한 몸이었으나, 누이가 궁녀로서 황자 변(辨)을 낳고 황후가 되는 바람에 출세의 가도를 잡아 높은 지위에 올라 정권을 잡았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진압의 총수로서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황건적 진압에 공을 세운 무장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하자 그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조정에서는 전횡을 일삼던 환관에 대항했다. 영제(靈帝)가 세상을 떠나고 십상시의 횡포가 격심해지자, 신 세력의 대표 격인 원소(袁紹)·원술(袁術) 등과 손을 잡고 은밀히 환관 주멸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과 하태후 등의 반대로 주멸계획은 용이하게 실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조해진 원소 등 강경파의 독촉을 받고 하태후에게 압력을 가할 목적으로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외부 군사를 불러들일 것을 고집하였다. 의견을 듣지 않다가 동탁(董卓)의 무리가 도성밖에 도달하자, 다급해진 십상시들의 흉계에 빠져 궁중에 불려 들어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원소(袁紹)가 거느린 군사는 내시의 무리를 몰살시켰다.

하후걸(夏候傑) : 위(魏)의 장수. 조조(曹操)를 따라 형주싸움에 나섰다가 장판교에서 장비의 호통소리에 말에서 떨어진 담이 적은 인물.

하후덕(夏候德) : 위(魏)의 장수. 하후씨(夏候氏)의 종제. 하후연(夏後淵)·장합(張 )과 함께 한중(漢中)에서 유비의 군대와 싸움. 천탕산(天蕩山)을 지켰으나 장합(張 )의 권고를 듣지 않고 싸움에 패한 끝에 노장 엄안(嚴顔)을 만나 그의 칼에 죽었다.

하후돈(夏侯惇) ? ∼ 220년 : 위(魏)의 상장. 초(焦) 사람으로 자는 원양(元讓). 조조와는 사촌뻘로 조조가 그 아버지 대에 조씨에게 양자 갔기 때문에 성만은 달라진 것이다. 하후연(夏後淵)과 처음부터 조조를 따라 다니며 누차 전공을 많이 세움. 동탁(董卓)을 찌르려다 실패하고 진류(陳留)에 돌아와 의거(義擧)할 때, 맨 먼저 천여 명 부하를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여포(呂布)를 토벌할 때 맨 먼저 적장 고순(高順)을 만나 싸우던 중 조성(曹性)이 쏜 화살을 눈에 맞고, 그냥 쑥 뽑아다가 묻어 나온 눈알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며 부모님의 정혈을 어찌 땅에 버리랴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의 첫 싸움 지인 박망파에 대장으로도 출전. 여러 차례 전장에 줄곧 용감하게 싸워 명성을 떨치고 조조가 죽은 뒤 조비(曹丕)가 위왕이 되어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후에 병으로 죽었다.

하후란(夏候蘭) : 조조의 막하 장수. 유비가 유표(劉表)를 의지하여 신야(新野)를 지키고 있을 때, 하후돈(夏侯惇)의 부장으로서 참전하였다가 박망성(搏望城) 싸움에서 제갈량의 첫 번 전략에 빠져 일진이 뭉그러지고 장비의 창에 찔려 죽었다.

하후무(夏候楙) : 위(魏)의 대장. 하후연(夏後淵)의 양자로서, 자는 자휴(子休). 박절한 성미의 사람이었는데 아비가 평생을 충의로 섬기다가 황충(黃忠)에게 죽은 것을 민망히 여겨, 조조는 그를 자기 딸 청하공주(靑河公主)의 부마(駙馬)로 삼았다. 한번도 실전에 참가해 본 일 없이, 황제의 매부라는 명목만으로 장군이 되어 제갈량의 침입을 막았으나, 도저히 그의 적수가 못 되어 숱한 장수와 성을 잃고 사로잡혔다가, 다른 장수를 항복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풀려 나와 천수태수(天水太守) 마준(馬遵)과 함께 오랑캐 땅을 의지해 달아났다.

하후상(夏候尙) : 조조 막하의 장수. 하후돈(夏侯惇)의 조카로 자는 백인(伯仁). 한중(漢中)에서 유비의 군대와 대전하였을 때 고전과 패전을 거듭한 끝에 거짓으로 후퇴하는 황충(黃忠)을 진 가까이 까지 추격하였다가 그에게 사로잡혔다. 자기편에 잡혀 있던 진식(陳式)과 맞바꾸는 도중에 황충이 활을 쏘아 그의 잔등을 맞혔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아 상용관(上庸關)에서 유봉(劉封)을 쫓는데 활약하였다. 조비(曹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죽은 뒤 도후(悼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하후연(夏後淵) ? ∼ 219년 : 위(魏)의 상장. 초(焦) 사람으로 자는 묘재(妙才). 조조와는 사촌뻘로, 조조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았다. 조조가 진류(陳留)에서 의거(義擧)하였을 때 천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여러 번 싸움에 공을 세우고 농서( 西)를 지키다가 오랑캐 땅에서 힘을 길러 재기해 온 마초(馬超)를 무찔러 패주케 하였다. 후에 서정장군(西征將軍)으로서 한중(漢中)을 지키던 중 유비군의 진격을 맞이하여 분전하였으나, 관로(管輅)의 예언에 따라 건안 24년에 노장 황충(黃忠)·엄안(嚴顔)에게 계속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몹시 초조한 나머지 타고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황충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진격하였다가, 그의 칼에 죽었다.

하후위(夏候威) : 위(魏)의 용장. 하후연(夏後淵)의 아들 사형제 중의 둘째, 자는 계권(季權). 사마의(司馬懿)가 조예(曹叡)에게 천거함. 무예에 능하고 병법에도 재질이 있음.

하후은(夏候恩) : 조조의 신변을 지키던 장수. 배검장(背劍將)으로 조조는 원래 두 자루의 보검을 가지고 있어, 의천(倚天)·청홍(靑紅)이라 이름 지어, 의천은 자신이 차고, 청홍은 하후은이 메고 측근에 있게 하였던 것인데, 당양파(當陽坡) 싸움에서 따로 떨어졌다가 조운(趙雲)을 만나서 죽고, 조운은 그 칼을 얻어 여러 차례 위기를 뚫고 나아갔다.

하후패(夏候覇) : 위(魏)의 용장 하후연(夏後淵)의 아들 사형제 중의 맏이. 자는 중권(仲權). 사마의(司馬懿)의 천거로 그의 막하에 들어, 촉한(蜀漢)과의 대전에서 잘 싸우고 옹주(雍洲)의 수비를 맡았었다. 조상(曹爽)이 패하여 죽은 뒤 그의 조카 하후현(夏候玄)이 불려져서 상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변의 위험을 느껴 모반하였다가 패하여 촉한(蜀漢)으로 후주를 의지해 항복하였다. 그곳에서 강유(姜維)의 지우(知遇)를 입어, 여러 차례 출전에 고락을 같이하며 위군을 막았으나, 전부군이 되어 조양성(朝陽城)을 치다가 등애(鄧艾)의 계교에 빠져 난전(亂箭)을 맞고 죽었다. 전날 장비가 장판교(長坂橋)에서 호통을 쳤을 때 조조군 중에서 놀라 말에 떨어진 장수 하후패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하후현(夏候玄) : 위(魏)의 장수로 하후상(夏候尙)의 아들. 자는 태초(太初). 태상(太常) 벼슬에 있었는데, 사마의(司馬懿)의 아들 사마사(司馬師)가 황제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분히 여겨, 이풍(李豊)·장즙(張楫)과 함께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퇴궐하는 도중 사마사를 만나 황제의 밀조(密詔)가 드러난 때문에 들통나 귀양을 감. 정치적인 면과 내정이 무척 뛰어났음.

하후혜(夏候惠) : 위(魏)의 용장 하후연의 아들 사형제 중의 셋째. 자는 아권(雅권). 사마의(司馬懿)가 천거.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고 군사를 부리는데도 능했음.

하후화(夏候和) : 위(魏)의 용장 하후연의 아들 사형제 중의 막내. 자는 의권(義權). 사마의(司馬懿)가 천거. 지략을 겸비하고 무예에도 소질을 보임.

학맹(鶴萌) : 여포(呂布)수하의 장수. 여러 싸움에 출정. 난군중에 죽음.

한당(韓當) : 손권(孫權) 막하의 용장. 손견(孫堅)때부터 손책(孫策)·손권까지 3대에 걸쳐 섬김. 요서 영지(遼西 令支) 사람으로 자는 의공(義公). 유표(劉表)를 칠 때 등성(鄧城) 싸움에서 적장 장호(張虎)를 한 칼에 베었고, 적벽대전에서는 격전 중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졌던 황개(黃蓋)를 건져내었다. 유수(流水) 싸움에서는 주태(周泰)와 함께 거의 조조를 잡을 뻔한 일도 있었으며, 육손(陸遜)과 같이 촉한(蜀漢)의 유비 군대를 탁향( 鄕)에서 크게 파했다. 석성후(石城侯)를 봉하고 도독(都督)의 칭호를 받았으며 병으로 죽었다.

한덕(韓德) : 위(魏)의 장수. 서량(西 )의 대장으로 개산대부(開山大斧)를 잘 쓰고 용맹이 뛰어났었는데, 제갈량이 제1차로 위를 칠 때 한영(韓瑛)·한요(韓瑤)·한경(韓瓊)·한기(韓琪)의 4형제를 데리고 5부자가 함께 서강병(西羌兵)을 거느리고 선봉으로 출전하였다. 봉명산(鳳鳴山)에서 촉한(蜀漢)의 선봉대장 조운(趙雲)과 마주쳐, 차례로 나가 싸웠으나 모조리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조운은 나이 칠십이 넘었으나 첫 번 싸움에 혼자 다섯 장수를 베었던 것이다.

한맹(韓孟) : 위(魏)의 장수. 원소(袁紹)의 장수였으나 후에 조조(曹操)에게 항복.

한복(韓福) : 조조 막하의 장수. 낙양태수(落陽太守)로 있을 때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호위해 나오는 길을 막으려고 부하 맹탄(孟坦)과 함께 항거하다가 맹탄이 그의 칼에 죽자, 활을 쏘아 관우의 왼편 팔뚝을 맞췄으나 격노한 관우의 칼에 꿱 소리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의 오관참장(五關參將)의 제2호.

한복(韓馥) : 후한 말의 장수. 영천군(潁川郡) 사람으로 자는 문절(文節). 동탁(董卓)에 의해 기주자사(冀州刺使)에 임명된 후 원소(袁紹) 등의 반동탁 토벌군의 제2진으로 할 수 없이 참전하였고, 그 후 유우(劉虞)를 황제로 옹립하자는 원소(袁紹)의 계획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적극적으로 천하를 도모할 의사가 없어 원소(袁紹)에게 군량미를 보태주었다가, 도리어 그의 침공을 입어, 허무하게 영토를 빼앗기고 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사람이 겁이 많아 대사를 도모할 인물이 못 되었으니, 노상 주위 사람이 자기를 해치지나 않나 불안에 싸여 지내다가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죽었다.

한섬(韓暹) : 백파수(白波帥)라고 불리던 산적 출신의 장수. 이각(李 )·곽사(郭 )의 난리에 밀조(密詔)를 받들어 어가(御駕)를 호송하였으나, 조조의 대군이 나타나자 원술(袁術)에게로 달아났다. 원술이 황제를 잠칭(簪稱)하고 7로의 군대를 풀어 나왔을 때 6로 군을 거느렸었으나, 진등(陳登)의 설득으로 양봉(楊奉)과 함께 내응이 되어 원술이 패하는 결정적 계기로 만들었다. 여포(呂布)에게서 산동지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노략질하고 백성을 괴롭히기 때문에 유비가 잡아 죽였다.

한수(韓遂) ? ∼ 215년 : 후한 말의 군웅(群雄)중 한 사람. 병주자사(幷州刺使). 자는 문약(文約). 영제(靈帝) 때 변장(邊章)과 함께 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온(張溫)·동탁(董卓) 등의 토벌을 받고 양주(楊州)로 근거지를 옮겼다. 동탁(董卓)의 잔당 이각(李 )·곽사(郭 )의 무리가 장안(長安)을 점령한 동안 마등(馬騰)과 함께 서량(西 )군사를 끌고 쳐들어왔다가, 적이 지구전(持久戰)으로 버티는 바람에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마등과는 형제의 의를 맺은 사이라, 그가 패해 죽은 뒤, 아들 마초(馬超)를 친조카로 여기고 손잡아 조조를 쳐서 여러 번 곤경에 몰아넣었다. 조조는 무력으로 졸지에 대항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둘 사이에 여러 가지로 얕은꾀를 부려 반간(反間)을 놓았기 때문에 드디어는 마초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고 그의 칼에 왼쪽 손목을 잘린 채 조조에게 항복해 있다가, 나중 건안(建安) 이십 년 서평(西平) 금성(金城) 지방에서 말직이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한숭(韓嵩) : 유표(劉表)의 장수. 원술(袁術)이 망한 후 조조와 원소(袁紹)가 대결하게 되자 양쪽에서 손을 뻗쳐 들어왔을 때, 조조와의 사이를 왕래하며 화평에 애썼으나 의심을 사 옥에 갇혔다가 유표(劉表)가 죽은 뒤 놓이어 조조의 수하에 들어 대홍로(大鴻 )의 벼슬을 받았다.

한윤(韓胤) : 원술(袁術)의 막료. 여포(呂布)와의 정책 결혼을 위하여 사신으로 왕래했다가, 원술과 손을 잡으면 조조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진규(陳珪)의 간언(間言)으로 여포(呂布)에게 붙들려 허도(許都) 서울로 끌려가 참을 당하였다.

한현(韓玄) : 후한 말의 무장. 장사태수(長沙太守). 사람이 속이 좁고 의심이 많음. 유비가 적벽대전 후 형주(荊州)를 차지하고 귀순을 권하였을 때, 늙은 장수 황충(黃忠)을 시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관우(關羽)와의 사이에 아끼는 눈치라 잡아죽이려다가 몸을 의지해 와있던 위연(魏延)의 손에 죽었다.

한호(韓浩) : 조조(曹操) 막하 장수. 장사태수(長沙太守) 한현(韓玄)의 아우로서 항복하여 그의 막하에 들었는데, 한중(漢中) 침공 전에 참가하여 하후연(夏後淵)과 함께 군사를 영솔 했으나 여러 차례 고전과 패전을 거듭한 끝에 노장 황충(黃忠)의 칼에 죽었다.

한호(韓浩) : 조조의 막하의 장수. 유비가 유표(劉表)를 의지하여 신야(新野)를 지키고 있을 때, 하후돈(夏侯惇)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제갈량의 첫 솜씨에 녹아 일군이 대패하여 자칫 죽을 뻔하였다.

허공(許貢) : 후한 말 군웅(群雄)의 한 사람. 본시 오군태수(吳郡太守)로, 손책(孫策)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빨리 이것을 쳐야 하리라고 조조에게 올린 편지가 발각되어 잡혀서 죽었다. 그의 집에 신세지고 있던 식객(食客) 세 사람이 손책의 사냥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이를 습격하여, 손책은 그 상처로 인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허사(許 ) : 동탁(董卓)의 부하장수. 낙양(落陽)을 지키다 난군중에 죽음.

허유(許攸) : 본시 원소(袁紹)의 모사(謀士).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자원(子遠). 거만하고 돈 모으기를 좋아하였다. 188년, 기주자사(冀州刺使) 왕분(王芬) 등과 함께 합비후(合肥侯) 옹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원소(袁紹)의 막료로서 활약했다. 조조와는 젊어서 친교가 있었는데, 관도대전(官渡大戰)의 싸움에서 조조가 양식이 떨어진 사실을 순욱(荀彧)에게 써보낸 편지를 입수하고, 원소에게 기습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조조에게 돌아 붙어 대세를 뒤집어 놓았다. 그의 정보로 양곡 쌓아둔 오소(烏巢)를 야습하여 이것을 불사르고 원소의 본영(本營)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고, 뒤에 원담(袁潭)·원상(袁尙) 형제 싸움 가림에 기주(冀州)를 함락시켰을 때, 자기 공로라고 뻐기고 다니다 허저(許 )의 칼에 죽었다.

허의(許儀) : 위(魏)의 장수. 용장 허저(許 )의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종회(鍾會)를 시켜 위를 칠 때의 선봉 대장. 남정관(南鄭關)을 치다가 수상 노손(盧遜)에게 막혀 이루지 못하고, 이어 종회가 현지를 답사하고 돌아오다 쫓겨 다리 구멍에 말굽이 빠져 죽을 뻔했던 탓으로 공신의 후예건만 군무에 충실치 못한 죄로 참형을 당하였다.

허저(許 ) : 조조(曹操) 막하의 용장. 초국 초현(焦國 焦縣) 사람. 자는 중강(仲康). 조조가 복양( 陽)의 패전 후 황건잔당(黃巾殘黨)을 토벌할 때 자신의 마을을 지키다 그의 수하에 들었다. 용맹이 절륜하여 동관(潼關) 싸움에서 조조가 위경에 빠졌을 때는, 그를 들쳐 없고 한 칸이나 멀리 떨어진 배 위로 뛰어들었고, 혼자 말안장으로 적의 화살을 막으며 노를 저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조조의 신변을 지키는 군대를 호위군(虎位軍)이라 하여 전위(典韋)와 그가 거느렸는데 전위는 장수(張繡)의 야습으로 죽고, 허저는 음이 비슷하게 호치(虎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동관의 싸움에서 마초(馬超)가 면대해 호후(虎侯)라고 불렀으므로 이후론 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마초와 전후 이 백 합을 싸운 끝에는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발가벗고 나서서 창을 잡고 승강이하다가 부러진 창으로 서로 두드리는 희극도 벌이었다. 인간이 우직(우직)할 정도로 고지식하여, 조조가 취해서 자는 방을 지킬 때 조인(曹仁)이 찾아온 것도 통과시키지 않아 조조에게 참 충신이라고 칭찬 받기도 하였다. 조조가 죽었을 때는 울다 피를 다 토했다 한다. 무위장군(武衛將軍)의 칭호를 받았으며, 뒤에 병으로 죽었다.

허정(許靖) : 촉한(蜀漢)의 문신(文臣). 여남 평여(汝南 平與) 사람으로 자는 문휴(文休). 글을 잘하고 지략이 있었다. 법정(法正)과 함께 유비를 도와 한중왕(漢中王)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벼슬이 사도(司徒)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허지(許芝) : 위(魏)의 문신. 태사승(太史丞)으로 있으며, 천문의 변조(變兆)를 들어 헌제(獻帝)를 핍박하여, 조비(曹丕)에게 선위 하도록 요구하였다.

헌제(獻帝) : 영제(靈帝)의 둘째 아들로 처음에 진류왕(陳留王)에 봉함을 입어 십상시(十常侍) 난리에 소제(少帝)와 같이 피신하였다. 동탁(董卓)이 임금으로 세우니 그때 나이 겨우 아홉 살이요, 연호(年號)를 초평(初平)이라 하였다. 이각(李 )·곽사(郭 )의 난을 만나 갖은 신고를 겪고, 다시 조조의 받드는 바 되었으나 허전(許田)의 사냥 이후 조정의 권한이 기우는 것을 한탄, 밀조(密詔)를 의대(衣帶) 속에 넣어 국구(國舅) 동승(董承)에 내려 조조를 멸하려다 발각되어 충신의 무리는 모조리 죽음을 당하고 동귀비(董貴妃)마저도 죽음을 당하였으며, 조조가 살았을 대만은 그래도 빈자리나마 유지하더니, 그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산양공(山陽公)이란 호칭으로 지내다가, 제갈량이 죽고 그 해 오십사세로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학소(鶴昭) : 위(魏)의 용장. 태원(太原)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道). 사마의(司馬懿)의 신임이 두터워 가정(街亭)의 싸움 뒤, 동오(東吳)를 치러 나간 사이 진창(陳倉) 어귀를 지키어 제갈량의 불의의 습격을 막는 중임을 위탁받았다. 제갈량이 재차 출병했을 때 작은 성이라고 얕잡았으나 불과 3천의 수병으로 잘 싸워 그의 운제(雲梯)·충차(衝車)·갱도(坑道)로 파 들어가는 전술이 모두 소용이 닿지 않았다. 결국 제갈양은 학소가 굳게 지키는 진창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형도영(邢道榮) : 영릉군태수(零陵郡太守) 유도(劉度)의 부하 장수로 큰 도끼를 잘 써서 용명이 있었다. 유비가 적벽대전 후 형주(荊州)를 손에 넣고 이 군마저 병합하려 들자, 자신의 용맹만을 믿고 항전하였다가 견디지 못하여 항복, 일단 석방되어 주인을 귀순시킬 임무를 받았으나, 야습으로 다시 항거하다가 조운(趙雲)의 창에 찔려서 죽었다.

형정(邢貞) : 위주(魏主) 조비(曹丕)의 모신(謀臣). 유비가 동오(東吳)를 치러 동병 하였을 때 사신 갔던 조자(趙資)를 따라 동오에 와서,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봉하고 구석(九錫)을 가하는 일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거만하게 굴다가 장소(張昭)의 호통에 혼이 나기도 하였다.

호거아(胡車兒) : 동탁(董卓)의 잔당인 장수(張繡) 수하의 역사. 완성(宛城)에서 조조의 침소를 야습할 때, 전위(全韋)를 속여서 술을 먹여 골아 떨어지게 하였다. 이 바람에 조조는 아들과 조카까지 죽이는 참패를 당하였다.

호반(胡班) :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보호하여 조조의 곁을 떠나갈 때 관대하던 호화(胡華) 노인의 아들. 형양태수(滎陽太守) 왕식(王植)의 종사(從事)로 명령을 받아 그를 죽일 채비를 하였으나, 한번 대하자 인품에 눌리고 또 아비의 서신도 있어, 왕식의 흉계를 일러 위기를 모면하게 하여 주었다.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있을 때 찾아와서 유비 막하에 들게 되었다. 법정(法正)을 따라 촉한(蜀漢)으로 갔다고 했을 뿐 뒷 소식은 모른다.

호재(胡才) : 동탁(董卓)의 장수.

호준(胡遵) : 위(魏)의 장수. 사마의(司馬懿)의 요동(遼東) 정벌에 선봉으로 나서서 활약하였다. 뒤에 동오(東吳)를 칠 때에는 진중에서 술만 먹고 있다가 적장 정봉(丁奉)이 3천 명의 병정을 데리고 단병 접전으로 급습해 들어오는 통에, 환가(桓嘉)·한종(韓綜)의 두 장수를 일시에 잃고 대패하였다.

호진(胡軫) : 동탁(董卓)의 부하장수. 난군중에 죽음.

호화(胡華) : 관우가 조조의 막하를 떠나 유비를 찾아갈 때 만났던 전에 의랑(議郞) 벼슬을 하였다는 노인. 극진히 대우해 준 뒤에 아들 호반(胡班)에게 보내는 편지를 당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관우는 또 한차례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화웅(華雄) : 동탁(董卓) 막하의 용장. 관서(關西) 사람으로 키는 구척이나 되고 효용이 절륜하였다. 십칠 진으로 된 동탁 토벌군을 사수관( 水關)에서 막아 싸워 용맹을 떨쳤다. 먼저 포신(鮑信)의 아우 포충(鮑忠)을 베고 원술(袁術)의 장수 유섭(兪涉), 한복(韓馥)의 장수 반봉(潘鳳)이 연이어 그의 손에 죽었다. 그러다가 당시로는 아직 이름이 없던 관운장이 나아가 손쉽게 그의 머리를 베어 용맹한 이름을 일시에 떨치고 존재가 뚜렷해졌다. 관직은 효기교위(驍騎校尉).

화타(華陀) : 유명한 의사. 패국 초군(沛國 焦郡) 사람으로 자를 원화(元化)라 하였다. 신의(神醫)로 이름이 높아 수많은 환자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다. 동오(東吳)에서는 주태(周泰)가 여러 곳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을 치료해 살렸고, 나중 형주(荊州)로 관운장이 화살을 맞아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살을 짜개고 뼈를 긁어 말짱히 치료하였다. 뒤에 조조가 죽음에 임박 하에 두통이 심하다고 불렀을 때, 골을 빠개어 치료하면 된다는 의견에 노여움을 사 그의 손에 죽었다. 조조와는 동고향 출신이다. 청낭서(靑囊書)를 저술.

화핵(華 ) : 동오(東吳)의 중신(重臣). 오주(吳主) 손호(孫皓)가 날로 포악무도해 지며, 술사(術士) 상광(尙廣)의 말을 믿는 것을 간하였으나, '마땅히 죽일 것이로되 구신(舊臣)의 낯을 보아 살려 둔다'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고 돌아와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화흠(華歆) 157 ∼ 231년 : 조조 막하의 문신(文臣). 평원 고당(平原 高唐) 사람으로 자는 자어(子魚). 본시 하진(何進)에 의해 벼슬을 했으나 동탁이 진횡하자 일단 은퇴했다. 헌제(獻帝) 때 예장군 태수(豫章郡 太守)였으나, 우번(虞飜)의 권고로 동오(東吳)의 산하에 들었다. 조조에게도 신임이 두터웠던 때문에 동오의 사신으로 갔다가 눌러앉아 벼슬하였다. 젊어서부터 문장으로나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있었으나 조조가 복황후(伏皇后)를 잡아내 죽일 때 손수 황후의 밀실을 습격하여, 머리채를 거머잡고 끌어내는 등 신하로서 못할 짓을 한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끝내는 미리 조칙(詔勅)을 초하여 가지고 선위(禪位)하기를 황제에게 강요하였다.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화흡(和洽) : 조조 막하의 문신(文臣). 여남 서평(汝南 西平) 사람으로 자는 양사(陽士).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청빈(淸貧)하였으며 조조에게 위왕 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태상(太常)에 이르렀으며 죽은 뒤 간후(簡侯)라 시호하였다.

환범(桓範) : 위(魏)의 무신. 패국(沛國) 사람으로 자는 원칙(元則). 조상(曹爽)에게 붙어서 출세하였는데 재주와 시국을 보는 눈이 있어 지낭(智囊)이라는 별명으로 통하였다. 조상이 일족 전부 성밖에 사냥 나가는 것을 간했으며, 사마의가 성문을 막자 꾀로 빠져나가 조상을 만나, 천자를 모셔 허창을 발판으로 재기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환의(桓懿) : 동오(東吳)의 충신. 손침(孫 )이 권세를 잡아, 이대 황제 되는 손양(孫亮)을 내쳐 폐립(廢立)을 단행할 때, 아무도 항거하지 못하였으나 홀로 반열(班列)에서 나서 그를 꾸짖다가 당장에 손침에게 참을 당하였으나, 의기로운 남아로서의 이름을 남기었다.

황개(黃蓋) : 오(吳)의 용장. 영릉 천릉(零陵 天陵) 사람으로 자는 공복(公馥). 손견(孫堅) 때부터의 충성스런 대장으로 허다한 공을 세웠다. 적벽대전을 앞두고는 스스로 주유(周瑜)의 진을 찾아 고육지책(苦肉之策)을 쓸 것을 헌책, 생으로는 주유의 의견에 반대하였다가 죽도록 얻어맞고는 거짓으로 항복하는 문서를 조조에게 띄우고 파견돼 있는 채중(蔡中), 채화(蔡和) 등 간첩의 눈을 속여 적벽대전의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대전에는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장료(張遼)가 쏜 화살을 맞아 물에 빠졌으나, 본시 헤엄의 명수라 엄동에 갑옷을 입은 채였건만 살아나 다시 활동하였다. 벼슬이 편장군(偏將軍)에 이르렀으며 유비와 대립하게 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황권(黃權) : 익주(益州) 유장(劉璋) 부중(府中)의 주부(主簿). 서랑중 파현(西 中 巴縣) 사람으로 자는 공형(公衡). 장로(張魯)의 침입을 앞두고 법정(法正)·맹달(孟達) 무리가 유비를 불러들이자는 의견을 사리를 들어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머리를 땅에 부딪쳐 피를 흘리며 기어가 유장의 옷자락을 물고 말리다가 옷자락을 채는 바람에 앞니 두 개가 뽑히기까지 하였다. 유비가 쳐들어와 촉(蜀)의 운명이 위태로워졌을 때는 스스로 사신이 되어 한중(漢中) 장로에게 가 득실을 설명하여 군사를 출동하게도 하였다. 유장이 항복한 뒤로 버티다가 유비가 친히 찾아보고 권하는 바람에 나와서 벼슬하게 되었다. 동오(東吳)에 출병하였을 대는 수군을 통솔하였는데, 육손(陸遜)의 반격으로 대패하자 수하 병을 거느리고 위(魏)에 항복하였다. 조비(曹丕)는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으며 제갈량도 그의 가족을 해치지 않았다.

황규(黃奎) : 후한의 중신(重臣)인 황완(黃琬)의 아들. 조조 아래서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있었는데, 서량태수(西 太守) 마등(馬騰)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아 본심을 털어놓고 일을 꾸미려 하였으나, 데리고 살던 첩 이춘향의 간부 묘택(苗澤)의 밀고(密告)로 대사를 그르치고 마등과 함께 잡혀서 죽고 일족이 멸망당하였다.

황보숭(皇甫嵩) ? ∼ 195년 : 후한 말 장군. 자는 의진(義眞). 조나(朝那) 사람.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하진(何進)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했다. 이 때 북지군태수(北地郡太守)로 있던 황보숭은 군신회의 석상에서 당고(黨錮)의 금지를 해제할 것과 황제의 사유재산 및 마필을 방출하도록 주장했다. 이것이 용납되자 그는 좌장군(左將軍)으로 출전하여 장사(長沙)·여남(汝南)·진국(陳國)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고 평정했다. 188년, 서북에서 일어난 반란군에 의해 진창(진창)이 포위되자 좌장군으로 다시 기용되어 전장군(前將軍)인 동탁과 함께 이를 물리치게 되었다. 이때 동탁과 두 번에 걸친 병법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실전에서 적에게 파괴적인 타격을 주어 자신의 옳음을 증명했다. 이로써 동탁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같은 해 조정의 동탁군의 군 권을 빼앗기 위해 전 장병을 황보숭에게 인계할 것을 명했으나 동탁은 두 번이나 이를 거부했다. 이 사실은 동탁의 원한을 더욱 사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동탁이 실권을 잡자 황보숭을 죽이려고 장안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그에게 낙양(落陽) 출두를 명했다. 이때 양연(梁衍)이 동탁을 토벌하자고 했으나 듣지 않고 출두하여 그에게 사로잡혔다. 다행히 처형되기 직전 동탁과 친했던 아들 견수(堅壽)의 탄원으로 석방되었으나 후에 궁중 앞에서 동탁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동탁이 죽은 후 태위(太尉)까지 승진했다가 병으로 죽었다.

황보역(皇甫 ) : 후한의 충신. 서량(西 ) 사람으로 동탁(董卓)의 잔당인 이각을 크게 꾸짖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각의 군중은 크게 동요하였다.

황승언(黃承彦) : 제갈량의 장인. 양양(襄陽)의 명사로 고결하기로 이름 높았다. 같은 양양의 명사인 채모(蔡瑁)의 누이와 결혼하여 태어난 추녀인 그의 딸은 모습이 괴이하고 추하여 장부의 아내 감이 못 되었으나, 지략이 뛰어나 남편의 공업(功業)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전한다. 벼슬하지 않고 산중에 묻혀 지내던 중 어복포(魚腹脯)에서 육손(陸遜)이 팔진도(八陣圖)에 빠져 죽게 된 것을 딱하게 여겨 구해 주었다.

황씨부인(黃氏夫人) : 제갈량(諸葛亮)의 부인. 황승언(黃承彦)의 딸로 얼굴이 몹시 추하여 보잘것없었으나, 재주가 있어 천문과 지리에 통달했고 육도삼략(六韜三略)과 둔갑법(遁甲法)에도 능통하였다. 애초에 제갈량이 낙양(落陽)에 있을 때,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맞이한 것인데, 실상 그의 내조에 힘입은 바 크다 한다. 남편이 죽자 충효(忠孝) 두 글자로써 유언을 남기고 뒤따라 죽었다.

황완(黃琬) : 후한의 사예교위(司隸校尉). 태위(太尉)로 있으면서,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도읍을 옮길 때 사리를 들어 반대하다가 파직 당하여 서민이 되었다. 그러나 함께 간하던 오경(伍瓊)·주필(周珌) 등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나머지 동탁에게 복종의 맹세를 했다. 후에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모의하여 밀조(密詔)를 얻어 여포(呂布)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하였다. 이각(李 )·곽사(郭 )의 난리 중에 세상을 떠나고, 아들 황규(黃奎)는 나중에 마등(馬騰)과 일을 모의하다가 조조에게 잡혀서 죽었다.

황조(黃祖) ? ∼ 208년 : 유표(劉表) 수하 수군의 용장. 손견(孫堅)이 자기 돌아 갈 길을 끊던 일을 함혐(含嫌)하여 쳐들어 올 때, 그를 현산(현산)에서 죽였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어서 강하태수(江夏太守)로 있을 때 유표가 사신으로 보낸 예형( 衡)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양양성(襄陽城)에서 황개(黃蓋)에게 사로잡혔다가, 손책(孫策)의 시체와 교환으로 풀려 나왔다. 손책이 유표를 치다가 죽었으므로 동오(東吳)에서는 늘 유표를 원수로 여겨왔던 때문에 전후 여러 차례에 걸친 손권의 침공을 겪고 그때마다 잘 싸웠으나 감녕(甘寧)의 화살에 맞아 죽고 동오에서는 그의 목을 베어다 손책을 제사지냈다.

황충(黃忠) ? ∼ 219년 : 유비 막하의 용장. 오호대장(五虎大將)의 한 사람.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한승(漢升).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용맹을 발휘. 특히 신궁(新弓)으로 불리며 활 솜씨가 극히 뛰어났음. 원래 유표(劉表) 수하의 중랑장(中郞張)이었으나, 한현(韓玄)에게 있다가 장사(長沙)를 치러 온 관우(關羽)와 뜻이 통해 낙성(洛城) 후 유비의 부름을 받아 그의 막하에 들어 토로장군(討虜將軍)이 되었다. 서촉(西蜀)으로 유장(劉璋)을 칠 때는 위연(魏延)과 함께 선봉이 되어 공을 세우고 218년에 한중(漢中)에서 조조군과 부딪쳤을 때는 역시 늙은 장수 엄안(嚴顔)과 함께 정군산(定軍山)에서 위공(偉功)을 세웠으며, 위(魏)의 명장 하후연(夏後淵)의 목을 베었다. 같은 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오호장군이 되었다.

황호(黃皓) : 촉한(蜀漢)의 환관(宦官)이요, 간신(奸臣). 암우한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주변에 인(人)의 장벽을 쌓고 그의 눈과 귀를 가려 간사하게 굴고 주색에 파묻히게 하였다. 강유(姜維)가 위병(魏兵)과 싸워 연전연승하였을 때도, 까닭 없이 불러들여 시기를 놓치게 했고, 위군의 침입까지 속여서 알리지 않았다. 위장 등애(鄧艾)도 그를 죽이려 했으나, 뇌물과 간사한 말로써 목숨을 보전하였다. 후주를 좇아 낙양으로 옮겼을 때, 사마소(司馬昭)는 그를 가리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한 놈이라고 무사를 시켜 능지처참(陵遲處斬)해 죽였다.

후선(侯選) : 위(魏)의 장수. 마등(馬騰)의 부하장수로 있던 중 조조(曹操)와의 싸움에서 항복함.

후성(侯成) : 위(魏)의 장수. 여포(呂布)의 부하장수였으나 금주령(禁酒令)을 어긴 죄로 처벌을 받고 앙심을 품어 그를 묶어 조조(曹操)에게 바치고 항복함.

희려( 慮) : 조조 막하의 장수. 복황후(伏皇后)가 친정 아버지 복완(伏完)과 짜고 날로 방약무인하게 된 조조를 없애려던 계책이 탄로 났을 때, 명을 받들고 들어가 황후의 옥새(玉璽)를 강제로 회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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